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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노트 Aug 31. 2015

Chapter1-5. '착한 아이'는 어떻게 만들지나?

이야기의 윤리

착한 아이와 착해빠진 아이의 딜레마


전에 국내의 대형 완구회사 회장님을 만난 적이 있다. 그 회사는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변신로봇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었는데, 불쑥 이런 말을 건넸다.


"아이들 애니메이션을 보면, 대개 로봇이 착한 편, 나쁜 편 나뉘어서 막 싸워요. 근데 우리가 만든 애니메이션은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변신로봇이 나와서 아이와 함께 나비를 잡거나, 아이스크림을 사러 다닙니다. 아이들한테 중요한 건 선악을 어떻게 편 갈라 싸우느냐의 문제가 아니거든..."


아이를 키우며, 우리 아이만큼은 '착하다'고 믿고, 또 한편으로 '착한 아이'가 되도록 '착한 이야기'를 골라 들려줘야 한다고 믿는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 아주 진지하게, "그래서 '착하다' 혹은 '선하다'라는 게 무엇인가요?"를 물으면 말문이 막히게 된다. 


어떤 부모에겐 '착하다'는 것이, 실제론 아직 생각의 힘이 덜 자란 상태의 순수함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또 다른 이에겐, 엄마 아빠 말씀을 잘 듣는 것일 수 있으며, 또는 남을 때리지 마라, 어려운 사람을 도와줘라... 와 같은 몇 가지 교훈적 지침의 의미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선함'이 될 수 있을까? 정말 그런가요? 당장 아이가 맞고 들어왔다면, '너도 때렸어야지!'라고 하는데도?


아이들이라고 해서 '착하다'라는 개념을 대충 눙치고 넘어가도 된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아이들은 혼자 있는 시간에 엄마 아빠에게 들었던 말을 천천히 곱씹으며 지낸다. '착한 아이'라는 뜻에 일관성이 없게 되면 혼란을 느끼고 강박감마저 갖게 된다.


그럼 부모 입장에선 그 개념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하는데... 이것 참 큰일 났다. 엄마 아빠가 세상에서 마주한 '정의'나 '착함'이란 게 말처럼 간단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악'은 '악'이라고 이름표를 달고 있지 않다.  대개의 '선'과 '악'은, 순두부처럼 두부도 아니고 물도 아닌 상태에 머물러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이가 착하길 바라지만 또 마냥 '착해 빠져서' 손해를 보길 원하지 않는다. 이번엔 엄마 아빠가 딜레마에 빠진다. 아이에게 도덕성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양육 문제일 뿐이야...라고 속편하게 생각해온 문제들은 언제나 엄마 아빠, 곧 우리의 문제일 때가 많다.  


원래 '착함'은 매우 어려운 말이다. 그리고 어쨌든 세상은 착하지 않다.


착함과 나쁨, 선과 악, 정의와 부도덕의 문제는 철학의 오래된 탐구과제였고 인문학의 해결되지 않는 난제였다. 그중 철학자 칸트는 우리에게 설득력 있는 도덕론을 사례를 들어 이야기한다. 그는 묻는다.


만약 어떤 사람이 백만 원씩을 매달 기부한다고 하자. 그것은 선인가?


우리는 기부를 하는 행위는 착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상했듯이 칸트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럼 어떤 상황에서 착한 일이 될 수 있을까? 


기부자가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그럼에도 그가 '의무적으로' 백만 원씩을 기부할 때, 그 행위는 비로소 선이 될 자격을 갖춘다..


칸트의 '도덕형이상학의 정초'에 등장하는 이 유명한 이야기는 '의무론자'라는 말을 탄생시키는 한편, 그의 도덕론이 현실에선 절대 적용될 수 없다는 비판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엄청난 선행을 현실에서 누가 할 수 있겠어요? 그쵸? 하지만 이는 성급한 비판이다. 칸트는 낭만적이거나 이상적인 도덕론을 설파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그의 말에 잠시만 귀 기울여 보자.


