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공연리뷰
엄준혁 마술사의 공연, [살아나라]를 보고 왔다. 엄준혁 마술사는 지금까지 온라인 렉처와 오프라인 강의로 유명세를 알렸다. 그의 마술이 궁금하다면 다음 리뷰 영상을 참고해 보자.
마술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런 비유가 어울릴 것 같다. 다른 많은 장르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마술사 역시 크게 두 종류의 정체성을 띤다. 하나는 관객을 만족시키는 엔터테이너. 다른 하나는 스스로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예술가. 엄준혁 마술사는 그중에서도 예술가의 길을 걷는 마술사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렸다. 9월 15일 월요일 있었던, [살아나라] 공연이다. 이 공연은 전례 없는 속도로 매진되었으며, 그로 인해 추가회차를 오픈할 정도로 마술 매니아 사이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나 역시 참지 못하고 그의 공연 소식을 듣자마자 동료들과 함께 공연 티켓을 예매했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동료들과 긴 시간 공연에 대한 감상을 나누었다. 그러면서 내가 느낀, 그리고 다른 이들이 느낀 공연의 하이라이트 다섯 장면을 소개한다. 긴 말하지 않고 바로 시작해 보겠다.
이 뒤로는 공연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있다. 원치 않는 분들은 생략하길 바란다.
1. 렉처에 나온 바로 그 기술
공연의 가장 첫 번째 마술은 엄준혁 마술사가 10년 동안 놓지 않았다고 말하는 카드 마술이다. 아마도 마술인과 비마술인 모두가 기대할만한 요소를 한데 엮어서 루틴을 구성한 듯했다. 그는 사람들이 '카드 마술'이라고 하면 흔히 생각할만한 마술 현상에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심리 기술'을 섞었다. 많은 마술인들이 기법을 알면서도 감탄하면서 봤을 것이다.
2. 타로 카드
두 번째로 인상적인 장면은 바로 타로 카드로 진행하는 마술이었다. 점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타로 카드를 이용해 마술을 한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카드 마술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후 타로 카드를 이용해 점을 치듯이, 관객의 고민을 읽어내고 그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내놓는 모습은 마술사보다는 멘탈리스트의 모습에 가까웠다. 이 장면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의외로 엄준혁 마술사의 캐릭터와 어울리지 않는 정통 멘탈 마술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절친한 동료인 민스킴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3. 특별하지 않아서 더욱 특별하다.
엄준혁 마술사의 강점은 어디에 있는가? 그의 강점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상상하는 능력이다. 같은 마술 현상을 그는 다르게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단순히 '특정 카드를 생각하도록 만드는 현상'을 관객 한 명 한 명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만든다. 게다가 이런 마술의 기법은 그 특성상 관객의 생각이 마술사의 의도에서 벗어나는, 불확실한 위험요소가 생기기 마련이다. 엄준혁 마술사는 그 위험요소를 아주 깔끔하고 진솔한 방법으로 정면돌파한다.
마술사들은 종종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지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특정한 카드를 생각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은 사실 모든 마술사들이 가지고 있는 힘이다 그럼에도 그 힘을 잘 살려서 공연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엄준혁 마술사만의 분명한 장점이다.
4. 죽음에 관하여
단순한 현상을 크게 확대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현상이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그 일은 더욱 어려워진다. 관객의 생각을 읽는 클래식하고 현상을, 엄준혁 마술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주하는 궁금증과 한데 엮어서 풀어낸다. 엄준혁 마술사의 영화적인 연출이 말 그대로 빛나는 순간이었다.
