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니샤드>를 읽는 밤
가끔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뭐 저런 사람이 있지? 싶은 경우가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우겨대거나 제 분을 삭이지 못해 엉뚱한 행동을 일삼죠. 그럴 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질리다 못해 순수한 호기심까지 갖게 됩니다.
"저 사람은 자기가 이상하다는 걸 알까? 정말 모르고 저러는 것일까?"
그런데 가만히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때면 마찬가지의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 나는 내성적인 사람인데...라고 생각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넌 외향적이잖아.. 라거나, 사람 사귀는 걸 어려워한다고 느끼는데 넌 사람을 잘 사귀잖아... 연애를 못한다고 느꼈는데, 넌 인기 남이잖아라든가... 실제로 마지막 경우는 별로 없던가요? ㅎㅎ
제법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의도치 않게 관찰하게 되면서, 또 나 자신에 대해 성찰하게 되면서 어쩌면 사람은 자신에게 맡겨진 연극 속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이야기 속 캐릭터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즉, 나는 실제론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는데 모종의 우주적 원리에 의해 이러저러한 말을 하고, 행동을 하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
가끔 대학 시절 쓴 일기를 읽다 보면 그런 의심은 타당하단 생각도 듭니다. 그 시절 일기는 적당한 방황과 좌절로 채색되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대학 시절을 관통하는 주된 관심사는 더 좋은 인격을 갖는 것이었죠. 여러 좋은 만남과 배움의 기회 속에서 어떻게든 나아지고 싶어 발버둥 쳐대고 허우적거렸습니다. 찌질한 자신의 인격에 좌절하는 모습은 무척 안쓰럽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난 입장에서 돌이켜보면 과연 그 시절의 내게 가능한 능력이었을까? 바꾸어 말하면 그 시절의 내게 허용된 인격적 자질이었을까? 란 생각이 듭니다. 마치 사랑을 지키려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은 헤어져버리고 마는 20대의 연애처럼...
정신분석학자 칼 융은 사람이 갖고 있는 본질적 자아를 원형으로 설명합니다. 고대의 신화와 역사로부터 형성되어온 캐릭터의 원형이란 것이 집단 무의식의 형태로 우리안에 존재한다는 거죠. 나는 개성적이고 유일무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집단 무의식적 원형에 지배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시나리오 작가 크리스토퍼 보글러는 이를 가리켜 우리의 인격이 이러한 캐릭터로 다분화되어 우리 삶의 드라마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우리가 아주 오래전 세팅된 몇 가지 캐릭터가 조합되어 드러나는 것이란 발상은 개성 있고 유일무이한, "진짜 나"는 있는 것인가? 란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2,800여 년 된 인도 경전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기타>는 "진짜 나"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까요? 한번 옛 스승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죠.
모든 행위는 타고난 본성적인 기운(구나)의 흐름에 의해 저절로 나타난다. 그러나 에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자기를 행위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본성적인 기운과 그 기운의 흐름에 따라 행위가 일어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세 가지 서로 다른 기운의 상호작용에 의해 행위가 저절로 일어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를 행위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가바드 기타> 3장 27-28절.
삶을 살아가는 "진짜 나"는 사실은 육체적으로, 물리적으로는 진짜일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실체로서의 "나"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칼 융의 원형 개념처럼 서로 다른 원형이나 에너지의 상호작용 속에서 맞부딪히며 고정된 몇 가지 패턴으로 정리된 캐릭터일 뿐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브라만이 펼쳐놓은 환영의 그물에 걸려 수없는 생을 거치면서 자신의 행위로 맺은 과실을 먹으며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슬퍼하는 삶을 반복한다. 이것은 생명의 주(主)가 가지고 있는 세 가지 기운(구나)이 각자 자기의 길을 가면서 벌이는 일이다.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 5장 7절.
인간은 자신이 절대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어떤 존재로 생각하며 세상을 삽니다. 하지만 고대 인도 경전이 주는 교훈은 세상은 환영에 불과하며, 당신 역시 결코 "진짜 나"를 모르며 속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세 가지 힘의 상호작용 속에서 발현되는 캐릭터입니다. 그 힘은 사트바 구나(원형적 에너지), 타마스 구나(원형적 힘을 방해하고 저항하는 에너지), 라자스 구나(원형의 본질을 형상화하는 창조적 에너지)로 이뤄진다고 합니다.
