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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노트 May 06. 2021

쓸쓸함과 지루한 여름의 끝

feat. Cinema Paradiso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시네마 천국>을 영화관에서 마지막으로 본 것은 1993년 아마도 초여름이었을 것이다. 같은 영화를 한참 지난 후 재상영하는 일이 흔치 않았던 시절이었다. 어떤 연유인지 엉뚱하게도 내가 살던 대전에, 무려 감독판으로 재상영이 결정되었다. 지금처럼 프랜차이즈 멀티플렉스가 아니라 극장주가 따로 있던 때였으니 대전극장 사장이 꽤나 그 영화를 좋아했던 게 아닐까?



어쨌거나 당시 나는 고3이었고, 3당 4락(3시간 자면 붙고, 4시간 자면 대학에 떨어진다)같은 무식한 말이 유행할 때였다. 아침 7시에 일어나 학교를 가고 밤 12시까지 야자(야간자습)를 하고 집에 오는 단순한 고난의 행군이 이어졌다. 토요일에도 일요일에도 저녁 6시까지 학교에 붙어있어야 했다. 만약 주말이라고 학교를 빼먹는다면 1년 정도 흉터가 남을 정도로 거센 몽둥이질을 감수해야 했다. 당시 그 학교의 교사들은 교육엔 뒷전이고 오로지 매질이 교사의 본분이라 믿었던게 분명했다.  


초여름의 어느 토요일, 학교를 향해 터덜터덜 걷다가 <시네마천국> 재개봉 포스터를 봤다. 번-아웃이 극한에 달해 이미 하얀 재처럼 변한 몰골의 고등학생은 갑자기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출석체크를 할테고 내 이름에 엑스표가 쳐 질테고 다음날 가차없이 매질을 당할 것이다. '그런데 뭐 아무려면 어떠랴' 싶었다. 그길로 영화관으로 달려가 조조상영 표를 샀다. 자리에 앉고 보니 관객은 두 명 정도. 그렇게 어두운 영화관에 앉아 한없이 따뜻한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과 이뤄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 지겨운 여름이 언제 끝나지?"


영화 속 주인공은 영사기를 돌리는 일로 젊음의 시간 낭비하며 읊조린다.


마음에 와 닿았다. 뜨거운 매질과 수면부족, 숨 못쉬게 몰아치는 시험과 문제집에 파묻혀 노동으로치면 18시간 가까운 강행군을 해야했던 그 여름의 끝이 늘 궁금했다. 정말 끝나기는 하는걸까?


그리고 텅 빈 영화관에서 조조상영을 보는 고등학생만큼이나, 서로 멀찍이 떨어져 앉은 두 어명 관객의 인생이 또 몹시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상영이 끝나고 영화관을 나왔다. 정오의 태양이 빛났다. 놀랍게도 재로 변한 가슴한켠에서 무언가 푸른 떡잎이 싹트는 느낌이 전해졌다. 분명 조금전 깊은 쓸쓸함을 느꼈는데 뇌의 구석구석은 차가운 수돗물로 씻어낸듯 상쾌해지고 가슴엔 두근대는 활력이 돌았다.


쓸쓸함도 감정이었다. 나는 그 감정을 느낌으로써 살아있단 자각을 했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그 다짐과 별개로 지루한 여름은 전혀 극적인 반전도 없이 지리멸렬한 모습으로 끝났다. 그리고 졸업후에도, 대학에가서도, 회사를 다니면서도 그 여름은 반복해서 자꾸만 돌아온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면 기차를 타고, 운전을 하고 산이든 어디든 혼자서 다니는 여행을 즐기게됐다.


쓸쓸함도 감정이다. 내가 여전히 여름의 지루함을 '느끼는' 살아있는 존재임을 쓸쓸한 감정은 증명해준다.


그리고 그토록 바라던 지루한 여름의 끝은 어쩌면 

쓸쓸한 달콤함에 대한 감상이 사라진 날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언젠가부터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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