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뮤즈노트 Aug 20. 2022

헤어질 결심, 그리고 선택의 결심

안개 도시의 기이한 사랑 이야기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내 취향과는 별개로 올드보이를 보며 감탄한 기억이 있다.


"천재적이다."


개인적인 감상에 훌륭한 감독들은 대개 몇 가지로 나뉜다. 리들리 스콧이나 드뇌 빌뇌브처럼 꾸준히 좋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 아주 좋은 마스터피스를 내놓고는 점점 갈피를 못 잡거나 동어반복에 치중하는 감독. 이준익이나 봉준호 감독처럼 시간이 흐르며 더욱 원숙해지는 감독.


박 감독에 대한 느낌은 두 번째에 가까웠으나 헤어질 결심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의 기량은 한결같을 뿐, 그저 힘을 주느냐 빼느냐의 문제일 뿐이로구나 싶었다. 헤어질 결심은 일필휘지로 그려낸, 붓을 대면 문장이 완성되는 하필성장의 경지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장르의 성격상 로맨스 스릴러는 진지하게 흘러간다. 팽팽한 긴장에 몰입하느라 감독도 관객도 주변을 돌아볼 틈이 없다. 하지만 헤어질 결심에는 유머가 넘쳐흐른다. 허벅지를 걷어올린 탕웨이의 다리 사진을 찍다가 여자 형사가 들어오자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라든가, 잠복근무를 하는 박해일을 탕웨이가 깨우는 장면, 미결 사건 사진에 담긴 탕웨이의 모습을 간직하려 애원하는 모습 등이 곳곳 배치되었다. 이들은 장르에 최적화된 완급조절의 경지를 보여준다.



이런 류의 로맨스물은 여성 캐릭터 구축이 성패를 좌우한다. 그리고 핵심은 비밀스러움에 있다. 관객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 여성이 어떤 류의 인물인지, 또 그녀가 진짜 자신을 취조한 형사를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위기 모면을 위한 행위인지 알 수 없다. 이야기의 종반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녀의 정체를 깨닫고 알게 된다.


이런 캐릭터 구축과 이야기 기법은 카사블랑카의 '일사'란 캐릭터가 대표 격이다. 사랑을 시작할 때, 서로의 마음을 명확히 알기 어려워하며 괴로워하고 동시에 설레듯 관객은 극 중의 박해일에 동화되며 호기심을 품게 되며 이야기를 홀린 듯 따라가게 된다.


그럼에도 이 영화 최고의 미덕은 주제에 있다. 이뤄질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랑이라던가, 신분에 따른 이별 등을 벗어날 순 없지만, 좋은 영화는 한 줄로 표현되는 은유적인 문장을 갖는다.


'좋은 남자는 나 같은 여자랑 결혼해주지 않는다. 당신 같은 사람과 만나려면 살인사건 정도는 일어나야 한다.'  


인간은 모두 알게 모르게 시대적 한계 상황, 시대정신에 젖어 산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언제 어디서든 자유롭게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 역시 일종의 환각이요 착각이다. 물과 기름처럼 서로 다른 층위에서 비슷한 이들끼리 섞여 든다.


그런데 만약 운명적 상대가 기름의 층위에서 허우적대고 있다면?


그 또는 그녀를 우리는 알아볼 수 있을까?


그리고 영화에서 말하는, 진정한 비극은 어느 우연한 기회에 그것을 알아본 순간에 있다고 말한다.


'해준 씨 같은 좋은 남자'를 여자는 알아봤고, 남자도 '마침내' 그녀를 알아봤지만 그와 서로 다른 층위에 있기에 남자는 떠난다. 그리고 그들이 재회한 곳은 소설 무진기행의 무진시처럼 늘 안개로 자욱한 항구도시다. 안개는 물과 기름의 경계를 희석시킨다. 그 둘은 경계가 모호한 지역에 있었기에 다시 재회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안개처럼 사랑은 사라져 간다.


남은 것은 신기루 같은 사랑의 흔적과 자욱한 안개뿐.



우리는 기묘한 사랑 이야기를 통해 헤어질 결심이야 말로 사랑을 알아본 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시나브로 인정하게 될밖에.




매거진의 이전글 지옥 같은 인생을 살아내는 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