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로마제야 레터
2026. 02. 22
만약 ( )했다면?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면 '운명'이라 부르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라서 기억은 명확하지 않지만, 저에게는 대학 입시가 그랬습니다. 수능 영어 과목에서 단 한 문제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대학교에 합격했으니까요. 게다가 그렇게 들어간 학교에는 마침 마술 동아리가 있었죠. 저는 그 마술 동아리에서 처음으로 마술을 배웠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그 동아리가 썩 활성화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저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동아리 회장을 맡게 되었죠. 얼마 없는 선배들은 취업을 준비하느라 바빠졌고, 저는 대부분의 마술을 제 스스로 '알아서' 공부해야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동아리 바깥의 마술인들과 교류하게 됐죠.
저는 그 모든 과정이 운명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 중 하나라도 어긋났다면 지금과는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르죠. 한 문제 차이로 마술 동아리가 없는 다른 대학교에 갔다면? 동아리가 너무 잘 굴러가고있어서 제가 굳이 회장을 할 필요가 없었다면? 어쩌면 저는 마술을 '대학 시절의 적당히 가볍고 독특한 취미생활' 정도로만 남겨뒀을지도 모릅니다.
세계적인 마술사, 조슈아 제이(Joshua Jay)의 공연, 'Six Impossible Things' 에서도 '운명'을 언급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는 한 쌍의 남녀가 어떻게 운명적으로 서로 만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죠. 택시 기사가 하필이면 너무 뜨거운 커피를 샀기 때문에. 신호등이 하필이면 그 순간 바뀌었기 때문에. 그날 하필이면 주차장에 사람이 가득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만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라도 달랐으면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겠죠.
별 위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그 위에는 무수히 많은 불빛들이 무작위로 흩뿌려져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빛나는 점들을 '별'이라고 부르고, 그들 사이에 지극히 인간적인 관계를 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선을 이용해 그들만의 그림을 그렸죠.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별자리'라고 부르며 각종 신화와 서사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하나의 별자리로 묶인 별들이 실제로는 서로 수십에서 수백 광년씩 떨어진, 서로 아무 상관이 없는 별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입니다. 우주 전체의 관점으로 봤을 때는 도저히 같이 묶을 수 없는 별들이지만 지구에 사는 사람들에게만큼은 마치 하나의 그림을 이루고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죠.
어쩌면 인간은 그 무엇보다도 무의미와 혼돈을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고통 그 자체보다도 고통에 목적이 없다는 사실을 훨씬 견디기 힘들어하죠. 그래서 어떻게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삶에서 조우한 모든 순간들에 의미를 부여하려 노력하는 건지도 모르죠. 그런 관점에서 운명이란 우주의 본질적인 혼돈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고자 고안해낸 일종의 안전장치인 셈이죠.
운명은 발자국에 붙이는 이름
다시 앞선 이야기로 돌아가보겠습니다. 과연 정말로 그 모든 것들이 운명의 일부였을까요? 답은 '알 수 없다.' 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겪어온 길이 유일한 길이었는지, 아니면 수많은 길 중 하나였는지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시간을 되돌려 다시 선택지를 번복할 수가 없기 때문이죠.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삶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예측은 할 수 있을지언정 절대로 알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그 모든 일들이 거대한 운명의 일부였는지 아니면 아무 의미도 없는 시간이었는지 결정하는 것은 지금 우리의 현재에 대한 자기 자신의 태도인지도 모릅니다. 현재의 모습에 감사하는 이들은 지나온 모든 길이 행운이었다고 받아들일 것이고, 반대로 불만을 가진 이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받아들이겠죠.
저는 운명이 정해져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마치 운명을 믿는 사람처럼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언젠가 제가 지나온 길을 되돌아봤을 때 이렇게 말할 수 있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결국 내가 했던 선택은 그 당시의 내가 할 수 있었던 가장 최선의 선택이구나.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만들어낼 수 있었던 가장 최선의 '나 자신'이구나."
우리 모두 우리만의 별자리를 그리며 살아갑니다.
특정 별자리를 그리기 위해 살아가기보다는
어쩌다가 그려진 별자리를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필로마제야, 박영균
보너스 : 필로마제야를 위한 마술 영상
앞서 말씀드린 조슈아 제이의 공연 'Six Impossible Things'의 '운명(Fate)' 파트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조슈아 제이는 이 파트를 '트로잔 덱(Trojan Deck)'이라는 이름의 제품으로 출시하기도 했는데요. 장담하건대, 카드 두 벌로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현상을 꼽으라면 반드시 후보에 들어갈 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Fate" from "Six Impossible Things" by Joshua J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