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을 읽는 밤
뒤꼍에 나가 보면
배나무가 세 그루
삼나무가 세 그루
모두 모두 여섯 그루
밑에서는 까마귀가 집을 짓는다
위에서는 참새가 집을 짓는다
숲 속의 귀뚜라미
무어라고 지저귀나
오스기 친구 무덤
성묘들 가세
한 번 한 번
또 한 번
雪國 중, 요오코의 노래
내게는 아주 낡은 책이 있다. 대학시절부터 늘 갖고 다녔다. 쫓기듯 다닌 급한 몇 번의 이사에도 여전히 서가에 꽂혀있다. 소중히 생각한 책이다. 또 한편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번잡한 마음이 들어도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하얀 눈이 내리고 완벽하게 현실로부터 고립된다. 어처구니없고 쓸데없이 피로한 일로 가득한 해외출장, 일정을 마치고 호텔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놓고 책장을 펼친다.
뜨거운 물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은 코마코가 겨울의 한기에 코끝이 빨개진 채 창가에서 부르는 입김이 된다. 요오코가 역장님에게 동생의 안부를 묻는 높고 고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느새 압도적으로 쌓인 눈은 거대한 설벽이 되어있다. 그 순간, 나는 현실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소설 속 거주민들은 서글픈 인생들이다. 영민하기에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는 방법을 찾아낸 코마코는 자신의 순수함을 모르기에 아름답다. 내적으로 고립된 요오코는 한없이 외롭기에 아름답다. 두 사람은 눈이 쌓인 설국에서 서로를 미워하고 걱정하며 사랑한다. 그 둘 사이에 이물감 없이 자리한 시마무라는 '아무것도 해줄 게 없다.'라는 말을 되뇐다. 그는 이 세계에서 화자이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우리 모두는 이 세계에서 눈과 같은 존재다. 나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기억하고 때론 기록한다. 하지만 그들에겐 대개의 경우 아무것도 해줄 수 없기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게 어느 순간에 사라지고 나면 완벽한 허무가,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한 공간만이, 푸름을 앞세운 계절만이, 아무렇지 않게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코마코처럼 아름다운 순수도, 요오코처럼 외롭고 서글픈 아름다움도 눈 녹듯 사라지며 배웅하겠지.
가끔 느끼게 되는 외로움과 존재론적 고독의 아름다움을 실감한다. 어쩔 수 없는 인생이 모여 만들어내는 허무함과 그 허무가 켜켜이 쌓여 만든 압도적인 눈의 경계선이 존재를 침범해 올 때 느끼게 되는 미학의 정체를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다.
발에다 힘을 주어 버티고 서서 눈을 쳐든 순간, 쏴아 하고 소리를 내면서 은하수가 시마무라의 몸속으로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雪國, 마지막 구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