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회사는 의외로 친구를 사귀기 좋은 곳이란 말을 한 적이 있다. 까탈스러운 남녀가 사내 연애로 결혼까지도 하는 곳이니 회사는 만남의 장소로 손색이 없다. 게다가mbti와 관계없이 업무상 많은 사람들과 마주치게 되니 인간관계를 도모하고 싶다면 회사가 최고
...랄 순 없는 게... 회사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밸런스 게임도 그래서, '좋은 사람인데 일 못하는 사람 vs. 나쁜 사람인데 일 잘하는 사람'의 구도다. 그런데 이건 밸붕(밸런스 붕괴)이 아닐까? 무조건 착하고 좋은 사람이랑 일하는 게 맞으니까.
개중에는 '회사란 일을 하는 곳인데 착하기만 하고 일을 못하면 내게 피해가 가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펴는 이도 있다. 그럴 땐 '그건 네가 악인에 가까워서 그래. 편드는 거지.'라고 무심한 대꾸를 해서 상대 화를 돋우려는 마음이 일곤 한다. 실제로 해본 적은 없지만.
어쨌거나 이 논쟁을 시작하려면 악인에 대한 정의가 필요한데, 다년간 경험을 통해 그 감별지를 찾아냈다.
A와 B, 두 사람 앞에 3개의 빵이 있다. 한 개씩 빵을 나눠갖는다. 그런데 B가 남은 빵 한 개를 갖고 싶어 한다. 여기까진 악인은 아니다. 자연스러운 욕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B가 남은 빵 한 개를 차지한 뒤, A가 갖고 있는 빵 마저 가져가려 한다면? 이때 B는 진정한 악인이 된다.
회사에는 남의 빵 빼앗아 먹는 사람이 실제로 있다니까요 (이하 copilot 제작 그림)
뭔가 허술한 정의 같지만, 회사 생활을 하며 이보다 나은 정의를 찾지 못했다. 명확히 어떤 지점이냐 물으신다면 답하긴 어렵지만, 질문자도 교통사고처럼 악인을 만난 순간 '아'하고 주마등처럼 이 정의를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일 잘하는 악인은 단기적으론 회사에 이익을 주는 듯 하지만, 조직문화를 망가뜨리고 유능함을갖춘 양심적인 직원들을 떠나게 만든다. 넘쳐나는 퇴사 이야기에서 선하지만 일을 못하는 사람 때문에 떠난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은 일 잘한다고 조직 내에서 떠 받들 여진 악인들에 의해서다.
무엇보다 무도한 산적이 모인 곳이 산적 소굴이듯, 다른 이의 손에 쥔 한 조각의 빵까지 빼앗아 가려는 악인들이 일정 비율 이상으로 우글거리는 집단은 악한 회사와 조직이 되고 만다.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렇다면 좋은 사람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박남수 시인의 '새'에 보면 탐나는 '새'를 잡고 싶은 포수 이야기가 등장한다. 포수는 뚜렷한 목적과 의도를 갖고 새를 겨냥하지만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만 잡을 뿐이다. 잇속을 따지는 계산으로는 순수한 관계가 이뤄질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대신 시에 나온 것처럼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 하지 않는' 한 마리 새가 되려는 마음가짐으로 살다 보면, 우연히 아름다운 새가 곁으로 날아온다.
그림 속의 새는 물총새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보이곤 해요
회사 안팎으로 힘든 시기를 보낸 적이 있었다. 중요한 프로젝트가 끝나고, 미뤄뒀던 4시간짜리 전신마취 수술을 받았다. 서울에 혼자 올라와 외롭게 산지 10여 년째, 어린 동생 대신 친구가 보호자를 자처했고 수술이 잘 끝난 걸 확인하고 친구와 동생은 잠시 병실을 떠났다. 마취가 덜 깨 정신이 없는 와중에 회사 선배가 면회를 왔다.
"괜찮냐? 아팠겠다."
짧은 인사와 몇 마디 말을 나눴는 데 마취가 풀리며 찾아온 고통과 피로감 때문에 잠에 빠져들었다. 중간에 통증으로 깨기를 몇 번. 하지만 그때마다 선배는 집에 가지 않고 가만히 곁에 있었다. 침대 옆 의자에서 책을 읽다가, '괜찮냐? 물 줄까? 뭐 필요한 건 없고?' 묻곤 했다. 회사에서 만난 후배일 뿐인데 불편한 병실에서 온전한 한 나절을 함께 했다. 타지에서 혼자 아프면 외로움을 덜 타는 사람도 서럽다. 선배 덕분에 위로를 한다는 건 어떤 것인지 배울 수 있었다.
잘 생겨도 혼자 아프면 서럽다...고 합니다
이후 선배가 어려운 일 있으면 먼저 살피려 노력했고, 선배도 나도 체면 따위 내려놓고 세상을 산다는 두려움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는 사이가 됐다. 슬픈 일이 있을 땐 '괜찮다고 수고했다고.' 서로의 멍에 자국을 살피며 두드려줬다. 비슷한 인연으로 마음을 열고 다가와준 회사 친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회사든 어디든 악인은 일정 비율로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비율로 훌륭한 인격을 갖춘 이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을 쉽게 잊는다. 그리고 순수한 새 같은 관계가 찾아올 때, 우리는 편한 사이라는 생각에 무심코 함부로 대하다가 새를 쫓아 버린다.
잘해주는 사람에게 더 잘하려 노력하고, 나쁘게 대하는 사람에겐 일말의 신경도 쓰지 말 것.
회사에서 알게 된 인간관계의 교훈이다. 그럼에도 대개는 자신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나쁜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하며 관계를 낭비한다. 납덩이로 새를 잡으려는 포수처럼 욕심을 부린다. 좋은 사람은 떠나고, 나쁜 사람만 주위에 바글대는 관계의 실패는 이렇게 찾아온다.
지난주엔 회사를 떠나 일하는 선배도 볼 겸 강원도를 찾았다. 함께 회사를 둘러보고 중국집에서 식사를 하고, 유명한 만두집에서 만두를 산 뒤 함께 내 차를 타고 서울집으로 향했다.
은마차 짜장면 맛있게 먹었습니다
중년의 남성 둘이 차 안에서 조잘조잘 잘도 떠들었다. '하늘에 깔아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는 느낌과는 사뭇 달랐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