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을수록 친구가 적었었는데 많아진다

by 뮤즈노트

얼마 전, 대학에서 일하는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요청한 특강이 끝나자 선배는 나를 그냥 배웅하지 않고 학교 교정에서 바람이나 쐬자고 했다. 연구소에서 발행하는 학술지 마감날짜가 닥쳐서 어제 새벽 5시에 잠깐 자고 나왔다고 한다. 많이 지쳐 보였다. 특강 이후라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또 학교 안에 있는 고옥, 오랜 툇마루에 앉아 하늘을 보니 정신이 맑아졌다.



"지칠 땐 가끔 여기 나와서 앉아 있다가 들어가곤 해."


"좋네요. 서울 한복판에 이렇게 조용한 곳이 있다니..."


"형은 요즘 어때요?"


"마냥 행복하진 않은 것 같아."


그는 나보다 서너 살이 많다. 조용하고 모범생 스타일에 인품까지 넉넉한 사람이다. 인연이란 이상해서 대학 동기들보다 우연히 알게 된 선배들과 얽혀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낸다.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은 대학 교수로 지내고 있다. 아주 가끔 만나지만 편안하다.


"너는 회사보단 학교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닐까?"


"왜요?"


"아까 강의하는 걸 보니 그냥 그렇게 느껴져."


우리는 툇마루에 앉아 이런저런 세상사를 나누다 헤어졌다.


언제부턴가 사람을 우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행성 중력에 얽매인 사람들이 있는 반면 누군가는 다양한 우주에 관여하며 산다. 자신의 모습을 다양하게 비춰주는 편안한 사람은 늘 다양한 우주에 속한 사람들이다. 중력이 다양한 차원으로 조금씩 빠져나가듯 그들은 세상이 주는 압력을 좁은 세계 안에 투사하는 대신 조금씩 흘린다. 다른 세계와 우주로 발산한다. 그래서 지쳐 보이지만 여유가 있다. 그런 사람이 좋다.



얼마 전엔가는 초등학교 친구가 사진을 보내왔다. 산 정상 표지석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조금 걷다 쉬다 이제야 올라왔네."


"연락하지 그랬어. 나도 요즘 운동 겸 산에 갈까 했는데 말이야."


"머리가 복잡해서 버리러 왔다. 오전 근무 끝내고 바로 올라왔어. 막상 올라오니까 내려가기 싫네."


벌써 삼십 년 넘게 형제처럼 지낸 친구였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좋다며 묵묵히 대학병원 한 곳에 오래 근무했다. 그런데 최근에 불합리한 헌신을 요구할 것 같아 고민인 듯했다. 병원이자 대학이자 직장이란, 수직적인 구조의 총합이라 할만한 곳이니, 순한 심성으로 버틴 게 늘 용하게 여겨졌던 터다.


"다음엔 같이 가자. 도시락은 내가 준비할게. 뜨거운 물 보온병에 넣어서 산 위에서 라면 먹자고."


"좋지."


그날 저녁, 톡 대신 전화를 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또 그러면 그만둘까 봐.'라길래,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이 어린 시절 유복했는데 그 뒤에 집안이 어려워진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알 법하다고 했다. 아마도 그들의 부모도 중년에 새로운 시도를 했으리라. 성공한 사람은 말이 없는 법이니, 가끔 들리는 어려워진 가계 사정도 그들 부모의 어떤 도전의 결과였으리라 유추가 된다고.


"그랬을지도 모르겠네. 그때는 IMF였으니 더했겠지."


"나도 요즘 비슷해."


친구가 웃는다.



어제는 대기업에 다니는 대학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업무관계에 있는 사람들과 회식이 막 끝날 듯하니 만나자고 한다. 여의도에서 소주를 마셨다.


"나를 경쟁자로 여기는 이상한 윗사람이 별 희한한 험담을 하는 바람에 한직으로 쫓겼지."


"그래서 행복해?"


"새 부서의 상사는 회사 일은 쉬엄쉬엄하면서, 이번 기회에 인생에 즐겁고 좋은 것들 좀 찾으라 하더라."


"좋은 분이네."


"만족스러워. 눈치 볼 것 없이 시간 땡치면 퇴근하고."


친구에게 말해줬다. 대학시절 특이한 너를 보면서 밥벌이나 제대로 하겠나 했는데, 대기업 20년 다녔으면 충분히 프라이드를 느낄만하다고. 고생했다고.


헤어지는 길에 아빠 빨리 오라고 전화로 보채는 친구 아들딸이 생각나 장난감 선물을 사주고, 술 취한 김에 제수씨와도 '이 친구 데리고 사시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어쩌고 하면서 통화도 했다. 문득, 이거 어린 시절 어른들이 자주 하던 행동들인데 싶어 웃음이 나왔다.


'술 드시고 친구가 사줬다며 과자를 잔뜩 들고 오시던 아버지도 그런 마음이었구나.'



젊은 시절엔 친구가 적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적었다. 인간관계에 예민한 탓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이를 먹다 보니 남들과 비슷한 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내쪽이 변한 게 아니고 남들이 적어졌다. 약한 가지의 낙엽이 먼저 떨어지고, 몇 개의 굳은 가지만이 남는 것이다.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란 애초에 많을 수 없기 때문이니까 말이다.


한편으론 좋은 사람은 적다고들 하지만, 애초에 사람이 인연을 유지할 관계란 많아야 손에 꼽을 정도이지 않을까? 그런 면에선 또 좋은 사람이란 내가 다 만나지 못할 정도로 많은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해야 할 일을 떠올려 본다.


평소처럼 친구의 우주는 괜찮은지를 가끔 들여다보는 것. 젊은 시절과 조금 달라지는 게 있다면, 너의 우주는 여전히 괜찮다고, 이 정도면 훌륭하다고, 너는 좋은 사람이라고 다독여주는 것. 서로 등을 쓸어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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