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니고데모의 밤

성경

by 뮤즈노트

어린 시절 동생이 성경 속 등장인물 중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누군지 묻는 질문지를 교회에서 받아온 적이 있다. 그래서 나도 누구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오늘은 그 사람 이야기가 문득 생각이 났다.


니고데모.


이 사람은 성경에 세 번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도 요한복음 한 곳에서만 나온다. 그런데 그 세 번의 등장이 모두 의미심장하다. 바리새인이자 유대 관원이었던 그는 홀로 예수님의 거처를 찾는다. 로마의 통치를 받던 시기의 강경한 분리주의자로 알려진 바리새인과 유대 관원 집단이 결국,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은 걸 생각해보면 상당히 이례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그는 현실감 역시 뛰어난 사람으로 그려진다. 밤 시간을 택해 몰래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의 첫 질문은 다른 바리새인처럼 예수님을 멸시하거나 공격하는 어조를 전혀 드러내지 않고, 정중하면서도 우회적이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는 랍비(스승)란 말로 당시 사회에서 통용되던 최고의 존칭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예수님이 이룬 표적을 거론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원리에 대해 예를 갖춰 우회적으로 묻는다. 예수님은 당연히 그의 의중을 파악하고 지체 없이 답을 한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으리란 것. 니고데모는 두 번째 질문에서 직설적인 화법을 택한다. 진실을 알고 싶은 강렬한 욕망의 표현이 말속에 드러난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본격적으로 성령의 원리에 대해 설명해준다. 또한 중간에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라고 따뜻한 어조로 말씀하신다. 뒤이어 바람에 대한 비유로 니고데모의 이해를 한층 깊게 해주는 배려를 보인다.


니고데모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다. 모르는 부분을 끝까지 되짚으며 그 원리를 캐묻는다. 진리에 대한 집요함과 예수님의 권위에 굴하지도 또 본인의 권위를 살피지도 않는 솔직함을 보인다.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님은 이번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며 살짝 꾸짖는다. 하지만 기존 바리새인들과 시민들의 고혈을 빨던 관원들을 향하던 분노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더욱 깊이 있는 말씀으로 그에게 원리를 전한다. 놀랍게도 요한복음 3장 16절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로 시작하는 아름다운 시편은 제자들과의 수훈이 아닌 예수님이 그토록 꾸짖었던 바리새인이자 유대 관원 출신, 니고데모와의 이야기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예수님이 니고데모만큼은 그의 됨됨이에 맞게 특별한 인격으로 대했음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이후 예수님을 따르고 믿는 자가 많아지자 기존의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은 위협을 느낀다. 그리고 수하의 사람들을 시켜 예수님을 잡아오라 명하지만 수하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위엄에 빈 손으로 돌아오고 만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바리새인들은 '너희도 미혹되었느냐'라고 물은 다음 내부인들을 향해서도 예수님을 믿는 자가 있는 자가 있냐고 엄포를 놓는다. 또한 율법을 알지 못해서 저주를 받은 것이라 원색적 비난을 쏟아놓는다.


이 살벌한 순간, 두 번째로 니고데모가 등장한다. 니고데모는 이런 상황에서도 논리적으로 대응하며 일갈한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율법을 알지 못해서 믿음을 갖는다는 말의 허점을 파고들며 다시 율법으로 대응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이에 대해 아주 유치하고 원초적인 욕설을 퍼붓는다. '너도 (예수님과 같은) 갈릴리에서 왔는지 생각해봐라'라고.


마지막 니고데모의 등장은 더욱 극적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후,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조차 모두 죽음이 두려워 자리를 피하게 된다. 그때 제자였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만이 간청하여 장사를 치르게 되는데 그 순간에 니고데모가 기록되어 있다.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사랑하는 제자들조차 모두 떠난 죽음의 시간이 찾아왔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는 막을 내렸다. 모두가 한바탕 소란 속에 구세주라고 믿었던 자의 죽음을 직접 목도했다. 더 이상 예수님을 믿을 수도, 또 믿어야 될 이유도 없었다. 십자가에 매달린 시신을 등지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때 니고데모는 장례용품을 손수 챙겨 예수님의 시신을 장례법에 따라 정성스럽게 모셨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진실로 믿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전승에 따르면 그리스도교를 믿게 되어 순교했다고도 나오는데 현재의 성경에 그러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보인 태도와 인격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마음에 울림을 준다. 그는 진리를 향한 열망을 갖고 있었음에도 남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밤을 택하는 연약하고 이중적인 인간성의 표상이다. 하지만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 이후, 폭압적 분위기와 욕설이 난무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예수를 옹호하는 의견을 피력한다. 또한 모든 인간적 기대가 사라져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이제 앞날을 생각하며 다시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마땅히 해야 할 예를 다한다.


나는 니고데모가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 중 최고의 인격체가 아닐까 생각한다. 구약과 신약의 선지자나 제자들조차 인간적 회의와 의심, 배신과 자기 합리화로 점철되어 있지만 니고데모는 깊이 있고 입체적인 인간다움으로 그려진다. 인간적이되 이해가 되며, 인간적이되 우아하다. 성경에 유약한 인간다움을 이토록 아름답게 그려놓은 인물은 니고데모가 유일하다. 예수님이 그에게 성경의 긴 페이지를 할애하며 바람의 비유로, 또 아름다운 시편을 들려준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또 한편 온통 제자와 군중에 둘러싸인 사람들 속에서 늘 고독했던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진짜 친구로 여겼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나님 아들의 시신 수습이 의미 없는 누군가에게 맡겨지지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나는 성경에 있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교회에서 장사치들을 쫓아내며 인간적 분노를 쏟아내는 장면도 좋아하고, 겟세마네에서 올린 마지막 기도에서 드러나는 운명과 인간적 갈등의 표현도 좋아한다. 예수님이 당시로서는 (혹은 요즘도) 이루기 힘든, 종교와 관계없이 사마리아 이방인을 포함한 약자의 편에 늘 서고자 했던 모습도 좋아한다. 하지만 니고데모처럼 늘 추악하지만은 않은, 가끔은 인간의 아름다움을 언뜻언뜻 드러내는 성경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예수님이 그런 인간을 좋아했단 사실도 좋아한다.


예수님이 세상에 내려와 있던 시대와 지금의 시대는 별 차이 없구나... 란 생각이 드는 밤, 묵묵히 그 자리에 있던 인간 니고데모를 떠올려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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