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영균 Sep 21. 2021

우리의 승리를 위하여!

마술인의 분석

언제 한 번 제가 술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때 저는 술집의 사람들에게 그동안 연습했던 마술을 보여주고 있었죠.

카드 한 장을 고르고 아주 멋지게 그 카드를 찾아내는 마술이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이 제게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내가 직접 카드를 섞어도, 당신이 카드를 찾을 수 있나?'

짖궂은 표정을 짓는 그에게 저는 흔쾌히 말했습니다. '그럼요'


카드를 가져간 그는 카드를 열심히 섞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걸 기다리는 동안 맥주를 한 잔 마시기로 생각했죠.

맥주에 잠시 한눈을 판 사이, 희한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카드의 절반을 뒤집어 앞면과 뒷면을 뒤죽박죽 섞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제가 그걸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카드를 돌려주는 그의 표정은 정말 의기양양했습니다.

제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겠죠.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른 카드를 잘 기억해주세요'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적막한 공기가 내려앉았습니다.


'딱'


침묵을 깨고 저는 손가락을 튕겼고, 그대로 카드를 펼쳤습니다.

그때 그 모습이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모든 카드가 뒷면으로 정리되고, 그가 고른 7하트만 앞면으로 남아있었거든요.



오늘의 주제는 트라이엄프Triumph 마술이다.



    책 [스타즈 오브 매직Stars of magic]에 실려있는, 다이 버논Dai Vernon의 트라이엄프 마술은 카드마술 중에서 손에 꼽는 명작이다. 명작은 복잡하지 않고 간결하다.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앞뒤로 뒤죽박죽 섞인 카드를 순식간에 정리했어!' 맨 처음 이 마술을 보았을 때 느꼈던 충격이 아직 생생하다. 이 마술은 사라지고 나타나거나 이동하는 마술이 아니다. 그럼에도 분명히 이 마술은 관객의 마음과 생각을 압도하는 강력함을 품고 있다.




'앞뒤로 섞인 카드가 정리된다' 라는 마술


    누구나 마술을 하다가 카드를 떨어뜨려 앞 뒤로 마구 섞인 상황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때 앞면 카드를 일일이 꺼내서 뒷면 카드와 분류하는 일은 무척 귀찮은 일이다. 카드가 앞뒤로 섞여있는 상태는 무척 불편한 감정을 일으킨다. 카드의 주된 용도는 카드 게임이고, 게임을 진행하는 내내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카드는 한쪽 면으로 정리되어있기 때문이다. 트라이엄프 마술 현상은 사람들의 그런 본능적인 불편함을 활용한다.


    이전의 글에서도 다루었듯, '사람들은 마술을 통해 그들이 욕망하는 것을 얻고자 한다.' 마술사는 관객들에게 카드가 앞뒤로 섞여있는, 무척 불편한 상태를 제시한다. 관객들은 본능적으로 불편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다. 그리고 마술사가 모든 카드를 순식간에 정리함과 동시에 관객들의 욕망이 충족된다. 많은 마술사들이 실수로 (또는 실수를 가장해서) 카드를 앞뒤로 섞어버린 후에 트라이엄프 마술을 이어서 진행하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게다가 앞뒤로 섞여있는 카드를 실제로 정리하는 상상을 해 보자. 카드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우선 어떤 카드가 앞면이고 어떤 카드가 뒷면인지 알아야한다. 모든 카드가 정리되었을 때 관객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카드를 앞뒤로 정리하기 위해서는 앞면 카드를 뒤집어두어야한다.' '모든 카드가 정리되어있다는 것은 뒷면 카드는 뒤집지 않고 앞면 카드만 뒤집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론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제시한다.


    '마술사는 모든 카드의 정보를 모조리 꿰뚫어보고있다!'




왜 빅토리Victory가 아니라 트라이엄프Triumph인가?


