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만의 작품을 갖자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고통과 무료함의 두 가지 축을 오간다고 말합니다. 가난할 때는 결핍 속에 고통받습니다. 반면 먹고살만해지면 우울증과 싸우게 됩니다. 이렇게 양쪽을 오가니 행복할리가 없습니다. 실제로 문명의 가장 낮은 단계에서 등장한 고단한 유목생활이 관광이란 형태로 다시 나타난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여행이 고통스럽다고 여기는 당신은 이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무료함을 잊기 위해 다시 고통스러운 유목생활을 재현해 낸 게 관광이기 때문입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상황은 최악에 가깝습니다. 광고나 신문에서 떠들어대는 남들과의 비교로, 결핍에 시달리지만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기 때문에 불쑥 찾아오는 공허감에도 휩싸여 있습니다. 쇼펜하우어가 언급한 삶보다 더 혹독하게, 양쪽에서 고통받는 것이죠. 그래서 누군가는 관광을 떠나고, 어떤 이는 떠들썩한 클럽에 가서 춤을 추거나, 속내를 털어놓을 리 없는 친구들과 저녁 약속을 잡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오는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읊조립니다.
'지겹다. 사는 거.'
쇼펜하우어는 무게중심이 외부에 있는 행복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멋진 집과 자동차, 빠른 승진이나 명성, 인간관계 같은 것들은 인생에서 쉽게 잃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에 의미를 두는 것은 냉정하게 계산기를 두드려봐도 아둔한 행동입니다. 갑자기 닥쳐온 우연한 상실은 행복감에 영구적 치명타를 가하게 될 테니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행복을 온전히, 또 오래 지속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스토아학파의 유명한 철학자였던 세네카의 말을 들어봅시다.
정신적인 일에 종사하지 않는 여가는 죽음이며 생매장당한 신세다.
고통과 우울함을 벗어나는 방법은 앞에서 말했듯 부나 명예 같은 '나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기본적 욕구와 건강이 해소된 상태라면 결국 행복감이란 인지작용의 일종이기에 내적인 정신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약간의 오해가 발생합니다. 행복감이 정신적 인지에 달린 것이라면, 쾌락을 좇으면 되는 것일까요? 자기 전 누워서 유튜브를 보거나, 중독성 게임을 습관적으로 하고, 술에 취하는 건 확실히 행복감을 주니까 말입니다.
과거 로마시대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주의자로서 행복으로서의 쾌락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했습니다. 그들은 중독이나 방탕한 생활에서 오는 쾌락은 일시적이라고 판단합니다. 쾌락이 지나간 자리엔 더 큰 공허감과 고통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정신적 흔들림으로부터 초연한 자유를 추구합니다. 그 결과, 정반대일 것 같은 금욕주의 스토아학파와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쾌락추구의 핵심은 지적탐구다.
정신적인 것을 강조한다고 순간의 쾌락을 좇으란 게 아닙니다. 또 단순히 정신 차려라! 라거나 모든 건 정신에 달려있으니 마음을 비우고 버텨내라는 것도 아닙니다. 총탄이 날아다니는 전장에서 정신을 맑게 하고 마음을 다스린다 한들 행복감이 찾아올리는 만무하니까요.
그래서 세네카나 에피쿠로스 학파 모두 행복에 대해, 선언이 아니라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일, 지적 탐구를 하라!
지적인 활동은 지극히 내면지향적인 작업입니다. 따라서 외부에 바람이 불고 태풍이 닥쳐도 단단히 만들어진 내력으로 사람이 버텨낼 수 있도록 합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억울하게 수감된 앤디 듀프레인(팀 로빈스)이 등장합니다. 그는 동료 수감자들을 위해 모차르트의 아리아 LP를 방송실에서 틀어버립니다. 당연히 간수의 노여움을 사게 되고 그 벌로 독방에 갇힙니다.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암흑의 공간에 갇히면 시간은 물론 모든 감각을 상실한다고 합니다. 수감자들 모두가 끔찍이도 무서워하는 벌입니다. 얼마 후 독방에서 풀려난 앤디의 상태를 걱정하며 동료 죄수들이 힘들었냐고 묻습니다. 앤디는 오히려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답합니다.
"순식간이었어요. 모차르트와 함께 있었거든요."
의아한 죄수들은 간수들이 '축음기'를 넣어줬냐고 묻습니다. 그때 앤디가 자신의 머리와 가슴을 가리키며 '이 안에 있었어요.'라고 답하며 말을 잇습니다.
"그게 음악의 아름다움이죠. 이걸 뺐어갈 순 없어요. 음악에 대해 그렇게 느껴본 적 있으신가요?"
앤디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정신적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감옥에 오기 전 지적탐구, 혹은 정신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는 음악을 감상하며 인지감수성을 발달시켰습니다. 그렇게 내면에 구축된 그의 정신은 칠흑 같은 독방이란 외부의 불행에 맞서는 내력을 발휘합니다. 그에게서 신체의 자유를 뺏어갈 순 있어도 정신적 활동으로 다져진 지적 감수성만큼은 앗아갈 수 없었던 것이죠.
따라서 로마시대의 작가 루키아노스는 '참된 부는 영혼의 내부에 있는 부일뿐이다.'라고 단언합니다. 무료함을 탐구한 일본의 철학자 고쿠분 고이치로는 결론에 이르러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빵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빵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빵만이 아니라 장미도 바라자. 삶은 장미로 꾸미지 않으면 안 된다.'
정신적인 일을 해내는 방법론은 의외로 쉽습니다.
잠들기 전 펼친 소설책 <설국>에서 눈 덮인 설원에서 애타게 유키코를 부르는 코마코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듣는 것.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다림이 무서운 이야기에 '무서워요.'라며 슬며시 정원의 팔짱을 낄 때 멈칫 설레는 표정을 읽는 일,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3악장에서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달리듯 끝없이 치솟는 피치에 벅차오르는 심장박동을 느끼는 일이 그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책, 영화, 미술, 음악작품 하나를 갖는 것입니다. 언제든 기억에서 꺼내볼 수 있을만큼 깊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여기, 머리와 가슴에 있다고 가리킬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눈 앞에 있는 돌을 돌멩이로 받아들이는 자동화된 반응 대신 새로운 눈으로 존재를 받아들이는 데 예술의 사명이라고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굳게 믿은 것처럼 하나의 작품에 대해 정통하게 되면 곧 다른 문학으로 다른 예술로 감상의 지평을 넓힐 수 있습니다. 깊이감도 생깁니다. 전에는 몰랐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아름다움을 수용하는 감수성 체계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섬세하게 개발되고 다듬어졌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나를 사랑할 수 있도록 나를 설득해가는 과정입니다.
지금 그대로도의 당신도 좋지만 예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당신은 조금 더 괜찮은 사람으로 느껴질겁니다. 그런 나를 조금은 더 사랑할 수 있게 될겁니다. 조금은 더 행복해 질겁니다.
[오늘 해야 할 일] 내가 평생 즐길 수 있는 단 하나의 작품을 찾고 마음에 간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