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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노트 Apr 13. 2024

어둠을 엿보는 통역사

첫 번째 직업적 원칙을 세우게 된 일

거실에 놓인 라디오의 심정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웬 라디오냐 싶지만, 커뮤니케이션의 기본 모형은 라디오 통신 원리를 본 따서 만들어졌다. 여기엔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해석하는 '채널'이란 녀석이 있는데, 이게 라디오에 해당한다. 서로 다른 언어를 전해준단 점에서 라디오는  통역사와 닮았다.



라디오야 꽃무늬 면보가 얹어진 테이블에 가만히 놓여있으면 된다. 그런데 통역사가 말을 잘못 전하기라도 하면, 그림에서처럼 '오해'(노이즈)가 생길 위험이 있다. 게다가 대화 상대가 통역사 쪽을 바라보고 말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난감해지고 만다.  


바이어는 '아... 가격 좀 깎아주세요.'라고

통역에게 떳떳이 요구한다.

셀러는 '그 가격도 싸게 주는 거예요.'라며

통역을 쏘아보며 화를 낸다.

중간에 낀 통역사는 '지직 지직' 소리를 내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경기 포수와 투수가 나누는 작전 타임의 은밀한 토크를 엿들을 있는 매력도 있다.



대학에서 어학을 전공한 덕에 통역 일을 하곤 했다. 특히 무역상담회에 가면 생경한 업계 이야기를 들을 있어 흥미로웠다. 한 번은 양말 공장을 운영하는 사장님 설명을 통역해 주자 바이어는 대뜸 20인지 30짜리인지를 물었다. 나는 '뭔지는 모르겠는데... 20, 30인지를 묻네요.'라고 했다. '아! 그거 면수, 그러니까 실 굵기를 묻는 거예요.'라면서 답을 해줬다.


쉬는 시간이 되자, 사장님은 도움이 될 거라면서 종이 위에 양말 제조 공정을 설명해 줬다. 도움은 안 됐지만 매일 신고 벗는 흔한 양말이 복잡한 과정을 거쳐 생산되는 게 신기했다. 젠틀해 보이는 사장님은 '중국에서 너무 싸게 밀고 들어와서 언제까지 생산을 할 수 있을지...'라며 걱정하셨다. 잘 이겨내셨으려나?



통역 일을 하며 기억에 남는 일터가 있다. 그중 한 곳은 척추 관련 의료기기 수입업체였다. 대만 공급업체와 회의 통역이 끝나자, 차를 한 잔 하자고 했다. 대화를 나누며  업계의 고충을 듣게 됐다.


'이거 병원에 하나 넣으려면요. 명절마다 선물 보내고, 찾아가서 밥 사야 되고, 부르면 달려가야 되고, 수술실에도 들어가요.' '수술실에요?' '네. 이거 방향도 헷갈리는 경우가 있어서...' 지금이야 큰 일날 일이고, 여러모로 제도적 보완이 됐겠지만 그 시절은 그랬던 것 같다. 수술침대에 누운 환자 입장에선 오싹한 이야기다.


그런데 수입업체 관계자가 영업의 고충을 말하던 중 갑자기 화를 낸 지점이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커피 한 잔은, 그 정도는 본인이 살 수 있는 거잖아요? 한 잔은?!


커피 한 잔에 화를 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경력이 붙은 지금은 짐작이 된다.  


일은 대부분 부탁과 요청으로 이뤄진다. 업무에 따라 서로 위치를 바꾸게 된다. 과장된 비유를 하자면, 어른들의 역할 놀이가 일의 본질이다. 커피 한잔의 존중이 필요한 이유다.


IMF 끝물, 졸업을 앞두고 의료계 영업직 공고가 높은 연봉으로 유혹했지만 역할 놀이의 밸런스가 떠올라 포기했다. 대신 운 좋게 다른 곳에 취업이 결정되었다. 그즈음 통역 요청이 다시 왔는데, 신입사원 연수 일정과 겹쳐 정중히 사양했다. 관계자분은 진심으로 취업을 축하해 줬다.