    짖궂은 관객이 마술사의 카드를 앞뒤로 섞는 무례를 저지르지만 마술사는 역경을 이겨내고 관객을 상대로 '승리'를 쟁취한다. 이는 전형적인 주인공이 고난을 극복하는 이야기로서, 많은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열광한다. 마술 이름이 트라이엄프(Triumph = 승리)인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무례한 관객에 대한 마술사의 승리'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트라이엄프라는 단어의 어감이 이상하다. 우리가 익숙한 '승리'라는 영단어는 빅토리(Victory)이기 때문이다. 우리말로는 둘 다 '승리'로 번역되는 Victory와 Triumph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영영사전에서 Victory와 Triumph를 검색하면 각각 다음과 같은 뜻이 나온다.


Victory
    - an act of defeating an enemy or opponent in a battle, game, or other competition.

Triumph
    - a great victory or achievement.

 (출처 : Oxford language)


    번역하자면, Victory는 전투나 게임과 같은 경쟁에서 상대를 꺾고 얻어낸 승리를 뜻한다. Triumph 역시 Victory의 뜻을 일부 지니고 있지만 Triumph는 상대를 꺾고 얻어낸 승리 뿐만 아니라 위대한 업적이라는 의미도 함께 포함한다. Victory는 패자를 동반하는 승리를 뜻하고 Triumph는 그것을 포함한 더 넓은 범주에서의 승리를 뜻한다.


    승자가 있으면 당연히 패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인생의 모든 성취들이 누군가 승리한다고 반드시 누군가 패배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과 환경을 묵묵히 견뎌내고 결국 성공한 이들이 있다. 이들의 성취는 다른 이들을 패배시키고 얻어낸 것이 아니다. 그들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치열하게 싸운 끝에 얻어낸 것이다.



        어쩌면 트라이엄프라는 이름을 처음 지은 사람은 이 마술이 '관객에 대한 승리'가 아닌, '고난 그 자체에 대한 승리'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이 이 마술을 관객이 패배하고, 마술사가 홀로 승리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무례한 관객을 상대로 마술사가 승리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면 그냥 Victory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무방했을 것이다.


    이 마술의 이름은 Victory가 아닌 Triumph다. 관객이 카드를 앞뒤로 섞지 않았다면 트라이엄프 마술의 이야기는 애초에 성립할 수가 없다. 트라이엄프는 관객이 던진 돌발적인 변화구를 마술사가 훌륭하게 받아칠 수 있었기에 가능한 마술이기 때문이다. 이 마술의 이름이 마술사만의 빅토리가 아닌, 관객과 마술사 모두의 트라이엄프인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트라이엄프의 다른 표현

    

    마술 현상 하나에 대해서도 정말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 몇몇 마술인들은 트릭의 다양성을 표현의 다양성과 헷갈리기도 한다. 트릭이 다양하다는 것은 그 마술 현상을 달성할 수 있는 기법이 다양하게 있다는 것이다. 이전에 다루었던 앰비셔스 카드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고른 카드가 올라온다.' 라는 동일한 현상을 다양한 기법을 써서 연속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앰비셔스 카드의 정석적인 구성이다.


    지금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반대의 개념이다. [스타즈 오브 매직]에 실린 트라이엄프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기법을 사용하면서도 현상을 다르게 보여줄 수 있는 여러 가지 색다른 아이디어들이다. 독자적인 기법을 갖고있는 경우도 있지만, 여기서는 기법이 아니라 표현에만 집중해보자.



- 손기술 트라이엄프


    최근 타짜 기술 유튜버로 활발하게 활동 중인 김슬기님은 몇 년 전, 2014년에 마술 책을 한 권 내신 적이 있다. 한정판이었지만 운이 좋게도 그 책을 구하는 데 성공했고 정말 유익하게 읽었다. 바로 [에튀드]라는 책이다. 그 책에는 훌륭한 트라이엄프가 하나 실려있었는데, 이름부터가 어마어마한, '손기술 트라이엄프 : 중장빼기(Triumph of Sleight of hand  : The Center Deal)' 이다. 플롯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밑장빼기라는 타짜 기술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타짜들은 단순히 밑장을 빼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죠.

