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를 둘러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데 내 경우엔 출장이 무척 바쁘고 힘들었던 기억이 대부분이다. 출장을 힘들게 만드는 요소는 많지만 경험상최악의 공식은 다음과 같다.
(필수 미션 X 험난한 출장지 X 빡빡한 일정) + 의전을 바라는 상사 = 최악의 출장
첫술에 배불러야 할 미션이 있는데 출장지는 말과 문화적 소통도 어려운곳이고 출장비를 아끼기 위해 일정은 빠듯하다. 그런데 '에헴'하며 의전을 바라는 상사까지 있으면 비로소 최악의 출장이 완성된다. 내 경우엔 인도 출장이 그랬다.
어느 날 저녁, 퇴근하려는데 부장이 불러 세웠다. '중동에 콘텐츠를 넣어야 하는데 말이야... 문화도 다르고 한국 콘텐츠가 들어간 적도 없고... 전략 좀 짜봐.' 옆 부서에서 진행하는 업무였는데 왜 일을 끌어왔을까 싶었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우리 부서 이름에 기획이 들어가기도 하고, 선임 부서이기도 하니 못할 것도 없다... 란 생각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침착한 목소리로 기한을 물었다.
'응. 내일 오전 본부장 회의 때 보고해 줘.'
퇴근해야 하는데... 이하 그림은 designed by copilot
가방을 내려놓고 밤 12시까지 사무실에 혼자 남아 인도를 경유한 중동 진출 기획 보고서를 작성했다. 다음날 오전 회의에 들어가 보니 보고서는 회람이 끝난 상태였다. 본부장이 해외팀과 함께 가라며 인도 출장 지시를 했다.
다소간의 항의 섞인 반항을 해보았지만, '보고서 보니 인도 전문가던데, 가서 도와줘.'란 말로 컷!
제가 인도 전문가로군요. 하하하.
인도 전통 카레도 한번 못 먹어 사람이 전문가가 되어 출장에 동행하게 되었다. 게다가 미션도 인도 방송사에 콘텐츠를 방영하는 계약을 마치고, 방송 가능한 시스템을 현지에 구축하는 것으로 명확했고, 델리일정에 덧붙여 뭄바이로 이동하여 콘텐츠 마켓까지 소화하는 빼곡한 일정으로 짜여 있었다.
그림과는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타지마할은 차로 스쳐지났습니다.
인도에 도착 후, 시장 상황 파악을 위해 먼저 진출해 있던 다른 나라 주재원들을 만났다. 회의에서 만난 그들은 낭패란 표정이 역력했다. '언젠간 시장이 열릴 거라고 예측하고 왔는데 아무 변화 없이 이십 년이 지났어요. TV 없는 가정이 대부분인데 의미가 있나요?'란 말로 헛심 빼지 말라는 절망적 조언을 던져주었다.
이후 만난 인도 방송사 대표는 거의 의자에 드러누운 채 손가락으로 까딱거리며 '다음, 다음' PT를 넘기도록 지시하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불쌍한 해외팀 선배들과아침 8시부터 회의를 시작, 밤 11시 반 숙소로 귀가, 새벽 1시까지 다음날 회의 전략을 세우고 다시 6시 기상하는 일정이 반복되었다. 델리의 여름 날씨는 덥고 습했고 거리엔 빼빼 마른 소와 떠돌이 개들로 가득했다. 사람도 견디기 힘든 날씨였기에 동물조차 헥헥거리며 움직이지 않으려 했다.
회의를 가기 위해 호텔 컨시어지에 부탁해서 부른 중형 택시는 잠시 달리다가 갑자기 멈춰 서서 미니카 같은 차에 우리를 짐짝처럼 토스했다. 항의해봤지만 결국 작은 택시에 구겨진채 실려서는, '아... 삶은 고통이로구나.'읊조렸다. 역시 깨달음의 나라답게 깊이가 남달랐달까.
싯다르타여. 돈오의 깨달음, 사실이였군요!
다행스럽게도 미션은 그럭저럭 완료되었다. 이후 출장의 결과물로 방송된 콘텐츠가 대히트를 치는 바람에 그 성과를 등에 업고 중동에 한류가 뿌리내리게 되었다... 라면 완벽한 해피엔딩이었겠지만, 신문에선 '우연히도 인도에 먼저 콘텐츠를 유통하는 바람에 중동에 한류 콘텐츠가 들어갈 수 있었다.'라고 기사가 실려 있었다. 따지고 보면 '우연이라면 우연이긴 하지... 댓츠 라이프'하며 수긍했다.
이후 해외 각지로 다양한 출장을 다녔지만, 현지에서 업무 이외의 것을 반추할 수 있던 마음의 여유가 있던 출장은 극히 드물었다. 좋은 풍경을 만나거나 의전상 고급 식당에 가도 전혀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업무와 얽힌 순간, 세계 지도에 회색 붓을 들고 나라와 도시를 하나씩 지워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 인도 역시 인도 잘못은 아니고 출장으로 간 탓임이 분명하다. 앞으로 가고 싶은 나라는 절대 출장으로 가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이렇게 말하다 보니 출장은 악인가 묻는다면 글쎄 잘 모르겠다. 미혼시절 혼자 가는 출장은 개망초 핀 초원처럼 색다른 정서로 기억되곤 하기 때문이다. 붕하고 달뜬 공항의 분위기, 업무에 대한 부담감과 적절한 외로움이 뒤섞여 생각의 공간을 열어 주곤 했다.
비행기 창에 기대 날개 끝에 걸친 도시의 불빛을 눈으로 좇다 보면, '어떤 일로 가세요?'라고 비상구 맞은편 승무원의 미소 띤 목소리가 들리기도 하고(환청이었나?), 어쨌든 세상만사가 그렇듯 출장이라고 나쁜 것만 있을까. 어딘가 좋은 점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친절히 대해주셨던 승무원님들께 감사합니다.
요즘은 해외 출장이 확연히 줄었다. 코로나 여파가 바꿔놓은 문화 덕분인지 화상회의도 익숙해졌고, 구태여 현지까지 가는 수고로움 없이 처리할 수 있을 만큼 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이리라. 앞으로는 최악의 출장 공식 같은 건 낯설게 느껴질 세계가 될 듯하다.
'회사 일이 아니었으면 내가 그 나라를 어떻게 가고 그런 경험을 어떻게 했겠어?'라며 회사를 초긍정하는 선배의 말마따나, 출장이란 이름의 강제 문화 체험의 기회는 자연스레 줄게 될 테니 지금 해외출장으로 괴로우신 분들께는 작게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위로가 안될 줄은 알지만.
참, 출장 때 선배가 가르쳐 준 팁이 있는 데 '언제나 십분 뒤 무얼 할지 생각하면 출장 시 업무를 잘 해낼 수 있지.'란 말은 매우 유용했습니다.딱히 귀에 들어오진 않을 줄 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