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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노트 May 05. 2024

입사할 때 퇴사를 준비해야 하는 이유

입사하며 원칙을 세우게 한 일

조지프 캠벨이란 신화학자가 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란 책에 보면, 이야기는 주인공이 일상 세계를 떠나 특별한 세계를 여행한 후 돌아오는 구조라고 말한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민음사


따지고 보면 새롭게 시작하는 모든 직장은 특별한 세계이며 입사해서 일하는 과정은 영웅의 여정이 된다. 사람들은 신화 속 영웅의 이야기를 통해 일터를 대하는 마음가짐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해온 셈이다.


취업을 영웅의 여정으로 거창하게 표현한 이유는 위험하기 때문이다. 파트타임이 아니라 하루 8시간씩 5일간 꼬박 일해야 하는 고정된 직업을 갖는 세계는 우연히 떨어진 정글처럼 검고도 깊다. 그곳은 낯선 존재가 사는 특별한 세계고 알 수 없는 규율과 위험표식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harper design, illustrations by MINALIMA


정글도 하나를 든 채 맨몸으로 밀림을 헤치며 나아가다 보면 이곳저곳 깊은 상처를 입기 십상이다. 밤이 되면 산짐승과 야행성 조류들의 울음소리가 폭력적으로 몸을 두들긴다.   


요즘 신입 사원들이 쉽게 퇴사한다고 혀를 끌끌 차지만 어찌 보면 합리적인 선택이다. 정글은 위험하고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회사라고 뭉뚱그려 표현하지만 원시 부족 연맹체처럼 각 부족의 언어가 있고 룰이 있으며 괴팍한 부족장 성격에 따라 이해 못 할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나에게 친숙하고 호의적이었던 일상의 룰은 깡그리 무시되기 일쑤다.


그렇다면 퇴사가 정답인가 하면, 이 역시 간단치 않다. 간간이 부족에게서 벗어난 누군가가 혼자 들판으로 나가 야생 물소를 길들여 부자가 되었단 소문이 돌 때마다 '이런 미친 부족장 아래서 구르느니 나도 꿈을 찾겠어!'라고 다짐한다. 하지만 야생 물소를 찾는 일은 부족생활보다 더 불안정하고 운과 실력이 필요하다.


게다가 나를 받아줄 부족의 숫자는 언제나 부족했고, 때마침 돈이 필요한 일이 줄줄이 생기고 만다. 가족이 아프다거나 결혼을 해야 한다거나 집을 사야 한다는 따위의 일들이 기다렸다는 듯 몰려온다.


그러니 퇴사를 하는 사람을 의지가 약하다고 매도할 일도 아니고, 툴툴대며 회사를 다니는 이들을 꿈을 포기했다고 비난해서도 안된다. 그저 각자가 당면한 자기의 자리에서 최선의 선택을 했을 뿐이다. 살아보니 인생이 그렇다.


이천 도자기 축제 전시작품 14번. I am tired


내 경우는 결과적으로 부족마을에 제법 오랜 기간 남는 쪽을 선택했으니 이쪽 길을 걸으려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법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세 가지 정도로 간추릴 수 있다.


1. 부족마을을 고를 땐 자신의 역량 최대치에 근접한 크고 좋은 곳을 택해야 한다.
2. 부족에서 쓰고 다니는 가면에 얼굴을 맞추려 하지 말고, 자신 얼굴형에 맞게 가면을 맞춰야 한다.
3. 부족 내에서 명확한 자신만의 행동원칙을 세우고 차근차근 실행해야 한다.


좋은 부족마을은 단순히 돈을 많이 주는 곳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졸업을 앞둔 대학생과 대화하다 보면, 자신의 역량을 낮춰 쉽게 입사할 수 있는 회사가 있다며 가도 되는지 물을 때가 많다. 그럴 때면 가급적 크고 잘 알려진 회사를 가라고 권유한다.


