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없을 때 생기는 깨달음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by 뮤즈노트

28살에 교수가 된 사람은 요즘도 더러 있겠지만, 철학과 교수가 된 사람은 결코 많지 않을 것이다. 독일에서도 19세기 쉘링 이후 처음이라니 '철학 천재'가 쓴 이 책,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를 읽어볼 이유는 충분하다.


우리는 철학이란 말을 쉽게 사용하면서도 철학이 뭔지 잘 모른다. 철학을 공부하고 싶어도 어디부터 공부해야 할지 모르겠고 사용하는 용어도 괴상하거니와 철학자가 쓴 문장은 눈으론 읽어도 머리론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대충 번역이 잘못되었거니 하다가, 나중엔 현실적 쓸모가 없는 개똥 같은 소리...로 치부하며 삶에서 멀리 치워놓기 일쑤다. 그런데 철학이 정말로 그런 것이라면, 개인적 믿음이나 어떤 사이비 약초학 따위 정도로 위축되었을 것이다.


사실 철학이 품고 있는 문제란 예상외로 아주 심플하다.


"내가 사는 세계는 어디고, 나(존재)는 무엇이며, 무엇을 해야 하나?"


모든 철학은 이 답을 얻기 위한 과정으로 존재한다. 이쯤에서 누군가는 소리를 지를지 모르겠다.


"아니, 과학적으로 다 밝혀졌잖아. 수십억 년 전에 빅뱅이 일어났고 그래서 지구가 만들어졌고 아미노산이 합성되어 단세포 생물이 출현해서..."


미안하지만 이런 답은 엄밀한 논리를 중시하는 철학자들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다. 영화 <매트릭스>를 생각해보면 그 이유가 와 닿는다. 우리가 직관적으로 '있다'라고 생각하는 이 세계, 사랑하는 그녀의 향기, 주말 저녁의 빗소리, 스테이크의 맛은 모두 '현실적이지만'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이다. 그런데 많은 과학적 연구에서 밝혀졌듯 이러한 감각은 아주 쉽게 속일 수 있다. 게다가 우리가 갖고 있는 감각기관으로 보고 듣고 맛보고 느낀 것들로 유추해 어떤 존재를 상정하는 것도 그것이 과연 그 물건의 본질인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예를 들어, 우리 눈에는 아름다운 흰 꽃이, 벌의 눈에는 수술과 암술로 이어지는 기다란 검은 줄로 유도된 얼룩 꽃일 수 있다. 벌의 입장에선 또 꽃을 아름답다고 느끼기보단 고된 직장의 출입문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과학적으로 다가가 봐도 역시 마찬가지다. 실체란 것이 무엇인지를 파 들어가다 보면 결국 마주하게 되는 것은 다시 인간 입장에서 규정지어진 어떤 개념들이다. 빨간 사과 한 알이 있다. 빨갛다는 것은 빛이 반사되어 나오는 파장의 길이에 대한 인간 시각의 감도를 의미할 뿐이고, 사과의 실체를 분석해 가다 보면 결국 초끈이론처럼 작게 진동하는 에너지의 파동이란 결과에 이를지도 모른다. 만약 인간처럼 부정확한 감각 체계가 아닌 우주적 '신의 눈'을 가진 절대적 존재에게 사과란 그저 진동하는 에너지 파동의 덩어리로 묘사될 수 있다. 그런 것을 어떻게 '있다'라거나 '존재'한다라고 하는 실체로 규정할 수 있을까?


최근에는 양자역학과 이론 물리학의 발달로 이 세계가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 있겠다...라는 가정이 흔하게 들려온다. 물리학의 정보이론은 정보가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음을 이미 밝혀냈고, 여러 수학적 체계를 통해 다중 우주론, 홀로그램 우주론까지 등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놀랍게도 우리가 확실한 존재 근거로 삼은 과학이 이 세계를 의심하기 시작하기 훨씬 전에 철학자들은 이미 그러한 정황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대해 '철학적'으로 사고하고 있었다. 적어도 세계가 뭔지 논리적으로 다가가려면, 현실에 속지 않을 이 정도 수준의 지적 능력과 엄밀함이 요구된다 할 만하다.


"그런데 세계가 환상이든 아니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어?"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이런 캐릭터가 등장한다. 세계가 뭐든, 내가 실체든 아니든 관심 없고 내 눈에 현실로 보이는 것만 중요한 사람이 분명 있다. 실존주의자들은 세상을 사는 우리들에 대해, 세상에 던져졌다(피투)고 표현한다. 던져진 채로 살다가는 건 맘대로고 스스로 책임지면 그만인 건 맞다. 하지만 양식장에 갇혀 길러진 물고기처럼 바다를 꿈꾸지 못하고 사료를 먹으면 만족하다 횟집으로 실려가 죽음을 맞이하는 일생의 처연함은 또 정당한가란 생각을 해본다면, 철학자와 과학자들의 처절한 몸부림이 이해가 안 될 것도 없다.


그런데 굳이 대의적이고 심오한 차원이 아니라 현실적 측면에서 이 책은 제법 유익한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바로 우리가 세계를 규정짓는 방식 때문이다.