5. 살아나라
[살아나라]의 후반부는 공연 중반부부터 조금씩 암시해온 파편적인 서사의 퍼즐 조각들이 하나의 점으로 모여 공연을 마무리한다. 흥미로운 점은 공연의 가장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이 부분에서 엄준혁 마술사는 마술 현상을 지극히 제한적으로 사용한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보여준 마술의 비밀을 대놓고 이야기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관객들은 마술이 아닌 마술사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 그 이야기의 끝에서 일어나는 아주 작은 마술 현상이 사람들 마음속에 얼마나 크게 닿았는지는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이미 엄준혁 마술사가 [New Door Seminar : Preaseason]에서 공개한 적이 있다. 나는 이걸 마술이라고 부르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이 이야기는 단 하나의 마술 현상도 포함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떤 마술만큼이나 강력한 몰입감을 자랑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다른 누구에게도 하고 싶지 않았을 이야기를 털어놓기 때문이다.
아래는 공연 엔딩의 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다.
드래그해서 복사하면 읽을 수 있지만 감상에 주의를 요한다.
엔딩에서 그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덤덤하게 풀어낸다. 나는 같은 이야기를 이미 [New Door Seminar : Preaseason]에서도 접했는데, 둘 다 감상한 사람으로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과거 그가 같은 이야기를 할 때는 분노를 억누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번 [살아나라]에서 그는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연민과 용서에 대한 느낌을 풍겼다. 고작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었을 뿐인 나로서는, 그의 감정까지는 감히 말할 수 없겠지만, 그의 목을 옥죄고 있던 사슬이 조금 느슨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분명하게 밝히겠다. [살아나라]가 완벽한 공연인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엔터테이너보다 예술가에 가깝다 보니, 대중적인 마술 공연과는 거리가 멀다고 느끼는 이들도 꽤 있었다. 또한 관객으로서 느끼는 부담감이 평범한 공연에 비해 굉장히 큰 공연이다. 당장 무대에 초대되어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워하는 관객들이라면 엄준혁 마술사의 [살아나라]는 무척 불쾌한 경험이 될지도 모른다.
또한 마술사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분명히 깊고 풍부했지만 그 의도와 목적이 관객에게 온전히 전달되었는지는 미지수다. 누군가는 장황하다고 느꼈을 것이고, 누군가는 불친절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 불편함 역시 공연을 만든 사람의 의도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어떤 식으로든 공연자는 필요 이상으로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현상을 표현하는 방식 역시 불분명한 부분이 있었다.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은 진짜입니다.'라고 주장하고자 한다면 다음 격언을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강력한 주장에는 강력한 증거가 필요하다.' 불가능한 현상을 보여주겠다고 선언한다면, 그 현상을 뒷받침할 수 있을만한 강력한 설득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연기력이 되었든, 논리적 정당성이 되었든, 관객의 기대감이 되었든, 강렬한 캐릭터성이 되었든)
하지만 오늘 [살아나라]에서 보여준 '검증 과정'은 주장에 비해 꽤나 부족해 보였다. 차라리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은 진짜입니다.'가 아닌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은 진짜가 아니지만 마치 진짜 같은 느낌을 줍니다.'라고 접근했으면 어땠을까? 오히려 해당 장면의 검증 과정을 생략했다면 훨씬 몰입력 있는 장면이 되었을 것이다. 리얼한 다큐멘터리보다 상상이 가미된 영화에 관객들이 더욱 이입하는 것처럼.
그럼에도 엄준혁 마술사의 [살아나라]는 반드시 필요한 공연이었다. 공연 후 이어진 인터뷰에서 그가 말했듯 지금까지 그의 행보는 마술사라기보다는 마술 크리에이터나 컨설턴트, 혹은 강사의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의 공연을 보면서 스스로 많은 반성을 하게 됐다. 마술사는 어찌 됐든 공연으로 말해야 한다. 훌륭한 공연이 있어야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기 마련이다
[살아나라]는 엄준혁 마술사의 색깔이 잔뜩 묻은 공연이다. 그 누구도 섣불리 따라할 수 없다. 만약 당신이 [살아나라]를 인상 깊게 보았다면, 당신은 당신의 삶이 엄준혁 마술사의 삶에 비해 너무나도 평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마치 대리석 속에 묻힌 다비드 조각상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이 발견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우리가 이야기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