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관의 노출 콘크리트 인테리어가 된 전시장에 띄엄띄엄 놓인 난해한 작품들 사이를 지나며 '인구밀도 높은 대도시에서 이렇게 사치스러운 공간 낭비라니 황송하네, 그러니 더욱 열심히 봐야겠다'는 마음으로 한 시간 남짓 걷고 나면 운동부족인 나는 지치고 만다. 그럴 때 만나는 미술관 카페에서의 카페인과 당 충전은 미술관 나들이를 더욱 기대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그렇게 현대미술관에 커피 마시러 가는 나는 오페라 극장에는 샴페인을 마시러 간다. 원래 술을 즐기지 않아서 와인의 나라 프랑스에서 살기 전에는 내게 음주란 연중행사였고 프랑스에서 남들 따라서 한 잔씩 홀짝이면서 꽤 늘려 놓은 주량은 스위스로 이사 온 후 다시 팍 줄어 버렸다. 그런데 평소 마시지도 않는 샴페인을 굳이 오페라 극장에서 마시는 이유는 가뜩이나 언어 실력도 부족한데 그 외국어가 노래 곡조와 섞이면 더욱 알아들을 수 없어 '난 누군가 여긴 어딘가' 상태로 길을 잃은 1부가 끝난 후 인터미션 때 기포가 보글거리는 샴페인 한 잔을 마시고 취기로라도 2부를 버텨 보겠다는 내 의지의 발로다. 왜 비싼 돈 내고 고문받는다는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오페라를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비엔나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한여름밤의 꿈'을 보고 싶었는데 일정이 맞지 않아 '살로메'를 보았다. 예수가 오는 것을 예비하라는 선지자 세례 요한의 말을 따르는 백성이 늘어나자 유대 지방을 다스리던 헤롯왕은 그를 두려워하여 옥에 가둔다. 헤롯왕이 세례 요한을 죽일 마음까지는 없었는데 의붓딸 살로메의 요청 때문에 그의 목을 벤 것은 수많은 종교화의 모티프가 되었고 성경을 통해 익숙한 이야기이기에 변주가 좀 있다 하더라도 줄거리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이 오페라를 선택했다. 그렇게 본 오페라였는데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탐미주의자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이 원작이다 보니 악녀 살로메가 세례 요한에게 반해 달빛이 어쩌고 상아가 어쩌고 장미가 어쩌고 하면서 그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대사가 주옥같다. 치기 어린 앙팡 테리블 살로메를 보면서 '어이구 저 요물 같은 년' 하며 등짝이 때리고 싶어져야 하는데 셰익스피어 소네트 18번같고 워즈워드의 시같이 목가적인 비유가 찰진 살로메의 대사를 들으면 그녀가 섬뜩한 일방통행 집착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연인에게 아름다운 사랑 고백을 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연회 도중 기분이 안 좋아진 헤롯왕은 의붓딸 살로메에게 자신의 기분을 좋게 할 춤을 추라고 명령한다. 대신 네가 원하는 것은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며. 이 오페라에서 젤 유명한 장면이 바로 이때 살로메가 7개의 베일을 하나씩 벗어던지며 마지막에는 나체로 관능적인 춤을 추는 장면인데 그쯤 다다르자 내 왼쪽의 일본 아저씨는 더 잘 보려고 주섬주섬 안경을 꺼내 들었고 내 오른쪽에서 끊임없이 떠들어서 몇 번 눈치를 주다가 포기한 커플은 '나온다, 나온다' 하면서 기대에 차 드디어 입을 다물었다. 과감한 연출가들은 실제로 살로메 역 배우의 가슴과 음부까지 노출시키는 파격으로 유명하다니 과연 이 2층 발코니의 오페라 문외한들도 침을 꼴깍 삼킬 만한 장면이리라. 그러나 역시 보수적인 비엔나 극장 분위기답게 살로메는 안에 누드색 타이즈를 입고 관객석을 등지고 헤롯왕에게만 바바리맨 포즈로 살짝 가운을 벗어 보이는 걸로 이 유명한 장면이 연출되었고 일본 아저씨는 안경을 내리고 커플은 다시 꼭 붙어 떠들기 시작했다. 혹자는 나 역시 오페라에 모처럼 집중했던 것이 7개의 베일 씬에 대한 기대 때문이 아니냐, 물을지 모르겠으나 맹세코 아니다. 각 좌석마다 모니터가 있어서 자막 선택이 가능하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어서 몰입도가 확 올라갔을 뿐.
은쟁반 위에 담긴 세례 요한의 잘린 목에 키스하는 광기 어린 소녀 살로메에게 질려 버린 계부 헤롯왕이 '저 년을 죽여라!' 소리치자 병사들이 살로메를 에워싸고 방패로 찍어 누르면서 무대 커튼이 창처럼 빠르게 내려가 버린다. 이토록 쿨하고 모던한 엔딩을 가진 1905년 초연작이라니! 인터미션 없이 1시간 반을 휘몰아치다가 클라이맥스에서 딱 끝나 버린 것이다. 나는 미리 안 것도 아닌데 인터미션에 마셔야지, 하고 샴페인 마시기를 미루지 않고 공연이 시작되기 전 극장 안 바를 기웃대다가 샴페인 한 잔을 이미 끝낸 나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었다.
영국인 오스카 와일드가 동성애 때문에 영국에서 쫓겨나서 프랑스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영어가 아닌 불어로 희곡을 썼고, 이것을 독일 작가 헤드비히 라흐만이 독일어로 번역한 버전을 바탕으로 독일인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이 오페라를 썼다고 한다. 혼란하도다...... 영국인이 불어로 쓴 것을 독어로 번역해서 작곡한 오페라를 오스트리아에 와서 보고 한국어로 감상을 쓰고 있노라니 춤추며 한 장씩 벗어던지는 살로메의 7개의 베일처럼 언어가 한 꺼풀씩 속살을 드러낼 때 그 본래 의미까지 잃진 않았을까 잠시 걱정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