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하기 전엔 직장인들끼리 업무 외 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게 이상했다. 회식도 지겨운데 주말 산행을 함께 하는 장면이라도 보면, '끌려 나온 걸까?'라거나 '친구가 없나?'란 시니컬한 반응이 일었다.
그런데 회사는 친구를 사귀기에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공통의 관심사(돈 벌기)도 있고, 공동의 적(주로 상사)도 있으며 일상의 궤적(출퇴근) 역시 비슷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미혼 시절엔 시간이 많았다. 퇴근 후엔 연애하며 알콩달콩 시간을 보내게 될 줄 알았는데, 대개는 초봄 일찍 깬 나비마냥 홀로 축 늘어져 휴대폰을 쥔 채 뒹굴거리기 일쑤였다.
남방오색나비
그렇게 정서적 지루함에 지쳐 처음으로 만든 동아리가 '영구회'였다. 풀네임은 '영구 영화 연구회'. 심형래 감독이 연기한 '영구'가 주인공인 영화를 감상하는 동아리였다. 계기가 된 작품은 '용가리'였는데, 지금에야 웃기는 영화 정도로 치부되지만 당시에는 꽤나 논쟁이 분분한 화제작이었다.
티라노의 발톱 공룡 제작비 내역을 공개한 부분이 힙하다
한쪽에선 '뭐 이런 영화를 만들었어?'라고 비평가들이 용가리 치킨을 먹듯 물어뜯었지만, 다른 쪽에선 '개그맨이. 충무로 영화 카르텔을 깨고. SF 불모지인 한국에서 도전적으로. 쥬라기 공원 같은 CG를 꿈꾸며. 글로벌 시장을 겨냥해. 영어로 제작한. 애국 영화!'를 만들었다며 격렬히 지지했다.
딱히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오냐, 그렇다면 우리가 냉정히 평가해 주마!'란 자랑찬 기치를 들고 동아리를 시작했다. 그런데 시작하자마자 뜻밖에도 장애에 부딪혔다.
활동을 위해선 <영구와 공룡쭈주(1993)>라든가 <영구와 우주괴물 불괴리(1994)>를 같이 보자고 해야 할 텐데, 선뜻입을 열기 어려웠다. (아래포스터를 보시면 '아하'하고 이해가 되시지 않을까?)
마치 비밀 접선하듯 회원을 모집하다 보니 단 두 명뿐인 동아리가 만들어졌다. 어쨌거나 우리는 DVD 출시로 한창 망해가는 VTR 비디오 가게에 전화해서 희귀작을 모았다. 가게 주인들은 영구 영화만 사가는 걸 이상하게 여기는 듯도 했지만 꽤 그럴듯한 컬렉션을 모을 수 있었다. 퇴근 후엔 시간을 정해 VTR실로 슬며시 모였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시사를 한 뒤 감상평을 개인 홈페이지에 올려놓으며 나름 열심히 활동했다.
<티라노의 발톱(1994)>이 '우우, 크오, 캬악, 으으, 와우와우' 소리만 있는 무언영화였다는 놀라운 발견을 하기도 하고, <영구와 공룡 쮸쮸(1993)>에서 용가리의 모티프를 발견하는 성과를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마지막 SF작품인 <D-워(2007)> 극장 관람을 끝으로 영구회 활동은 공식적으로 마무리된다. 이유를 설명하자면...
아리랑이 처량하게 울려 퍼지는 크레디트를 뒤로한 채 영화관 밖으로 나와 밝은 햇살을 마주한 순간, 우리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용가리야 너도 이 정도면 됐어. 우리도 여기까지 할게.'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랄까.
그해는 유독 더웠다. 여름이었다.
중계동 나비정원 예쁘더군요
두 번째 동아리는 친한 선배가 도저히 안 읽히는 책이 많다며 함께 읽자고 '슬며시' 제안해왔다. (회사에선 업무와 무관한 활동은 언제나 슬며시 제안하는 게 룰이다.) 이번엔 '미디어 연구회'란 거창한 이름을달고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미디어에 대한 전설적 예언서 <미디어의 이해>라든가, 미디어 산업의 발전 로직을 펼쳐보여준 명저, <재매개> 같은 어려운 학술서적만 골라서 탐독했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혼자 읽어 이해가 안 되는 책을 여럿이 같이 읽는다고 이해가 되는 건 아니란 것을.
