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사회나 경제 시간에 늘 읽던 문장인데, 그때는 '아! 우리나라는 자원이 별로 없나 보다. 그래서 우리 집이 가난한가?'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사회에 나와 철이 들고, 세계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되니 새삼 우리나라가 대단하구나 감탄하게 된다.
AI가 그린 우리나라의 모습인데 중국과 일본풍 기와와 101타워에 둘러싸인... (이하 copilot 그림)
삼면이 바다인 반도국가라고 배웠지만 북한으로 인해 육로가 막혀있어 사실상의 섬나라로 70년 가까이 살아가고 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주위에는 우리나라에 큰 아픔을 안긴 세계적 열강인 중국, 러시아, 일본이 있다. 그나마 있는 천연자원의 대부분은 북쪽에 있고, 그 존재로 인해 세계 9위 규모의 국방비를 소모하고, 징병제로 20대 젊은이들의 생산성이 타격을 받는다.
이 악조건 속에서도 우리는 고도로 발달시킨 '눈치'로 세계의 트렌드를 읽어내 경제 및 문화산업을 선도했으며, '빨리빨리'로 경쟁국보다 앞선 효율적 시스템을 이룩해 냈다.
그 성과의 이유로 근면하고 스마트한 민족성을 꼽으며 자랑스러워한다. 그럴만하다.그런데 이처럼 우수한 민족성은 달리 표현될 수도 있다.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는 인간을 자원화했다.
인간을 자원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고, 고효율의 퍼포먼스를 내기 위한 정제시스템으로서의 경쟁 필터가 필수적이다.
중고등학교의 입시 전쟁이 끝나면 좋은 대기업을 가기 위한 경쟁이 기다리고 있고, 운 좋게 대기업에 입사하면 대외적으론 라이벌 기업을 이기기 위해 악전고투 해야 한다. 그리고 회사 내에선 더 높은 자리로 승진하기 위한 레이스를 벌여야 한다.
경쟁에는 승리와 패배, 딱 두가지만 존재한다. 그래서 보통의 우리는 때론 이기고 질 때도 있다.
그러나 회사엔 늘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이 있는데 평균보다 높은 확률로 이기기 위해선 당연하게도 남과 다른 행동 법칙을 따라야한다.
법률을 무시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하고, 사람을 속이거나 해를 끼치는 일에 냉혹하며, 자기 합리화에 능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말 것 등이 그 법칙이다.
놀랍게도 이 행동 법칙은 반사회적 인격장애(ASPD)의 하나로 일컫는 소시오패스의 가장 큰 특징들과 겹친다.
미국 연구에 의하면 인구의 4-5%가 소시오패스 성향이 있는 것으로 본다. 의외로 높은 수치다. 그런데 고위 경영진으로 올라가면 그 비율이 12%까지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회사 보직자 중 소시오패스가 많은 이유를 곱씹어 보면 다음과 같다.
회사는 영리를 목적으로 한다. 이익을 내기 위해선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그 목적을 앞세우다 보면 비윤리적인 악당을 자꾸만 위로 올리게 된다. 목적을 위해 인간을 수단화하고 공감능력이 없는 사람이일터에선 도리어 냉철한 경영인으로 추앙받을 수 있단 이야기다.회사의 악당이 성공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우리는 회사에서 마주치는 악당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해야 할까?
제러미 리프킨은 <공감의 시대>란 책에서 타인의 입장과 아픔을 공감하는 능력을 고도화한 것이 인간다움의 특징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공감 능력이라 부르는 대신 '공감 지능'이라는 말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해 만약 소시오패스가 자신의 사회적 성공을 자랑한다면 그건 지능이 떨어짐을 자랑한단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더 나아가 성공을 위해 가면을 쓰고 양심에 저촉되는 일을 흉내 내는 사람이 있다면 공감 지능이 떨어짐을 흉내 내는 꼴이 된다.
굳이악당을 닮으려 그렇게까지 애쓸 필요는 없다.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경쟁사회에서 소시오패스가 필연적으로 나타난, 진화적 성향인지에 대한 학문적 논쟁은 있으나 첫째, 이런 우려는 칸트의 논리로 쉽게 반박될 수 있다. 즉 모두가 거짓말을 하는 사회나 집단은 지속될 수 없기에 특정 비율 이상으로 소시오패스가 많아질 수 없다.
주위를 둘러봐도 나쁜 상사 숫자 이상의 좋은 상사가 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만약 비율이 깨질 만큼악당이 넘쳐나는 곳이라면 그 회사는 곧 망할 테니 탈출을 고려해야 한다.
둘째, 사회적 성공을 이룬 소시오패스는 반성적 성찰이란 기능이 없기에 깊은 인간관계와 인격적 완성에 다가갈 수 없다.
회사에서 마주친 소시오패스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껍데기뿐인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진정한 친구가 없었으며 자녀나 배우자와의 애정 어린 관계도 원만치 않았다. 그들은 경쟁이 덕목인 구조에서 벗어나 가면을 벗으면 스스로 빈 껍데기가 돼 버리고 만다. 그러니 벗어나지 않으려 애쓸 뿐이다.
마지막으로 칸트가 <도덕형이상학의 정초>란 책에서 말했듯, 우리는 모두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란 점에서 그들을 따라갈 필요가 없다.
우리는 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스스로 자원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하지만 동시에 정이 넘치며, 낙오자라 억울하게 낙인찍힌 다른 이의 어려움을 돌보며 일으켜 세우는 존재다. 반성을 통해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성찰을 통해 깨달으며 온전히 나를 완성시켜 가는 목적을 부여받은 사람으로서 하루를 살아낸다.
자연계의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모든 자원은 고갈된다. 인적 자원은 그러지 않으리라 믿었지만 천만에. 인적자원도 고갈될 수 있음을 우리나라가 보여주고 있다.
장래의 우리 아이들이 자원으로만 취급받을까, 악당이 들끓는경쟁사회에서 상처받을까 걱정돼 저출산 국가가 돼 버린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쩌면 예견된 종국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천연자원과 달리 인적자원은 부활이 가능하다.
씩씩하게 자라는 지금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완벽한 자원이 돼버린 악당 대신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서 서로의 등을 두드리고 끌어주며 함께 살아가다보면 다시 살만한 세상은 도래할 수 있다.
일터에서 매일의 인간관계를 돌이키며 괴로워한다면 당신은 그런 능력을 갖춘 좋은 사람이다.
무엇보다정의로우며 인격의 완성을 꿈 꾸는 우리는, 놀랍게도 언제나 다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힘을 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