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뮤즈노트 Jul 13. 2024

40대가 되면 회사원은 공부를 하자

즐겁게 공부를 하게 한 일

공부 좋아하십니까?


치열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대부분 두꺼운 양장 표지 수학책 앞에서 한숨 쉬던 기억을 떠올린다. 학교에선 이유 없이 시시때때로 매질도 당한다. 그러니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대개 공부 트라우마를 갖게 되었다. 회사를 들어와 돈을 벌기 시작한 이후엔, '공부는 이제 됐어.'라거나 '이제껏 했는데 뭘 또 해?'라며 고개를 젓는 게 당연하다. 처음엔 아내도 그랬다.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은 '공부의 지속가능성'을 사람들에게서 앗아간 게 가장 크다고 느낀다. 공부는 특정 시기에만 하는 것이 아니고 평생을 이뤄가야 할 '기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는 '공부는 때에 따라 배우는 즐거움'(학이시습지 불역열호)이라고 했다. 그런데 공부가 왜 즐거운지는 그 뒷 문장에 나온다.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섭섭해하거나 화내지 않는 군자가'되기에 즐거운 것이다.(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치열한 비교만능의 사회에서 눈치 보지 않고 두 다리로 우뚝 서서 자신을 살필 줄 아는 군자는 자존감 최강의 인간이다. 비교의 틀을 벗어날 수 있으니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고, 인격적 완성을 위해 살아가니 세속된 목표의 실패에도 굳건하다. 공부는 이런 인격체가 되는 방법이기에 즐겁고, 그런 군자가 되어 세상을 사니 기쁜 것이다.

공부하는 40대는 멋있다...라고 생각합니다. 이하 copilot 그림

내가 공부를 다시 시작한 것은 회사를 7년 정도 다닌 뒤였다.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5년 후, 10년 후에 내게 무엇이 남을까? 경험과 업무 관련 지식이야 남겠지만 그걸 증명할 방법도 없고 술자리에서 할법한 무용담 정도 건지게 될 듯했다. 대부분 선배들의 모습이 그랬으니까.


'그럴 바엔 학위로라도 회사생활의 마일스톤을 새기면 좋겠다.'란 심플한 생각으로 시작했다.  


대학원을 고를 땐 경영학이나 언론홍보대학원처럼 직무와 관련이 있고 회사원이 다닐법한 곳은 제외했다. 대신 내가 진짜로 배우고 싶은 학문을 택했다. 회사와 병행해야 하니 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해야 의욕이 날듯 했고, 나이도 먹었으니 바둥대지 말고 마음이 끌리는 공부를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피로감이었다. 집 근처 내과 의사 말대로, 회사를 다니는 건 건강에 나쁘다. (의사 선생님도 참, 어쩌라고요) 출퇴근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동반하는 행위다. 집에 오면 밥 먹는 것조차 귀찮아질 때가 많다. 그래도 어쩌랴. 내가 좋아서 선택한 길인 것을... 이란 심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물을 무치기 전 한소끔 끓여 건져낸 시금치처럼 널브러진 어느 날이었다. 수업에서 교수님이 칠판에 질문을 휘갈겨 썼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네?


미학수업이었다. '아름다움? 그렇지. 우린 꽃을 보거나 자연을 감상할 때 아름다움을 느끼지. BTS 뷔를 보거나 카사블랑카의 잉그릿 버그만에게서도. 그런데 어떤 부분에서 아름답다는 감정이 일어나는 걸까? 균형 잡힌 형태? 색감? 아무리 아름다운 것도 사람마다 달리 느끼는 건 어찌 이해해야 할까?


이런 질문들을 해보다 깨달았다. 삶을 산다는 건 매출을 올리고 돈을 버는 일이기도 하지만, '아름다움은 무엇일까?'를 걸음을 멈추고 생각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세상을 산다면 계약서를 잘 쓰는 것만큼 응당 아름다움은 뭘까? 예술은 무엇이기에 감동을 만들까? 란 질문을 하고 살아야 한다고 느꼈다.


덕분에 대학원 과정은 몸은 피로해도 도리어 정신적 휴식과 안식을 주는 공부에 가까웠다. 배우고 익히다 보니 어느샌가 박사학위까지 마치게 되었다. 그리고 가정에서 아내와 소소한 분쟁 중에 '아무리 그래도 박사님 말씀이 맞지 않겠어?'라고 살살 약 올리며 선한 영향력을 행사한 덕에 아내도 대학원에 진학해 열심히 논문을 쓰고 있다.