애초에 우리 인격에 주어진 원형은 사트바 구나처럼 평온하고 온화하며 밝습니다. 하지만 타마스 구나같은 어둡고 우울한 에너지가 덮치기도 하며, 때로는 원형의 본질을 형상화하는 창조적 에너지가 넘친 나머지 분노와 격정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이는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에고(자아)가 슈퍼에고와 이드의 충돌 속에 인격이 형성되는 모습을 떠오르게도 하고,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기쁨이, 슬픔이, 버럭이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파니샤드>에서는 고전답게, 인간 캐릭터의 형성 원리뿐 아니라 "진짜 나"의 존재에 대해 밝히고 있습니다. 쉬운 우화를 통해서 말이죠.
늘 함께 다니는 정다운 새 두 마리가 같은 나뭇가지에 앉아 있다... 열매를 탐닉하고 있는 새는 에고이고, 그것을 초연하게 바라보고 있는 새는 참 자아(진짜 나)이다. 그 둘이 함께 앉아 있는 나무는 육체이고 열매를 탐닉하는 새가 따먹고 있는 열매는 행위이다... 에고를 자기라고 생각하는 동안엔 열매를 탐닉하고 있는 새처럼 집착과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문다카 우파니샤드> 3장 1절-3절.
행동을 하고, 그것을 성찰하는 자아가 있다는 발상은 인도철학만의 생각은 아닙니다. 이러한 의식의 이원론적 속성은 현대 철학과 정신분석학, 혹은 심리학 영역의 자연스러운 문제 설정입니다.
쉬운 예로 '이 세상'이란 게임에 참여한 게임 플레이어로 우리를 가정해 보죠. 이 게임은 위대한 프로그래머(브라만)에 의해 만들어져서 나름의 세계관과 작동 원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게임을 플레이하려면 특정 인격과 특성을 조합하여 게임 속 캐릭터를 만들어내야 하겠죠? 그 캐릭터는 세상을 여행하면 살아가지만 여러분이 알다시피 그것이 "진짜 나"(아트만)는 아니란 것이며, 세계도 캐릭터도 환영이란 것입니다.
그가 어떤 특정한 존재로 태어나기 위해 육체를 택하면, 그는 그 육체의 결함과 제한 속에 스스로 갇힙니다. 그러나 육체를 떠나는 순간 참 자아는 다시 순수하고 제한 없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 3장 8절.
게임에 몰입한 나머지 내가 게임 속 영웅과 동일시하거나, 게임에서 패배했다고 스스로를 쓸모없는 자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게임을 하고 있지만, 게임이 환영이며 그 세계의 나라는 캐릭터가 "진짜 나"는 아님을 깨닫고 있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는 굳이 종교적 믿음을 전제하지 않아도, 사고 실험만으로도 충분한 위안을 전해줍니다. 사회에서 마주치는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경우, 즉 이상하고 싫고 안 맞는 캐릭터를 볼 때 이런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요.
아 저 아트만(진짜 나 = 플레이어)은 왜 저런 캐릭터를 생성해서 저러고 있을까?
아! 저 사람은 하필 저런 캐릭터를 골랐으니 저런 행동을 반복하는 게 당연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평온해질 수 있습니다. 직접 가서 그 사람에게 캐물어 봤자 대개는 게임에 몰입해서 자신과 가상 캐릭터를 혼동하고 있으니 제대로 대답할 수 없겠거니 싶으면 다시 마음이 평온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중요한 것은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해 그것이 "나"라고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두고 성찰해 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대학 시절의 나는 "진짜 나"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선배와, 후배의 모습을 보았고 그것이 좋아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남의 시선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고, 또 정도에 지나치게 좌절하지도 않았죠.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괴롭히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그들을 닮고 싶어 내가 한 일은 마치 게임을 하듯 조이스틱과 키보드를 두들겨 그 캐릭터를 흉내 내고 연기하는 것이었던 듯합니다. 누군가의 캐릭터를 연기하고 질투하고 갈망하는 것으로는 유치함과 찌질함의 구름을 걷히게 할 수 없음은 당연합니다. 본질을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캐릭터는 바뀌지 않았지만 적당히 낯이 두꺼워진 나이가 된 지금, 내 캐릭터가 이상하진 않은지 한 발짝 떨어져 담백하게 살펴볼 수 있는 거리감에 대해 생각해 보는 요즘입니다.
옴. 샨티 샨티. (평화와 평온이 마음에 찾아오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