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일을 하기에 늘 크고 작은 갈등이 일어난다. 특히나 막무가내식으로 밀어붙여지는 업무의 경우엔 부당한 일을 강요받는 경우가 많다. 이때는 회사의 뜻을 대리하는 상사를 통해 유압프레스처럼 시스템적인 압력이 가해지는 셈이니 힘이 세다. NO라고 저항이라도 하게 되면 번거로운 상황이 펼쳐진다.
설령 내 판단이 옳고 윤리적이라고 하더라도 나보다 사내 네트워크가 많고, 그 자리에 올라가기까지 윗사람들과의 친분을 다져놓은 상사와의 갈등은 사내 평판 문제로 이어지곤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사는 인사권이란 공인된 권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대개는 '다 그런 거지 뭐.'라고 넘어가거나 향후 문제가 있을 경우 빠져나갈 증빙을 마련해 놓는 수준에 그친다. 회사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 넘쳐나게 된다.
이하 모든 그림 by 코파일럿
그런데 과연 그래도 되는 것일까?
2차 대전 당시 민간인 수백만 명을 효율적으로 가스실로 수송한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자신은 군인으로서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변호했다. 그에겐 수백만 명을 죽인 양심의 가책 따윈 없어 보였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를 '악의 평범성'이라고 이름 붙였다.
악은 영화처럼 세상을 구하느냐 마느냐 거창한 클라이맥스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대개는 자기 자리에서 시키는 대로 명령에 따르는 평범한 사람들의 업무에서 악마는 숨긴 이빨을 드러낸다. 이 일을 계속하다 보면 결국 어떤 파국이 닥칠지에 대한 상상력 없이 일한다는 건, 이미 악마에게 영혼을 맡긴 것이나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예컨대 가습기 살균제가 제대로 된 검증 없이 팔리고 수많은 피해자가 생긴 과정에서도 바로 잡을 기회는, 실험-개발-인증-생산-판매-마케팅-AS 전 과정에 걸쳐 있었을 것이다. 누구 하나 NO를 외치며 저항하지 않았기에,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업무 속에서 악은 꽃을 활짝 피워 무고한 사람들을 삼켜버린 결과로 이어졌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무심코 평범한 악의 편에 서는 걸까?
칸트는 윤리적인 삶은 행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강조했다. 도리어 윤리란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사람은 고통을 피하고 행복해지는 게 삶의 목표다. 윤리가 행복과 상관없다면 회사의 부당하고 비윤리적인 명령에도 가만히 있는 쪽이 이득처럼 보인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번거롭고 고통스러운 저항 대신 가만히 시키는 대로 일하고 눈을 감아 버린다.
그런데 칸트는 이어서 도덕적 상상력에 대해 말한다. 모두가 그렇게 행동하면 어떻게 될지를 '상상'해보라는 것이다. 위험한 제품을 기업이 만들고, 부패한 윗사람 지시로 인증을 해주고, 법적인 문제가 생기면 돈으로 덮어버리고 책임자는 빠져나간다.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사회에선 누구도 서로를 믿지 못할 것이고 사기꾼과 불량제품이 넘쳐날 것이며 언젠가 피해자는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자기 자신이 될 것이 분명해진다. 윤리적 상상력은 결국 우리 모두가 안전히 살아가며 행복을 찾아가는 데 필수적인 요소란 이야기다.
하지만 내가 저항할 수 있을까? 어느 지점까지 NO라고 말할 수 있을까?
경기도에 있는 한 대학교에서 영상물 기획과 관련한 특강을 진행할 때였다. 올바른 기획방향이 있는데 무리한 여러 종류의 압박과 힘에 굴복해 버린 기획자의 에피소드를 보여줬다. 그냥 위에서 시키는 대로 YES를 거듭하다 보니 최종 결과물은 뭐가 뭔지 알 수도 없는 쓰레기가 되었고 사람들에게 버려졌단 웃픈 이야기였다.
