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을 빈번히 다니게 된 요즘, 한 두 번씩은 단체관광을 하게된다. 단체관광은 부모님이나 어른들을 모시고 갈 때 권하고 싶다. 이동이나 식사도 편리하고, 무엇보다 어르신들의 요구사항을 가이드가 알아서 대행해 주니 편리하기 때문이다.
홍콩 시장에서 장모님이 차세트를 사는 데, 흥정을 통역하다가 시장 상인 아줌마에게 그만 깎으라며 대신 등짝을 맞은 아픈 기억이 있다.가이드님이 있었다면 노련하게 넘어갔을텐데...하다가도 다양한 사람을 이끄는 가이드란직업도 힘든 점이 많겠구나 싶다.
전에 이탈리아를 간 적이 있다. 여행 가이드는 성악공부를 하며 아르바이트 삼아 일을 하고 있었다.
'와, 성악을 한다고요?'
노래를 좋아하는 데다가 특히 버스를미사리무대 정도로 생각하는 우리나라 사람 특성상 그냥 넘어갈 리 없다. 여행객들은 노래를 해달라고 보챘다. 진지한 누군가의 직업이 장기자랑이 되는 순간은 곤란하다. 갑자기 내게 학생에게 학점항의를 받는 시간강사쇼를 해달라면 난처할 테니까.
하지만 자기 역할에 충실한 가이드는 수줍은 표정으로 노래를 시작했다. 아드리아해의 포도가 익어가는 따스한 이탈리아 남부, 한국인 관광객을 싣고 지방도로를 달리는 관광버스 안에서가장 아름다운 테너 아리아를 들었다. 몇센티 떨어진 1열에서 듣는 성악은 압도적이었다. 가이드비를 더 드렸어야 했는데.
어쨌거나 대학 재학시절, 과외나 통역 아르바이트는 간간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참에 통역 가이드 자격증을 따서 방학 때 일하면 좋겠다 싶었다.
자격증의 정확한 명칭은 관광통역안내사, 관광공사에서 발급한다. 통역분야의 유일한 국가공인자격증이란 명예로운 타이틀을 갖고 있다. 1차 시험은 필기로 관광, 역사 등과 관련된 필기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2차가 문제인데 해당 언어로 면접시험을 보게 된다. 그렇게 2차 시험을 볼 때였다.
시험의 면접관은 'OOO지역을 가이드한다고 생각해 보고 소개해보세요.'란 문제를 냈다. 우리나라 국립공원 개수만 23개에, 절이라든가 폭포 등 명소까지 포함하면 수백, 수천에 달할 텐데 갑자기 특정 지역을 소개하라니 당황했다. 멕시코시티 27번지 타코가게의 베스트셀링 음식은?이란 문제라면 '아마 곱창 넣은 타코?'라고 찍기라도했을텐데...
'저... 계룡산 국립공원에 대해 설명하면 어떨까요? 제 고향과도 가깝고 다른 지역도 계룡산 안내처럼 준비하면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시험 면접관은 내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네. 그럼 한번 해보세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놀랍게도 2차 시험에 붙었다. 나보다 공부를 잘했던 선배는 떨어졌으니, 면접관께서 융통성이 있는 분이었달지 어쨌거나운이좋았다.
영예로운 국가 공인 자격증인만큼 관광공사에선 연수를 반드시 들으라고 안내했다. 강연장이 마련돼 있었고 선배 관광통역가이드들이 나와 실무 관련 교육을 시켜줬다. 그런데 이 분들의 강의는지나치게 생생했다는게문제였다.
"한 달에 못해도 700 정도 법니다. 하하하."
거의 25년 전인데, 월 700이라니 깜짝 놀랄 수입이었다. 모두들 꿈에 부푼 얼굴로 집중하게 됐는데,
"관광객이 온 이상 지갑에 있는 모든 돈을 탈탈 쓰고 돌아가게 해야 합니다."
"관광지 업체와 계약을 맺어 커미션을 챙긴다면, 그 비율은 최대 OO%까지 챙길 수..."
"인삼을 팔려면 말이죠..."
강의가 계속될수록 '음. 저분을 강사로 부른 관광공사 직원은 괜찮을까?'란 걱정이 들었다. 한편으론 관광수입을 끌어내기 위한 범국가적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마련된 자리일지도 모른단 생각도 스쳐갔다. 과거는 늘 좋아 보이지만 관광도 전투적으로 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어찌어찌 교육이 끝나고 자격증이 나왔다.
재발급 받은 자격증
자랑스런 자격증을 손에 쥔 채로 방학기간에 일을 하기 위해 국내 굴지의 여행사에 전화를 걸 차례였다.
"제가 가이드 취업이 가능한지 해서요."
"글쎄요. 현재는 자리가 없어요."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이 있어서, 인바운드 아웃바운드 모두 되는데..."
"가이드하는데 자격증은 필요 없어요. 현재 일하는 분들도 전부 자격증 없이 일해요."
"법적으로 필요가 없어요?"
"네." 뚝!
그렇게 전화가 끊겼다. 통역 관련 유일한 국가 자격증이고, 시험도 어렵지만 정작 업계는 자격을 요구하지 않았다.
지금은 관광진흥법 38조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여행업자는 관광통역안내의 자격을 가진 사람을 관광안내에 종사하게 하여야 한다.)에 의해 엄격히 관리되는 듯 하지만, 아마도 그때는 해당 규정이 없었거나, 있어도 크게 개의치 않았던 듯하다.
그때부터 자격증을 불신하게 되었다... 라면 좀 심한 이야기일라나? 이후 자격증은 운전면허 외에 딴 기억이 없다.
국가공인자격증은 운전면허처럼 운전이란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자격에 가까울 뿐, 자격증 자체로 취업이 보장되는 경우는 드물다. 심지어 어렵다는 변호사나 기술사 자격증도 마찬가지. 자격증을 딴 이후엔 다시 험난한 창업, 취업의 과정이 기다리고 있다. 자격증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그 지점을 쉽게 혼동하곤 한다.
국가자격증이 이러할진대 사설 자격증은 더하다. 처음 들어본 자격증을 따려고 돈과 시간을 낭비하고, 새로운 업종이 생겨날 때면 신규 자격증이 남발된다. 그런 상황은 세월이 흘러도 줄지 않고 반복된다. 자격증 실효성 여부와 상관없이 회사에 취업하려고 하면 남들보다 더 성실하고 나음을 보여주기 위해 한 칸이라도 더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쉬는 동안 열심히 했나 봐. 자격증이 7개나 있어... 근데 이런 자격증이 있었어?'
이런 류의 대화가 면접관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오가는 게 현실이다. 자격을 증명하기 위한 자격증이 아니라, 놀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자격증이라니... 경쟁 사회의 서글픈 단면이다.
몇 년 전 통역안내사 자격증이 떠올라 관광공사에 문의했더니 재발급해줬다. 메일 주소가 등록이 됐는지 관광 일자리 메일도 날아온다.
현재로선 '난 국가 유일의 통역 관련 자격증 보유자야!'란 농담할 때 빼놓곤 쓸 일이 없지만, 허탕 친 관광가이드의 꿈 덕에 자격증의 현실을 빨리 깨달은 건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나저나 AI와 휴머노이드가 자격증 없이 모든 일을 대신할 때쯤엔, 진짜 인간임을 증명하는 자격증이 생기려나?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