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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노트 Apr 06. 2024

글로 돈을 번다고? 글로 장학금

재능과 인생의 목표로 삼을만한 직업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일

시폰 소재의 커튼이 펄럭인다.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촉 끝이 닳아버린 만년필로 쓰고 긋는다. 페인트가 하얗게 인 나무창틀 너머 수평선을 바라보다 문득, 코발트빛 하늘을 가로지르는 코끼리의 긴 꼬리.


이런 느낌으로 하루종일 테라스에 앉아 글을 쓰는 작가를 꿈꾸곤 한다. 하지만 의문이 남는다.


과연 글 쓰기로 돈을 버는 게 가능한가?


돈 벌이는 희소성이 중요한데, 글쓰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범용 기술이란 점에서 문제다. 알래스카 연어 회귀시즌의 낚시와 닮았다. 알래스카 불곰들이 다가와 '거 참, 정도껏 합시다.'라고 항의를 할 정도의 실력이 있어야 한다. 펄떡이는 연어 한 마리를 자랑스레 들고 가봤자 '어이, 인간치곤 괜찮네.'라는 상냥한 말을 남기고 불곰은 돌아서고 말 테니까.  


그런데 그 어려운 일을 얼떨결에 해낸 적이 있다.


대학 3학년이 되고 나서 20대의 호흡을 보관하고 싶다는 갈망이 생겼다. 정확히는, 언제 열어봐도 그때의 감성과 사고 체계를 선명히 보여줄 DNA 유전자 지도 같은 것을 꿈꿨다. 그래서 일기 비슷한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포기했다. 일렁이는 까치놀을 떠도는 포말 대신, 넓은 돌 위에 조개껍데기 몇 개를 올려놓고 바다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살아온 얘기를 기록하면 백과사전은 될걸?'같은 푸념이어선 안된다. 백과사전 따위 나도 읽지 않으니까. 언제 펼쳐봐도 20대의 나란 존재, 당시의 기온과 둘러싼 서울의 내음까지 투명하게 살아나는 글이어야 했다.


결론은 소설이었다. 이야기에 20여 년 살아온 감각을 투영해 보자!


전봇대에 뒤엉킨 전선을 좋아합니다. 요즘은 보기 힘들더군요.


그렇게 지극히 개인적인 목적으로, 나만을 위한 첫 소설을 썼다. 완성된 소설은 먹지 묻은 손바닥을 흰 종이 여기저기 뭉개놓은 듯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20대의 수평선에서 바라본 삶에 대한 정직한 소감이었던 탓에 '그렇구나. 난 이런 걸 깨닫기 위해 여기까지 살아온 것이구나.'라는 설득력 같은 게 느껴졌다.    


학교 신문사에서 대학문학상을 개최하고 있어 소설을 출품했다. 꾹 눌러쓴 사적인 감정이 다른 사람에게도 온전히 전해 질 수 있을까 궁금했다. 심사위원의 작은 코멘트라도 듣는다면 나쁘지 않을 듯했다. 현직 소설가였던 심사위원장은 바람대로 코멘트를 해줬다. '오탈자와 비문이 제법 있었지만, 읽고 난 후의 깊은 맛'이 남는다며 수상작으로 뽑아줬다.


첫 소설 상금으로 수십만 원의 장학금을 받았다. 글로 번 첫 수입이었다. 중고 노트북을 샀고 그곳에 간간이 리포트를 쓰거나 짧은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그 사이 IMF가 찾아왔고 취업 문은 굳게 닫혀버렸다. 졸업 즈음 아귀가 맞지 않는 문틈 사이로 비치는 빛줄기 같은 취업 기회가 생겨났지만 번번이 좌절했다. 그 무렵 두 번째 소설을 썼다.


옥탑 방에 갇힌 채 공부만 하던 고시생이, 시야를 막으며 올라간 빌딩 주인에게 반감을 품는다. 어느 날, 빌딩에서 '컹컹' 짖던 개의 울음소리를 못 견디게 된 주인공은 술김에 담을 넘는다. 높은 빌딩은 그의 유일한 사치였던 풍경을 앗아갔고, 개 짖는 소리는 가늘게 유지되던 평정심을 흐트러뜨렸으니 응징을 하는 건 정당하다. 그렇게 빈 소주병을 움켜쥐고 담을 넘었지만 눈에 들어온 것은 뜻밖의 장면이었다. 늙어 죽어가며 마지막 숨에 괴로워하는 개와 그 개만큼 늙어버린 노인. 둘은 마치 서로의 죽음을 위로하는 듯 부둥켜안은 채 달빛 아래 흐느끼고 있었다. 주인공은 소주병을 떨군 채 방으로 돌아온다. 책들을 거대한 성벽처럼 둥글게 쌓아 올리고 그 안에 들어간다. 그리고 개의 울음소리에 맞춰 긴 울음을 토했다.