"영상 기획자이자 책임자라면 양심상 저항할 부분에선 저항하고, 싸워야 할 때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감동적인 멘트로 끝을 내려고 했는데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선생님. 그런데 어느 선에서 타협하고 언제까지 싸워야 할지... 그걸 알 수 있습니까?"
방법론에 있어 가장 핵심적이고 치명적인 질문이었다. 질문을 한 남학생은 눈빛이 형형한, 똘똘해 보이는 친구였다. 내심 기쁜 마음이 들었다.
"학생들 수준이 정말 높군요. 좋습니다.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스토리를 인생에 비유하며, 모든 인생은 문제와 해결로 이뤄진다고 말했다. 문제 해결의 방법으로 내세운 윤리적 태도는 다름 아닌 '중용'이었다.
중용은 찬반의 중간을 가라는 뜻이 아니다. 중용은 극단에 치우치지 않은 최선의 해법이란 뜻이다. 그런데 최선의 해법은 누구에게나 일관된 정답처럼 '덜컥'하고 튀어나오는 게 아니다.
우연히 사자를 만나는 경우를 보자. 아킬레우스라면 창을 하나 들고나가 맞서 싸워 제압하는 게 중용에 가까운 최선의 해법일 것이다. 숙련된 조련사라고 한다면 사자가 배가 고픈 상태인지 새끼 사자를 보호하려는 것인지 상황을 확인하고 대응하는 게 중용의 덕을 발휘하는 게 될 것이다. 일반인이라면 뒤돌아 도망가려는 두려움을 떨치고 용기를 쥐어짜 내 사자와 눈을 마주친 채 천천히 뒷걸음으로 물러나는 것이 중용이다.
중용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사람마다 그릇이 모두 다름을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에겐 별 것 아닌 NO가 어떤 이에겐 정말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일 수 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사이클을 숙고와 실천 사이에 위치시킨다. 윤리적 상상력을 통해 이 싸움이 필요함을 자신에게 확신시킨다. 그리고 중용의 해법을 찾는다. 실천함으로써 저항한다. 무엇보다 이 과정은 습관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용기를 내서 압박에 저항하고 싸우는 과정은 일회성이 아니라 사이클이란 것이다.
중용은 내 그릇을 넓혀가는 순환적 과정이다.
숙고 - 중용 - 실천 - 습관 -> 더 깊은 숙고 - 더 나은 중용 - 더 나은 실천
처음엔 NO라고 알 수 없을 정도의 미미한 싸움이라도 좋다. 또는 세상을 뒤엎을만한 NO라는 외침이어도 좋다. 어쨌든 당신이 저항하려 시도했다는 것 자체는 용기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 과정에서 나의 그릇 크기를 알게 된다. 이 정도 평판의 하락이나 압박 정도는 내가 견딜 수 있었다면 다음엔 더 큰 용기를 낼 수 있다. 반대로 내가 견딜 수 없는 정도였다면 그릇에 맞는 저항의 방법을 찾아 좀 더 부드러운 방법을 택해도 된다. 유격을 조정하며 나를 만들어 가면 그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회사는 내가 두려움속에서도 용기를 내고 내 그릇을 확인하고 조금이라도 더 큰 그릇이 되는데 쓰였다. 그리고 함께 NO라고 외친 사람들을 통해 스스로 자신을 빚어내려 애쓰는 사람이 결코 혼자가 아님을 알게 해줬다.
개인으로서 우리는 질그릇을 만드는 점토처럼 무르다. 회사라 불리는 사회의 압력은 자기 필요에 따라 성형하려 물레를 돌린다. 작은 간장 종지로 만들다가 필요 없어지면 한쪽 구석에 던져버린다. 우리가 필요에 의해 성형된 그릇이라면 버려질 수 있다.
하지만 중용의 사이클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그릇 사이즈를 안다. 자신의 손으로 그릇의 크기를 넓혀가며 아름답게 빚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