기존의 철학적 전통은 세계를 두 가지 갈래로 보는 관점이 있다. 하나는 세계란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통 철학의 강력한 사고체계인 형이상학이다. 형이상학에선 플라톤의 동굴 비유처럼, 이데아라고 하는 어떤 절대 진리 혹은 절대적 실체를 가정한다. 의자를 만들면 의자는 다리가 세 개인 것도, 네 개인 것도 있고, 높이도 색깔도, 재질도 제각각이지만 의자라고 부를 수 있는 건 그것이 의자라는 이데아를 본떠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상한 이야기 같지만 사실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의자를 명확히 규정할 수 없다는 데 놀라고, 또 한편으론 우리가 당연한 듯 형이상학적 체계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음에 놀란다. 똑똑한 아인슈타인조차도 양자역학의 아버지 닐스 보어와 논쟁에서 "우리가 달을 보지 않는다 해서 달이 존재하지 않는가?"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중 슬릿 실험, 관찰자 효과에 의해 밝혀진 양자역학적 해석을 아인슈타인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다. 확실한 실재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관점은 앞서 언급한 감각 및 주체와 관련된 구성주의다. 모두 저마다의 감각으로 받아들여진 현실을 살아간다는 입장이다. 외부에 나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는 없다. 다만 내가 감각기관으로 받아들인 '실체'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인생은 나만의 무대에서 내가 해석한 대로 살아가는 연극이고 환상이다.


'철학 천재'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이 두 가지 관점에 대한 통합이자 새로운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이 '천재 철학자'의 논리에 따르면,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세계에 대한 규정은 최대의 자연수 찾기와 같다. 최대의 자연수를 슈퍼 자연수라고 부르자. 하지만 슈퍼 자연수는 아마 특정할 수 없을 것이다. 슈퍼 자연수에 1만 더해도 자연수는 계속 커지기 때문이다. 다양한 의미체계(맛, 두근거림, 짜증, 국가 등)와 물질 전체(사과, 해왕성, 책상, 자동차 등)를 포괄하는 세계를 생각해보는 것도 이와 같다. 왜냐하면 세계란 의미를 가진 일종의 장(field)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계의 경계를 확인하려 할 때마다 새로운 의미가 출현함으로 세계는 특정되지 못한다. 간단히 말하면 이게 세계가 없는 이유이다.


철학자들은 진리든 아주 작은 사과든, 의자든 무언가를 규정하기 위해선 흔들림 없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것이 이른바 세계다. 그런데 세계란 것은 물질적인 어떤 것으로만 규정되지 않는다. 철학이 말하는 모든 것들을 담아낸 총체로서의 '세계'엔 인간의 감정도 출현하고, 전에 없던 새로운 시스템에 대한 명명(자본주의, 공산당, 국가)도 계속 출현한다. 그러다 보니 범주론으로 부르는 카테고리 만들기가 계속된다. 과학이라는 것이 학문의 카테고리(科)를 나누는 것이란 의미도, 형이상학(메타 피직)의 어원이 자연학 다음이란 의미로 분류되어 생긴 것도 그 때문이다.


'철학 천재'의 작업은 형이상학과 구성주의의, 실체가 있다와 실체는 없고 구성된 인식만 있다는... 서로 다른 관점에 대해, 총체로서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음을 논리적 추론으로 밝히는 한편, 다만 의미장이라는 데에 출현하는 실재는 존재함을 논증한다. 형이상학의 타파 작업은 우리가 탄탄히 발을 딛고 설 수 있는 절대적 진리를 가정하지 않아도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플라톤 이후 근대, 아니 현대까지의 폭력적 역사는 대개 바로 이 절대 진리의 탈을 쓰고 나타났다. 구성주의 역시 단점을 갖는다. 주관적 관점주의는 우리 일반 인간이 갖는 진리를 알아보는 판단력과 능력을 과소평가하여 패배주의와 허무로 이끌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절대 진리나 상대 진리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실체적 인간이든 시뮬레이션 캐릭터든 어쨌든 의미장이란 개별적 의미 공간에서만큼은 의미를 갖는 실재임을 인정한다. 총체로서 모든 것을 담는 세계란 논리적으로 있을 수도 없고 그 존재를 알 수도 없다. 오로지 나타나는 의미 있는 것은 의미장에서 일 뿐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전체라는 세계가 없기에 다양한 의미들이 폭발한다. 이때,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내 앞에 놓인 의미들 뿐이다.


철학자들은 기존 언어의 속박과 강제된 프레임에서 벗어나고자 새로운 언어와 형식으로 사고를 기술해왔다면, 이 책은 젊은 철학자가 대중을 위해 쓴 글답게 논리가 명료하고 경쾌하다. 철학자가 어떤 식으로 사고하는지, 그 체계를 선명하게 따라갈 수 있는 점 역시 장점이다.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형이상학과 현대철학과 포스트모던 사조에서 빛을 발한 구성주의에 대한 논쟁의 맥락 역시 잘 정리되어 있다.


'새로운 리얼리즘'이라 이름 붙인 저자의 철학은 언뜻 불교의 세계관과 잇닿은 느낌도 들고, 후반부엔 다소 맥 빠진 휴머니즘으로 귀결되는 측면도 있지만, 적어도 의미장에 출현하는 것만이 실재다...라는 말은 울림이 있다. 돈키호테에게 이웃집 농부의 딸, 알론사 로렌소는 둘시네아 공주로 의미장에 출현한다. 모두가 돈키호테를 미쳤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의미장에서만큼은 그는 공주를 구하는 용맹한 기사다.


모두가 절대적이고 당연한 사회적 역할과 이상적 형상이 존재한다고 믿지만 그런 믿음이 우리를 지치게 만든다. 좋은 아빠, 아내, 훌륭한 기업가, 회사원, 성공한 40대, 덕망 있는 교수, 학자, 아름다운 배우자 등등... 그런 세계는 없다. 또 그런 인간도 없다. 의미장에 출현하는 모습만이 현실이고 실재다.





물론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은 적어도 이 구절을 쓰는 이 순간에서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진리다. 그리고 세상에는 수많은 악과 불가사의함과 불필요한 고통이 있으며, 이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동시에 우리는 모든 게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과는 다를 수도 있음을 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한하게 많은 의미장에서 동시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받아들이는 그런 모습으로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모든 것은 무한히 다를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생각만으로도 위로를 준다.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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