기부자는 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위해서나, 경력을 치장하기 위해, 혹은 자신의 개인적 만족감을 위해 기부를 한 것일 수 있다. (이를 경향성이라고 표현한다) 이때 기부행위는 표면적으론 선한 행위일 수도 있지만, 착함이라는 엄밀한 용어 정의와는 당연히 거리가 있다. 더 큰 문제는, '아니야! 난 경력으로 이용해먹으려던게 아니라, 진짜~ 순수한 의도였어...'라고 스스로 주장한다 해도, 인간은 자기기만적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누구보다 잘 속인다. 칸트는 바로 그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착함, 혹은 선'의 절대적 기준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바로 이 부분에서 벤담과 같은 공리주의자들과 칸트주의자들이 명확하게 갈린다. 공리주의자들은 '선'의 가치척도를 '행복'으로 이해한 반면, 칸트주의자들은 '선'을 '고통'과 연결시켜 이해했다.


기부자가 돈이 많을 때, 월 백만 원씩의 기부금은 별다른 고통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본인이 가난해졌을 때에도 마치 빚을 갚듯이, 의무적으로 백만 원을 기부하는 행위는 고통이다. 행복은 모든 사람이 갖고 싶어 하지만, 고통은 피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고통 앞에서 자기기만적인 의도는 꼬리를 감추고 달아나 버린다. 짧게 말하면, 고통만이 우리의 순수함을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악인은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


그러나 칸트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그 뒤에 숨겨져 있다. 모든 행동에 무조건 고통만 있으면 '선'인가? 당연히 아니다. 그렇기에, 착한 일을 양심에 따라 의무적으로 행하기에 앞서(정언명법을 따르기에 앞서), 이게 진짜 착한 일인지를 알아보는 '보편화 시험'이라는 걸 제안한다. 이를테면 내가 행하려는 착한 일이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상상'해 보라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지금 내가 하려는 행동을 한다면, 세상이 어찌될지 '상상'해 보라는 것이다.


요컨대 칸트 도덕론의 핵심 개념은, 익히 알려진 '의무'가 아니다. 오히려 '고통'이라고 표현해야 옳다. 그리고 더 중요한 개념은 '상상'을 통한 '공감'이란 키워드다. '공감적 상상력'없이는 세상이 존재할 수 없음을 칸트는 알고 있었다. 따라서 아마도 그에게 '악인'을 정의하라고 했다면, '상상'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착한 아이, 착한 사람은 공감적 상상력을 지니고 있다.


1990년대 중반, 학자들의 연구로 이른바 거울신경세포, 공감뉴런이 발견되었다. 연구가 지속되면서 공감뉴런은  인간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동물들에게도 존재한다는 것이 증명됐다. 심지어 쥐의 경우에도, 먹이를 먹기 위해 손잡이를 당길 때마다 반대편 동료가 전기충격을 받게 하자 그 행위를 멈췄다. 원숭이는 동료에게 고통을 주느니 차라리 굶어 죽기로 작정했다고 한다. (공감의 시대 中) 사회적 관계망을 지닌 동물들은 이처럼 공감뉴런을 통해 상상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당장의 배고픔보다 상대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선택을 취한다. 


회사나 사회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악인'의 특징을 떠올려보자. 그들은 아주 멀쩡해 보이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선 타인에게 피해와 모멸감이 느껴지는 행위도 거리낌 없다. 그리고 말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고, 양심의 가책도 (번듯한 말과는 달리) 실제론 크게 느끼지 않는다. 염치없는 이 시대의 지배자들처럼 보이는... 이른바 소시오패스라고 부르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어린 시절이 정서적으로 결핍됐으리란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공감뉴런을 타고난 존재라고 해도, 제대로 된 양육과정과 상호 자극이 없으면 그 기능은 제대로 발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미국의 아동정신과 의사들은 초기 엄마 아빠와의 정서적 교감이 없었던 아이들에게서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발견했다. 그 아이들은 겉으론 친절한 표정을 지었으나 깊이 있는 인간관계에 서툴렀고  불안해했으며, 거짓말과 절도행위를 거리낌 없이 행했다. 그리고 그 성향은 아이들이 자라나 성인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공감뉴런은 엄마 아빠의 다정한 몸짓과 이야기로 아기에게 자극을 줄 때, 비로소 정교한 회로로 성장한다. 인간은 고도로 사회화된 동물이다. 인간관계는 나라는 개인과 삶의 일부가 된다. 모든 엄마 아빠는 아이가 세속적 성공에만 매달리고, 다른 이들에게 군림하는 외롭고 고독한 권력자로 삶을 살아가길 원치 않을 것이다.