시계는 시간이란 개념을 물리적 실체로 만들어 경험하게 해줍니다. 공부를 시작하려면 시계를 구입하세요.


어쨌거나 40대가 되면 회사원은 공부를 해야 할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학비를 내가 벌어 댈 수 있다. 초중고 대학까지 대부분 학비는 부모님에게서 나온다. '대학원 갈래요.'라는 말은 예전엔 부잣집 자녀 거나 불효자 거나 둘 중 하나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스스로 돈을 벌게 되었으니 당당하게 내 돈으로 공부를 할 수 있어 좋다. 게다가 대학원에도 이것저것 장학금들이 있으니 회사에선 육체를 갈아 넣어 돈을 벌고, 학교에선 정신을 갈아 넣으면 학비를 충당할 수 있다. (어차피 먼지가 될 육신인걸 다 갈아 쓰지 뭐...)


2. 5년 뒤, 10년 뒤 학위가 생긴다. 회사에서 5년 뒤 뭐가 남을까를 생각하면 입맛을 '쩝'하고 다시게 될 뿐이다. 회사에서 시간이 지난다고 엄청난 부와 명예가 따를 리도 없다. 그런데 공부를 계속하면, '과장님, 5년 전엔 뭐 하셨어요?'라고 물을 때 '아, 대학원에서 칸트 미학에 한창 심취해 <뉴진스 하입보이 안무에 대한 칸트 미학적 고찰>이란 연구를 할 때였지.'라고 그럴듯한 대답을 할 수 있다. 학위도 생기니 일석이조다.


3. 처음으로 혹은 계속해서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다.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운다는 것은 사람을 정말로 건강하게 만든다. 초중고까지는 의무교육으로 사회 유지에 필요한 교육을 받는다. 대학에선 취업을 위한 기본소양과 기술교육을 받는다. 주위에 물어보면 원하는 공부를 한 사람은 드물다. 원하는 공부를 했다고 말해도 실제론 자신이 뭘 원했는지 몰랐던 경우도 많다. 꼭 대학원을 가지 않더라도, 외국어를 배우거나 수영교실을 다니다 보면 의외로 자신이 배우는 걸 좋아하는 사람임을 발견하게 된다. 배움은 또 다른 우주의 문을 여는 일이기에 인생을 입체적으로 살 수 있게 된다.


4. 순수한 관계를 자연스럽게 만들 수 있다. 삼십 대 사십 대가 되면 주변에 온통 일로 얽힌 사람들뿐이다. 인간관계에 지쳤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모두 어떤 이익집단 속에서 만들어진 관계들이기 때문이다. 배움의 터에선 사회적 가면을 벗기 편하다. 밥을 먹으며 계약서 대신 마르틴 부버의 대화이론이나 글라이딩 영법의 물잡기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들이라니 사랑스럽다. 자신도 포함해서.


5. 배움이란 기능을 죽을 때까지 유지할 수 있다. 인간이 '재미'를 느끼는 영역 중에 하나가 놀랍게도 정보의 취득이다. 우리가 유튜브나 다음 뉴스란을 매일 같이 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진화적으로 다른 개체보다 더 많은 정보를 취득한 쪽이 생존에 유리한 게 당연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뭔가를 알고 배우는 데 선천적으로 즐거움을 느끼게 돼 있다. 공부를 관두면 정신적 죽음이라는 둥 따위 말 대신, 재밌는 여생을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어떤 돼지가 더 맛있더라 정보를 습득하는 원시인과 그를 바라보는 멧돼지


배우다 보면 더 알고 싶고, 알면 더 깊은 즐거움이 찾아온다. 내 경우엔 권투를 배운 적 있는데 지금도 선수들의 스탭이나 콤비네이션에 감탄하며 훨씬 다채롭게 즐길 수 있다. 공부란 확실히 더 나은 재미를 위한 기능이기 때문이다.


아내는 베란다 공부방에서 지금도 열심히 논문을 쓰고 있다. 가방끈이 길어진 덕분인지 이젠 가정 내 국지 분쟁 시,  '어허 박사님 말씀이 맞지...'따위 말에 순순히 물러서지 않는다. 선한 영향력의 반대급부인 셈이니 어쩌겠어...라고 생각하지만 더 놀릴 수 없어 아쉽다.


아직 군자의 길은 먼 것인가?


공부를 이렇게까지 열심히 할 줄이야




이전 17화 회사 다니며 책 출간하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