온 힘을 다해 일생일대의 '성(城)'을 쌓으려 하지만 그 성에 갇혀 버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두 번째 쓴 소설로 대학 총장 명의의 문학상을 받았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졸업을 앞두고 4년 대학생활의 감상을 전할 수 있는 '수상소감'을 교지에 실을 수 있었단 점이다.


'학교 이미지로 어드밴티지를 얻을 것도 없지만 딱히 페널티도 없으니, 스스로 노력한 만큼 보상받을 수 있어 참 좋은 학교였습니다.'라는 문장 때문에, 주변 친구들에게 '어우! 야! 너 너무했어.'란 핀잔을 여기저기서 들어야 했다. 지금이라면 그런 솔직한 칭찬은 쓰진 않았을 텐데. 


어쨌거나 글로 돈을 벌다니 신선한 충격이었다.


글쓰기는 특별한 재료도 들지 않는다. 땡볕과 혹한에서 육체적으로 학대받는 노동도 동반되지 않는다. 원고 마감이란 고통은 있으나 계약과 마감은 모든 일에 있기 마련. 작품이 완성되면 오로지 내 것이란 창작의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무엇보다 작가는 20대의 나처럼 자신의 구원을 위해 쓴다.


이렇게 좋은 직업이 또 있을까! 게다가 소설로 두 번이나 인정을 받았으니 내겐 알래스카 불곰이 등 뒤에서 흘끗 댈 정도만큼의 재능은 있을지도.


우연한 돈벌이로 인해 몰랐던 재능에 대해 생각게 된 케이스였다.


그 후, 회사에 입사해서 장편소설이 계간지 심사평에 오르기도 하고, 작은 공모전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재능이란 원래 진열대에 놓인 장신구처럼 원석의 뛰어남 때문인지 장인이 들인 노력 때문인지 구분이 어렵다.


게다가 소설가로서 인정받는 건 단순히 재능만의 일은 아닐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게 됐다. 이유는 이렇다.


1. 소설(가)은/는 때를 잘 만나야 한다. 작품이 훌륭해도 너무 앞서 있어 선택받지 못할 수 있다. 허먼 멜빌이 쓴 <모비 딕>과 그의 작가로서의 능력은 사후 30년 뒤에야 제대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평생 글만 쓰면 살길 바랬던 프란츠 카프카의 경우, 대표적 장편인 <성>이나 <심판> 같은 작품은 사후에야 출간될 수 있었다.
2. 운이 좋아야 한다. 세상사란 게 그렇지만 작가로 데뷔하거나 출간작이 사랑을 받으려면 여러 종류의 운이 스위스 치즈 구멍처럼 겹쳐 일어나야 한다. 당장 서점에 걸린 베스트셀러 소설 중에서 5년 뒤에도 기억될 좋은 작품은 몇 개나 될까?를 떠올려보면 이해가 될지도.
3. 글쓰기 재능뿐 아니라 자신의 취향 중 일부가 여러 사람의 취향과 맞닿은 부분이 있어야 한다. 즉 대중성이란 재능이 필요하다. 찰스 디킨즈나 무라카미 하루키라면 모를까 토마스 만이라든가 오에 겐자부로의 진지함은 더 이상 읽기 힘든 시대가 돼버렸다. 대중적 순문학이란 기묘한 표현에 맞는 작품이 아니라면, 신춘문예나 문예지 등단의 순문학 작품집은 이제 화젯거리도 되지 않는다.


이 깨달음을 종합해 보면 글쓰기 재능이란 누구도 알 수 없다는 허무한 결론에 이르고 만다. 내가 원하는 소설가가 되지 못한 건 순수한 재능의 부족 때문일 수도, 운이라든가 때를 타고나지 못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가지의 허무한 결론 속에서 위로가 되는 한마디를 어느 책에선가 본 적이 있다.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는 오직 나만 쓸 수 있다는 것
내가 되고 싶은 소설가는 오직 나만 될 수 있다는 것


직업적 소설가는 아직 되지 못했을지언정 몇 번인가 글 쓰기로 운 좋게 돈을 벌고, 그 덕에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인생의 목표가 될만한 직업군을 찾았다는 것도 좋았다. 뭘 하면 좋을지 평생을 고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란 점에서 그렇다. 언젠간 내 소설이 교보문고 서대에 오르는 날을 떠올리면 가슴이 설렌다.  


그리고 계속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다 보면, 정말로 태양계의 모든 행성이 일직선으로 늘어선다는 그랜드크로스의 행운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베란다의 먼지 쌓인 테이블을 닦고 화분을 볕이 잘 드는 테라스에 내놓는다. '코발트 빛 하늘을 가로지르는 코끼리의 긴 꼬리'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고개를 숙여 가만히 들여다본다.


봄이었다. 

여의도에는 이미 벚꽃이 한창이더라고요. 회사 동료가 올봄은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꽃을 피웠다고 웃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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