훌륭한 공감회로를 지닌 아이는 훗날 사람들의 마음과 눈빛을 잘 읽고 공감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친구들과 연인에게 한 인간으로서 사랑받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런 게 좋은 삶, 행복한 인생이 아닐까요?


이야기로 공감적 상상력 기르기


우리는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만들어줄 때, 막연히 착하다는 말을 쓴다. '착한 돼지', '착한 허수아비', '착한 요정'...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착한'의 의미를 구태여 정의하거나 알려줄 필요는 없다. 선이나 도덕성에서 중요한 것은 정의가 아니라 상상이기 때문이다.


먹는 걸 좋아하는 첫째 돼지가 대충 지푸라기로 집을 짓고, 낙천적인 둘째 돼지가 나무판자로 집을 지었다. 그리고 벽돌로 열심히 집을 짓는 막내 돼지를 보며 놀려댔다. 그때 아빠나 엄마가 묻는다. "첫째랑 둘째가 막내를 놀렸을 때 막내는 기분이 어땠을까?" 그런데 상황은 역전되어 첫째랑 둘째는 늑대를 피해 막내 돼지 집으로 달려온다. "막내 돼지는 형들이 놀려서 기분이 나빴을 텐데 문을 열어줬네... 왜 그랬을까?"


결국 도덕적 상상력을 키우는 것은 앞서 말한 놀이로서의 이야기, 또 대화로서의 이야기이다. 그 역할극에 아이가 참여함으로써, 대화를 통해 그 입장을 깊이 상상하게 됨으로써 아이는 성숙한 공감 본능을 키우게 된다. 그것은 로봇이 선과 악을 갈라 싸우는, (지극히 현실의 엉망진창인 사회풍조와 비슷해보이는) 낮은 차원의 이분법적 도덕론이 아니다. 저 친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상상하고, 나비를 함께 잡으러 다니거나 아이스크림을 나눠먹는 공감의 도덕론이다. 이는 칸트의 생각처럼 성인이 되어서까지 이어지는 도덕성의 튼튼한 지지기반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아이에게 선과 악을 나누어 가르치지 말자.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어조로 대화하자. 놀이로 이야기를 경험하고 상상하게 하자.


아이 역시 자라면서 자기기만의 함정이나, 나와 생각이 다른 상대를 '악당'으로 규정하고 괴롭히고 싶은 순간이 올 것이다.  어쩌면 이분법적 세계관으로 엉뚱하게 흘러가는 현실속에 맞닥뜨리게 되는 수치심과 모멸감의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그때, 마음속에 심어진 공감의 도덕론은 빛을 내기 시작할 것이다. 처음엔 강렬하지 않지만 점차 선명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마음을 적시게 될 것이다. 그렇게 화해하고 용서하며 아픔을 보듬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칸트의 말처럼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자신의 도덕률을 품고 사는 '사람'이 될 것이다.  



도의적 죄책감은 수치심에 비할 수 없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도의적 죄책감은 보상이 가능하고 한 사람의 내면의 총체성을 더럽히지도 않는다. 도의적 죄책감은 자신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고양된 정서이다.

도덕성은 금지시키고 숨 막히는 규율을 들이대며 완벽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완벽하지 못함을 인정해 주면서 그래도 세상에는 용서라는 자비심이 있다고 말해주어 아이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치 있고 관심 어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는 자신의 인간적 결함이 세상을 괴롭히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아이는 자신의 결함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늘 착하게만 행동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고 그래서 부러움과 질투 같은 감정을 가질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 <공감의 시대> by 제러미 리프킨 中 마사 누스바움의 '사고의 격변 Upheavls of Thought'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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