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의 기록
처음 스위스로 이사 와서 마트에 장을 보러 갈 땐 주차장에서 헷갈리곤 했다. 가뜩이나 대문자로 쓰여 안내판이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데 AUFFAHRT와 AUSFAHRT는 알파벳 한 글자 차이로 '올라가는 길 (auf + fahrt)'과 '출구 (aus+ fahrt)'여서 건물 밖으로 빠져나가고 싶은데 계속 위층으로 올라간 일도 있었다. 또 '저기 출구잖아' 하면 같이 있는 사람은 '어, 아닌데 여기가 출군데' 하는 일도 있었다.
Ausgang: aus + 동사 '걷다 (gehen)'에서 나온 gang. 사람이 걸어 나가는 출구.
Ausfahrt: aus + 동사 '운전하다 (fahren)'에서 나온 fahrt. 차가 운전해서 나가는 출구.
한국어로는 둘 다 '출구'지만 이 엄격하고 진지한 독일어로는 Ausgang과 Ausfahrt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차라리 프랑스에 살 때가 편했다. 불어로는 '쏘흐티 (sortie)'라고 하면 다 통하니까. 출구면 출구지, 이 지독한 독일어! 독일어로 대화를 하면 정말 많이 들리는 단어가 '논리적 (logisch)'인데 무슨 말만 하면 그것이 로기쉬한지 아닌지 따지는 독일어 사용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차가 나가는 길과 사람이 걸어 나가는 길은 혼용될 수 없는 게 당연한가 보다. 어쩌면 그동안 한국어 사용자들은 같은 것을 말한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경험과 판단에 의거하여 영 딴 것을 생각하며 서로 대화했을지도 모른다.
하긴 한국어도 독일어 못지않게 헷갈릴 때가 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며,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된다 하지 않나. 노랫말을 짓는 이들은 내가 외국어를 배울 때에나 예리하게 세우는 촉수를 모국어에서도 잃지 않고 단어 하나에도 신중을 기해 말을 고른다. 최근에는 코미디언 유재석에게 트로트곡 '합정역 5번 출구'를 지어 준 작사가가 나에게 작은 울림을 주었는데 열심히 가사를 쓰다 말고 '바람이 분다, 사랑이 운다' 구절 다음에 막히자 이럴 땐 '아아아'로 가면 된다는 것이다. 농담 같지만 이 '아아아'에 눈물, 회한, 애절, 아쉬움, 미련 기타 등등 다 들어 있다고 하면서 업계의 팁을 대담하게 티브이 카메라 앞에서 노출한 그의 말에 나는 무릎을 탁 치면서 그제야 어릴 적 들었던 노사연의 '만남'이란 노래의 비밀을 깨달았다.
"돌아보지 말아 후회하지 말아
아~
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말아~
사랑해 사랑해 너를 사랑해"
사랑한 날들은 지나간 과거일 뿐인 듯 담담하게 이별 후를 얘기하다 갑작스러운 '아~' 이후로 '사랑해 사랑해 너를 사랑해'라고 아직도 사랑한다고 현재 진행형으로 통곡을 해서 어릴 때에는 도통 무슨 영문인지, 이 노래가 왜 명곡이 되어 버린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젠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 말로 다 못할 '아아아' 후에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론은 사랑이어라. 수많은 감정을 비논리적으로 뭉뚱그려 감탄사 안에 쑤셔 넣은 것이 아니라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사랑, 바로 그게 내가 신중하게 고르고 고른 답이라고 화자는 전하는 것이다.
비엔나의 훈데르트바서 미술관을 가기 전 '햇빛 세입자: 훈데르트바서, 첫사랑의 문법'이라는 책을 먼저 만났다. 오스트리아의 화가이자 건축가인 훈데르트바서의 작품들에서 영감을 받아 서윤후 시인이 짓고 국동완 작가가 그림을 그린 이 책의 서두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시간이 지나도 흐릿해지지 않은 것은 사랑이라는 관념 같다고. 그리고 이어지는 밀도 높은 본문은 때론 사랑에서 먼 화제에 대한 텍스트 같다가도 결국 돌아 돌아 사랑으로 귀결되었다.
서윤후 시인이 친구를 위해 케이크를 주문했을 때 제빵사가 했다는 당부의 말은 그에게 가서 시가 되었다.
"픽업 시간 전에는 절대로! 절대로! 오지 마세요! 초조해지면 디자인에 실수가 날 수 있습니다."
