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공연리뷰
나는 타짜 기술 유튜버 김슬기님의 오랜 팬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분을 사기도박 전문가, 타짜기술 덕후로 알고있지만, 사실 이 분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전부터 언더그라운드 마술계에서 유명했다. 십여 년 전부터 그의 손기술은 이미 국내 최고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그가 집필한 [ETUDE]라는 마술 강의 노트는 지금도 정가의 몇 배 이상의 가격으로 중고장터에서 종종 거래되곤 하니, 더욱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내가 처음으로 슬기님을 만난 것은, 9년 전 그의 마술 공연을 보았을 때였다. 관객은 20~30명 정도밖에 없었지만, 그 공연을 보고 나는 본격적으로 마술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때 슬기님의 공연을 보지 못했다면, 나는 아마도 마술에 이렇게까지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에도 그는 개인 유튜브 계정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는 카드 기술 영상이 몇 개 올라와 있었는데, 그가 직접 고안한 기술도 있었고, 카드 마술 영상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모든 영상이 내려갔고, 좀 더 정돈된 컨텐츠가 업로드되기 시작했다. 바로 지금 운영하고 있는 [김슬기] 채널의 시작이었다. 그 이후로 채널은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고, 슬기님은 점점 공연과 거리가 먼 사람이 되어갔다. 그는 각종 방송과 미디어에 출연하면서 마술의 신기함이 아닌 타짜의 무서움을 전달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의 오랜 팬으로서, 그가 일반 대중들에게 유명세를 얻는 모습은 무척 기쁜 일이었지만, 두 번 다시 그의 공연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꽤나 슬프고 아쉬웠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깜짝 발표를 했다. 공연을 올리기로 했다는 것이다. 바로 [하얀 그림자]였다. 티켓 가격은 8만 원. 결코 저렴한 가격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그가 쌓아올린 경력과 유명세를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결정이었다. 나는 고민하지 않고 가능한 가장 빠른 시간대의 공연을 예매했다.
공연 장소는 스튜디오 아르카나. 사당역과 이수역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꽤 깊은 골목 속에 위치해있다. 마치 비밀스러운 타짜들의 도박장을 찾아가는 기분. 처음 공연을 보는 사람들은 공연장을 찾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스탭분이 입구에 나와있었던 덕분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공연장 내부는 무척 깔끔하고 고급스러웠다. 스튜디오의 인테리어 소품과 가구들이 모두 한 데 모여서 조화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게다가 그 분위기가 슬기님의 정중하면서 재치있는 모습과 잘 어울렸다. 마치 스튜디오를 만들 때부터 [하얀 그림자] 공연을 위해 처음부터 이런 가구들을 준비한 것 같았다. 또한, 나무 비행기나 물병처럼 사소한 소품 하나하나가 모두 공연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었다. 의미없이 배치된 소품은 없었다.
스포일러를 피해 최대한 공연의 내용을 설명해보자면, 우선 이번 공연은 마술 공연이 아니다. 슬기님은 다양한 사기도박 기술을 시연하고, 타짜의 경이로운 능력을 선보인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슬기님의 유튜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손기술을 그저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기회 정도로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 추측은 틀렸다. 이 공연을 보고 내가 가장 크게 놀랐던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는데, 손기술은 이번 공연에서 1/3 정도만을 차지한다.
그의 손기술을 육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만약 나처럼 슬기님의 영상을 꾸준히 시청해온 팬이라면 영상으로만 보았던 손기술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울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웠던 부분은, 뒷 줄에 앉은 사람들을 무대로 불러 슬기님 뒤에 세운 다음, 360도로 둘러싸인 상태에서 손기술을 쓰는 파트가 있다. "옆이나 뒤에서 보면 기술이 어떻게 쓰이는지 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김슬기] 채널의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해소해주는 파트였다.
마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 공연에서 가장 기대했던 부분은 "마술처럼 보일 수 있는 현상을 어떻게 김슬기의 캐릭터로 재해석할 것인가?" 였다. 예를 들어, 컵앤볼이라는 마술사들의 가장 전통적인 마술 장르가 있겠다. 보통 마술사들은 컵앤볼 마술을 "공이 사라지고 주머니 안으로 순간이동한다." 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사기도박사인 슬기님은 컵앤볼 마술을 "네가 모르는 사이에 공을 주머니 안으로 빼돌렸다." 라고 표현한다. 이렇게 슬기님은 스스로를 마술사라고 소개하지 않고도 마술사들이 할 법한 현상을 공연에서 성공적으로 다룰 수 있었다. 마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마술사들의 표현과 슬기님의 표현이 어떻게 다른지 관찰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공연을 관통하는 주제는 김슬기라는 사람과, 그의 스승인 다윈 오티즈에 대한 이야기이다. 슬기님은 오랜 시간 동안 다윈 오티즈의 마술을 공부했고, 그를 직접 만나기 위해 미국을 다녀오기까지 했다. 그런 스승이 2023년 10월에, 세상을 떠났다. [하얀 그림자] 공연은 김슬기와 다윈 오티즈가 어떻게 만났는지, 어떻게 이별하게 되었는지를 다루고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알고있는 '타짜' 김슬기는 옅어지고 '사람' 김슬기가 드러난다. 공연을 보고 나서 나는 그가 얼마나 자신의 장르를 사랑하고 있는지, 그의 스승을 얼마나 존경했는지, 그 깊은 감정의 일부를 느낄 수 있었다.
이 공연은 슬기님이 자신의 스승에게 바치는 헌사다. 역사상 다시 없을 위대한 마술사이자, 사기도박 전문가였던 다윈 오티즈. 그는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그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인 김슬기는 그의 삶을 이야기하고, 그의 작품을 이야기하기 위해 오랜 시간 끝에 다시 무대에 섰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그는 스승의 그늘을 벗어나 자기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