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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츠부르크] 오늘의 날씨

2019년 12월의 기록

by 바다에 내리는 눈

전화 카드를 사서 기숙사 방 전화로 가끔 엄마랑 통화를 하고 한국 드라마는 기말고사가 끝나면 교포가 운영하는 비디오 가게에서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와 보는 연례행사 같은 거였던 시절에 처음 유학을 나왔다. 그때에 비하면 카카오톡 영상통화로 아무 때고 한국에 있는 사람과 전화할 수 있고 유튜브 클립으로 최신 예능, 드라마의 하이라이트를 거의 실시간으로 감상할 수 있는 요즘은 내가 멀리 와 있다는 걸 체감 못할 때도 많다. 하지만 떠나 온 곳의 현실에 끌탕하고 울고 웃고 속 썩고 기뻐하고 아직 거기 있는 것처럼 살다가도 '아, 난 거기 있지 않구나' 하고 느낄 때가 있다. 매일 듣는 라디오에서 중요한 정치, 사회, 경제 내용을 다루는 본방의 1부가 끝나고 잠깐 쉬어가는 코너 같은 토막뉴스에서 오늘의 날씨를 말해 줄 때다. 오늘 거기 체감 온도가 영하 19도라는데 내가 있는 여기는 따뜻해서 장갑이 필요 없다. 그럴 때면 그 추운 날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칼바람을 맞은 이들의 손 한 번 내 손으로 덮어 준 적 없으면서 나도 마음으로 함께 했다고 할 수 있을지 부끄럽다. 가족과 친구의 마음이 추웠던 어느 날이고 불러 내 뜨끈한 어묵 국물 한 번 먹여 본 적 없으니 그러고도 내가 그들을 사랑한단 핑계로 그들의 일상에 참견할 자격이 있는 것인가.


늘의 날씨 덕분에 본향으로부터의 거리감을 절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가 길 위에 있는 여행자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이 시간을 때워선 안 된다는 위기감을 선물 받기도 한다. 그 날 구경 갈 곳의 날씨를 확인하며 '비가 오니까 정원을 보지 말고 궁전이나 미술관 같은 실내 활동 위주로 일정을 짜야겠군,' '모처럼 해가 비추니 시내가 다 보일 거야, 푸니큘라를 타고 산에 올라도 되겠어' 같은 생각을 하면 마음이 분주해진다. 어쩌면 여행자에게 내일은 없기에 오늘 주어진 이 하루에 최대한 도시 겉핥기를 마쳐야 한단 의무감으로 거기 머무를 사람보다 더 치열했어야 하는 거였나 보다.


그러나 내가 조금 오래 스쳐 지나간 그 모든 도시들에서 난 그러지 못했다. 이방인이었고, 녹아들지 못했고, 게을렀고, 이 어중간한 시간을 때우자는 마음으로 지나왔다. 날씨를 확인하지 않고 우산도 장갑도 없이 길을 떠난 여행자처럼 눈비를 맞으며 길 위에 서 있었다. 준비성 없이 길을 나선 히치하이커를 태워 화려한 도시로 데려다 줄 무모하고 맘 좋은 운전자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잘츠부르크 마카르트 다리 (Makartsteg)

크리스마스 여행 내내 비가 와서 김이 샜는데 잘츠부르크에 도착하니 모처럼 해가 났다. 그동안 내린 비가 넘쳐흘러 한바탕 뒤집어진 강물은 흙빛이지만 마카르트 다리 (Makartstrg)에 매달린 사랑의 자물쇠들은 별처럼 반짝거린다. 나는 그것이 별이 아니라 지켜지지 않을 수많은 약속의 징표임을 안다. 그렇다 해도 이 다리가 자물쇠의 무게로 무너지지 않고 굳건하게 버텨서 순박한 연인들의 사랑이 영원하길 빈다.


다만 오늘의 날씨를 확인하며 그 날 만나야 할 사람과 장소를 챙기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가끔은 낮에 고마운 해가 나고 가끔은 진짜 별이 보일만큼 밤하늘도 맑겠지. 어떤 약속처럼 내일이 오겠지. 내일의 날씨는 내일 확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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