그런데 영구회와 반대로 이 동아리 운영에도 문제가 있었다. 뭔가 있어 보이는 작명 때문인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한두 사람이 귀엣말로 '같이 할 수 있을까요?' 슬며시(!) 묻더니 밴드웨건효과처럼 '나도 할래' 행렬이 이어지며 순식간에 20여 명 넘는 동아리로 발전해 버렸다.
다이아몬드 등급으로의 성공 보장을 앞세운 다단계 강의장처럼 북적이게 되자 여러 종류의 시스템이 필요해졌다. 책 선정 및 구매 위원회, 회의실 예약 위원회, 간식 보급 위원회 따위. 나중엔 이도저도 귀찮아져서 슬그머니 해체시켰다.
그 뒤에 만든 동아리는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교훈을 바탕으로 만들게 되었다. 회사 내 동아리를 만들 때의 규칙은 이렇다.
1. 동아리는 비밀리에 한다. 소문이 나더라도 '아. 그냥 저녁 같이 먹은 거야.'라며 짐짓 모른 척한다. 2. 구성원은 모두 친해야 한다. 한 명이라도 불편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신규회원은 받지 않는다. 3. 동아리의 목적 활동은 꼭 한다. 책을 읽는 동아리라면, 술이 당겨도 책을 꼭 읽고 마시러 간다.
회사를 다닌다는 건 때론, 달력 없이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너는 것과 닮았다. 매일 같은 바다를 바라보며 날짜를 기억하려면 그 수단으로 특정 이벤트를 떠올려야 한다.
회사 업무와 관련한 이벤트는 고통과 얽혀있으니, 기분 좋은 이벤트는 스스로 만들어 기억 저장고에 넣어둘 필요가 있는데 그때 필요한 게 동아리다.
지금은 다른 회사에서 대표이사를 하며 영업 이익을 올리려 악전고투하고 있는 선배 역시 이렇게 기억을 반추하곤 한다.
퇴근 후 회의실에서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 공부할 때가 회사 생활 중 가장 좋았어. 지금도 그때가 그리워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 공부 동아리 당시 모습
존경할만한 선배, 동료와 퇴근길에 만나 회사 업무와 무관한 일을 사부작거리며 벌이며, '티라노의 발톱이 정극영화였다니 의외로군요.'라거나, '탈레스 시대 사람들도 자연현상을 해석하려고 신화를 만들었단 걸 알고 있었네요.' 따위 대화를 나누다 보면 군고구마를 점퍼 안에 품은듯 훈훈함이 올라온다.
'통신사랑 계약 협상 하던 때'로 기억하는 게 아니라, '그때가 드래곤 투카를 볼 때였던가?'라며 촉촉한 눈빛으로 먼바다를 보며 회상에 잠기는 쪽이 확실히 낭만적이란 건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 않나요?
마음이 지친 직장인 여러분이라면 한번 시도해 보셨으면 좋겠다.
* 부록 : 내가 회사에서 만든/참여한 동아리 목록
1. 영구회(영구 영화연구회) : 심형래 감독, 주연 영화를 감상하고 연구하는 연구회. 회원 2명 (D워 보고 해산)
2. 미디어연구회 : 미디어 관련 서적을 읽고 이해하는 동아리. 최대 회원 20명 이상 (사람 많아져 해산)
3. 영어회화 동아리 : 영어로 토론하는 동아리. 회원 4명 (동아리 회원끼리 이별하는 바람에 해산)
4. 리모트 뷰잉 동아리 : 초감각 원격투시를 직접 실습, 검증하는 동아리. 회원 2명 (엔지니어 선배에게 객관적으로 검증 부탁, 선배가 생각 중인 가방 안 특정 물건을 맞힘. '60% 정확도'란 말을 듣고 만족하며 해산)
5. 소크라테스이전 철학 연구회 :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사조를 공부. 회원 2명 (책을 다 읽고 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