그의 바람대로 우리는 서로에게 알맞은 시간에 닿았으면 좋겠다. 귀를 한껏 열고 어디에나 존재하는 시를 발견해서 세심하게 다듬어 의미를 부여해 주는 값진 일을 하고 있는 모든 시인들이 쓰다가 막혀 때로는 '아아아'라 쓸 수밖에 없는 밤이 오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다음 날 아침, 아무렇지 않게 연필로 쓱쓱 그어가며 퇴고하고 또 이 세상을 시로 채워 주길 기도한다. 그 고독의 산물을 편히 읽는 독자로서 염치없지만.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가우디가 있다면 오스트리아 비엔나에는 훈데르트바서가 있다. 생명을 존중하는 디자인과 건축을 남기고자 했던 그의 작품들엔 자연에 직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풍부한 곡선과 자연을 닮은 화려한 색채가 춤을 추고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세상을 향한 그의 꿈이 넘실댄다. '햇빛 세입자' 책을 읽기 전에는 훈데르트바서라는 사람에 대해 알지도 못했으면서 나는 이 책을 읽고 비엔나에 오게 된 것이 운명이 아닐까, 하는 마음을 품고 훈데르트바서 미술관 (Kunst Haus Wien. Museum Hundertwasser)을 향해 비 오는 10월의 어느 날 홀로 비엔나 거리를 걸었다.
왜 이 책의 제목은 '햇빛 세입자'일까. 이는 훈데르트바서의 철학에서 비롯된 제목이다. 그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주거환경의 조건에 천착했다. 훈데르트바서는 시영아파트 작은 월세방에 살아도 창문 밖으로 팔이 닿는 곳만큼의 건물 외벽은 입주자가 자유롭게 칠하고 개조해 '저곳에는 감옥 안 죄수가 아닌 자유로운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창문권'을 주장했다. 이는 인간을 위한 주장이다. 또 나무를 위해서는 인간이 나무에게서 땅을 빼앗아 그곳에 건물을 지었으니 옥상과 집에 나무를 심어서 나무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나무 세입자권'을 주장했다. 그래서 그가 지은 건물 외벽은 창문마다 그 창 너머에 살고 있는 사람의 개성을 담은 듯이 다른 색깔로 알록달록하고 창문과 옥상에 나무들이 살고 있다. 내가 읽은 책은 한걸음 더 나아가 이 대지를 감싸는 햇빛도 사람과 같이 사는 세입자로 인정하여 사람의 공간에 충분히 스며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작가들의 소원을 품고 있다. 햇빛이 닿지 못하는 반지하방, 밤새 고단하게 일하고 아침에 자야 하는 사람들이 햇빛을 차단하기 위해 두꺼운 암막 커튼을 내린 방, 여백이 없이 빽빽하여 빛이 채울 수 없게 물건들로 가득한 방. 그런 현대인의 방에 대한 위로이자 햇살처럼 따뜻한 조언이 바로 '햇빛 세입자권'이 아닐까. "당신의 벽 한 귀퉁이에 햇빛이 같이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는.
훈데르트바서 미술관 안은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로 가득하다. 나뭇잎을 타고 내려온 물방울들은 각양각색의 돌멩이들을 지나 색깔 있는 물줄기를 만들고 다시 관람객들이 편히 숨 쉴 수 있게 도와주는 습기로 순환한다. 자연을 이루는 수많은 요소 중 훈데르트바서가 가장 사랑했던 것은 아마 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는 물을 사랑했다. 개명한 이름 훈데르트바서(Hundertwasser)는 100개의 강이라는 뜻을 염두에 두고 스스로 지었다. 낡은 범선을 사서 직접 수리하여 타고 다닌 그의 배의 이름은 '레겐탁 (Regentag)'인데 비 오는 날이라는 뜻으로 그는 어지간히 비와 강과 물을 사랑했나 보다.
내 이름 안에는 눈꽃을 뜻하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 홍콩에 와서 바다가 보이는 항구 근처에 살게 되면서 나는 궁금해졌다. 바다에 내리는 눈은 녹아서 바닷물이 되는 걸까, 수면 위에 누운 물, 눈물이 되는 걸까. 태평양에 내렸다가 대서양을 만난 눈꽃처럼 나는 세계를 떠돌고 빗물처럼 살아간다. 국동완 작가가 책 안에 세밀하게 그린 단 한 개의 물방울 안에는 수백 개의 강줄기가 흐르고 나는 그것이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쉴 수 없는 피곤한 내 초상화 같아 잠시 아득해진다.
인간과 자연과 햇빛의 공존을 꿈꾸는 훈데르트바서, 서윤후 그리고 국동완. 이들의 공통분모는 인간과 자연과 햇빛이 공평하게 이 세상을 나누어 살았으면 하는 마음, 즉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은 서로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아아아, 사랑해 사랑해 너를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