    더 나아가기로 했습니다.

    "만약 중간에 있는, 원하는 위치에 있는 카드를 빼낼 수 있으면 어떨까?"

    제가 지금부터 보여드릴 기술은 중장빼기라는 기술입니다.


    우선 카드를 앞뒤로 섞습니다.

    그 다음에는 앞면 카드의 위치를 외워야합니다.

    이제 어렵지만 간단한 일만 남았습니다.

    중장빼기를 통해 앞면 카드만 모조리 골라내는 것이죠.


    본래 트라이엄프는 마술적인 현상이었는데, 중장빼기라는 개념을 써서 마술적인 현상을 기술적인 현상으로 탈바꿈한 훌륭한 발상의 전환이라고 생각한다. 트라이엄프 마술 중에서 손에 꼽는 독특한 표현이며 게다가 슬기님의 '타짜' 캐릭터와도 훌륭하게 어우러지는 작품이다. 



- 우연의 일치 트라이엄프


    우연의 일치 현상은 정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하지만 잘할 수만 있다면 관객들과 함께 소중한 순간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앞뒤로 섞인 카드를 상자에 넣고 마구 흔들어 섞었다.

    만에 하나, 억에 하나의 확률로 여기 카드들은 모두 정리되어있을지도 모른다.

    한 번 확인해보자.


    우연의 일치가 아닌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와 같은 이야기로 접근할 수도 있다. '간절히 나서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 와 같은 이야기로 관객과 마술사가 함께 트라이엄프 마술을 완성하는 장면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시간 역행 트라이엄프


    시작한 상태와 끝난 상태를 동일하게 표현할 수 있다면 '시간을 되돌려 카드를 정리한다.' 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다.


    카드를 앞뒤로 섞었지만, 시간을 되돌려 다시 카드를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았다.


    시간을 되돌린다는 이야기만으로도 트라이엄프 마술 현상의 분위기가 크게 변한다. 다른 마술들과 조합해서 사용할 수도 있다. 섞여있는 큐브는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 변할까? 끊어진 로프는 어떻게 될까? 이미 마셔버린 와인 잔은 어떻게 될까? 시간 역행은 정말로 흥미로운 소재다.




시련을 겪는 모든 이들에게


    모든 생물체는 고난을 겪는다. 고난이 없이 자란 것처럼 보이는 이른바 금수저들도 분명히 그들의 인생에서 그들만의 고난을 겪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준이 그들의 기준과 많이 다르겠지만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공통적으로 인생에서 크고 작은 고난을 겪는다.


    특히나 이번 코로나19 팬데믹 시대는 수많은 마술사들에게 좌절을 안겨주었다. 공연 업계가 모두 그렇겠지만 마술은 더욱 비대면으로 전환하기 어려운 형태의 공연이다. 관객과의 소통이 부재하는 마술 공연이라니 이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마술 공연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전에 없는 역경과 고난을 겪고 있을 것이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수준으로.


    다른 마술들도 그렇지만 트라이엄프는 현상의 특성상 '고난을 극복하는 이야기'라는 색깔이 짙다. 카드를 앞뒤로 섞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편한 경험이고, 그걸 한번에 정리하는 현상은 통쾌하다. 그러나 마술은 환상에 불과하고 마술이 끝난 후에 남아있는 것은 지독한 현실의 문제들이다. 슬프게도 현실에서는 신호 한 번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생의 시련을 겼는 모든 이들에게,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 중 일부는 생각한 것보다 오래도록 해결되지 못한 채 남을 것이다. 반면 어떤 문제들은 생각보다 간단하게 해결될 지도 모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언젠가 우리가 승리하리라고 믿는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빅토리가 아닌, 우리 모두의 트라이엄프가 올 것이라고 바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의 승리를 위하여!

    







        

작가의 이전글 헤클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