사람은 좋지만 내성적인 그분은, 밸런스가 기울어진 일터보단 다른 직업을 가지면 좋으셨을 텐데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에겐 저마다 취향이란 가지에서 뻗어 나온 적성이란 게 있으니까.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일의 밸런스란 부분을 진지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기억에 남는 두 번째 일터는 조사실이었다. 피의자를 신문하고 조서를 꾸미는 곳. 긴 복도는 단테의 지옥처럼 어두컴컴했고 창문마다 굵은 창살이 있었다. 교무실에서 본 기억이 있던 낡은 철제 캐비닛을 배경으로 무표정한 얼굴의 수사관과 젊은 여성, 그리고 일간지를 뒤적거리며 읽는 검사가 앉아 있었다. 외국인 피의자가 들어오면 질문을 던지고 조서를 꾸몄다.


세관에 걸린 피의자는 두꺼운 손톱을 가진 외국의 농부였다. 아무 문제없단 브로커 말만 믿고 큰돈을 내고 비행기를 타고 왔다며 억울해했다. 그는 신문 내내 울었는데, 다른 조사실도 마찬가지였다. 여자와 남자의 낮은 흐느낌 소리가 복도를 따라 가득했다.


농부는 갈라진 입술로, 어제부터 물 한 모금 못 마셨다며 물 한잔만 달라고 애원했다. 수사기법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방에 있는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신문을 마치고 나갈 때, 재빨리 종이컵에 물을 담아 건넸다. 수사관은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만 볼 제지하진 않았다. 농부는 두 손으로 소중하게 컵을 받아 물을 다 마시곤 연신 고맙다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동안 가끔씩 그 조사실이 떠올랐다. 곡성이 울리는 동굴 속에서 감정을 차단한 채 피의자를 조사하는 일이야말로 오로지 갑의 입장에만 서는 밸런스가 깨진 일터가 아닐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하고싶은 직업일 수 있지만, 못을 박듯 하나의 역할로 강하게 고정된 삶은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나는 그런 상황에서 꼿꼿이 자신을 지킬 확신이 없었다.


을과 마찬가지로 갑의 역할에 익숙해진 사람은 직업적 가면을 벗어야 하는 일상에서도 갑처럼 행동하기 쉬울듯 느껴졌다. 직업이 표정을 잠식하고 일상을 시나브로 무대 위 캐릭터로 응고시키는 삶은 미저러블 하다. 역할 놀이가 끝나, 일터 밖으로 나서면 분장을 지우고 무대에서 내려와야 하지만 가면이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아 두려웠다.


회사를 다니며 유지하려 했던 원칙 세 가지 중 하나는 이쯤 만들어졌다.


토트넘 감독을 닮은 직박구리


회사와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고 집에선 일을 하지 않는다.


가끔 회사 가는 게 익숙해지고 즐거우면 끝이다.로 바꿔 부르기도 했는데 여전히 출근이 낯선 걸 보면 이상한 뿌듯함을 느낀다.


'뭐야. 회사에서 일하는 게 인생의 대부분인데 너무 우울한 원칙이잖아.' 누군가의 말에 그런가 싶다가도 표정 없이 밥상 위 된장찌개를 마주한 조사실 사람들을 상상하면 쉽게 떨쳐진다.


내 정체성의 우주로 삼기에 직업이란 무대는 협소하다.


배트맨, 슈퍼맨, 스파이더맨처럼 일상에선 가면과 슈트를 서랍장 안에 고이 보관해야 한다. 평화가 찾아오면 슈퍼히어로의 시간은 언제든 끝나게 돼 있다. 그때는 꽃무늬 잠옷으로 갈아입고 어항 물고기에 밥을 주고 잠을 청할 수 있어야 한다.


일상의 시간은 진짜 '나'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올 겨울엔 보기 힘들었던 나무발발이가 집근처에 잔뜩 와서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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