중소기업은 어떻게 인재를 수급하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건 수요와 공급논리로 해결할 문제이지 윤리에 호소할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그렇게 권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좋은 회사에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고 그들에게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부족사회가 그렇지만 기이한 가면을 쓰고 날뛰는 빌런은 어디나 있다. 하지만 좋다고 알려진 부족엔 비율적으로 적다. 이것은 정말 큰 복지다. 무엇보다 미숙한 내가 본받을만한 훌륭한 사람들이 많다. 회사는 돈을 줄 뿐이지만 그들은 삶의 방식과 교훈을 가르쳐 준다. 좋은 회사에 다니다 퇴사한 선배와 술을 마실 때면, 일을 그만둔 것엔 전혀 후회가 없지만 함께 일하던 훌륭한 사람들을 보기 힘들어졌다는 점에선 크게 아쉬워한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계속 배울 수 있을 때 성장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직업적 페르소나와 관련돼 있다. 얼마 전 신입사원과 점심을 먹었다. 상사와 의견이 안 맞는 부분이 있어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하려는 데 부담스럽다고 했다. 막 입사해서 열심히 하려다 보니 너무 착한 이미지로 메이킹이 되어 갑작스레 상사에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놀라지 않을까 싶단 것이다. 그렇게 착한 사람도 아닌데 가식을 떤 것 같다며 후회했다.


이런 실수는 신입사원의 대표적인 고민거리 중 하나다. 일명 가면의 문제다. 우리는 모두 일을 할 때 가면을 쓴다.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훔치는 대리님도, 과장님도 협상 테이블에선 차가운 가면을 쓴 채 일한다. 여기까진 정상적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harper design, illustrations by MINALIMA


그런데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고 사랑받아야 한다고 느낀 나머지 얼굴형에 맞지도 않는 가면을 쓸 때가 있다. 얼굴을 억지로 가면에 끼워 맞추면 회사에선 안쪽으로 튀어나온 가면의 굴곡이 자꾸만 아프게 찌른다. 집에 갈 땐 가면을 벗어놓고 가야 하는데 자국이 남아 친구나 가족을 만날 때조차 가면을 쓴 형상이 돼버리고 만다. 나중엔 원래의 얼굴을 잃는다. 비극이다.


회사를 다닌다는 건 써야 할 가면을 내 얼굴형에 맞추는 일에 가깝다.


볼은 약간 눌리겠지만 깎을 수 없는 광대 쪽은 좀 넓게 펴고 다듬는 '유격을 조정'하며 가면을 맞춰 나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상사에게 항의하고 후회한다면 다음번엔 한번 더 참을 수도 있고 더 부드럽게 말하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좋은 선배와 상사라면 후배의 당돌함이나 좌충우돌을 가면의 유격을 맞추고 있구나 하며 기다려 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원칙 세우기는 회사 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주인공 밀러 대위는 독일군 기관총 사수에게 소중한 부하를 잃는다. 복수심에 불탄 소대원들은 포로로 잡은 독일군을 즉결 처형하려고 한다. 하지만 밀러 대위는 그를 포로로 대우하여 풀어주려 한다. 당연히 소대원들은 눈이 뒤집혀 항명까지 하려 한다. 그때 밀러 대위는 모두가 알고 싶어 내기까지 하던, 전쟁 전 자신의 직업을 털어놓으며 말한다.


“고향 사람들은 내 일에 대해 잘 알지만 이곳에서 하는 일은 전혀 알지 못해. 난 변했어. 때로는 아내조차 내 모습을 못 알아볼까 걱정돼. 난 라이언이 누군지 모르지만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야 내가 돌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거야.”


일터에서 스스로 원칙을 세우고 지키는 일은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이다. 꿈이 있기 때문이다.


일터는 나의 집이 될 수 없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민음사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도 영웅의 여정 끝에는 '집으로 돌아옴'이란 항목이 마지막 장을 장식한다. 모든 이야기는 모험과 고난을 겪고 성장한 내가 집으로 돌아옴으로써 완성된다. 밀러 대위 역시 전쟁터에서 일을 하며 쓰는 가면이 본질을 변화시키지 못하도록 원칙을 세워 자신을 철저히 지키려 했다. 영웅의 여정을 떠난 누구나 그렇게 해야 할 일이다.


참고로 내가 입사했던 시점에 세웠던 원칙은 이랬다.


첫째, 회사와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고 출근이 '즐거울 땐 반드시 자신을 돌아볼 것'. 둘째, 받은 만큼은 최선을 다해 일할 것. 셋째,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업무로 무시를 당하지도 폐를 끼치지도 말 것.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harper design, illustrations by MINALIMA


내게는 의미 있는 이 원칙을 이십여 년 넘게 지켜왔다. 오랜 기간 얼굴 모양에 맞추느라 닳아버린 가면도 회사에 걸려 있다. 집으로 온전히 돌아올 때쯤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고양이 미소처럼 내가 썼던 가면만이 일터 어느 공간에 걸려 있겠지? 생각한다.


그러면 마음이 훈훈해진다.


정말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harper design, illustrations by MINAL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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