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하 (Sahar)와는 독일어 수업에서 만났다. 향수병 (하임붸 Heimweh)라는 단어를 배울 때 선생님이 그녀에게 물었다. 자하, 향수병을 느끼니? 그러자 그녀는 단숨에 대답했다. "매 순간. 이 곳의 모든 것이 고향과 달라." 난 이 말에 의문을 품었다. 어떻게 모든 게 다를 수 있지? 이 글로벌 시대에...... 머리에 쓴 히잡과 정직한 눈망울, 단호하면서도 차분한 어조 때문에 그녀를 볼 때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단단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었다 (정작 그녀는 시리아 출신이지만). 그리고 더 듣고 싶어졌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무엇이 그렇게 다 다른지.
나: 안녕. 자기소개 좀 해 줄 수 있어?
자하: 나는 자하라고 해. 34살이고 시리아에서 왔어.
나: 언제 고향을 떠났어?
자하: 2012년도에. 처음엔 6개월 정도 터키에 있었고 그 후에 이리로 왔지.
나: 왜 고향을 떠났어?
자하: 전쟁 때문이야. 너무 위험해서 자식들과 남편을 위해 왔지. 내가 일할 때 자주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곤 했었고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었던 거야.
나: 그러면 스위스에는 어떻게 오게 된 거야?
자하: 이건 진짜 긴 이야기인데. 시리아에 있을 때 터키로 밀입국하는 어두운 길을 찾으려고 노력했지. 내 남편이 터키에 누군가 한 사람이랑 연락이 닿아서...... 잠깐, 모든 걸 설명해야 돼, 아니면 바로 그냥 스위스로 온 얘기만 할까?
나: 일단 다 얘기해 봐.
자하: 남편이 우리가 그리스로 가는 걸 도와줄 터키에 있는 한 사람을 찾았어. 시리아 난민들은 보통 터키를 거쳐 그리스로 가거든. 거기서 비행기를 타고 유럽 각국으로 흩어지지. 우리는 남편의 형제, 그의 가족과 함께 탈출을 시도했어. 그때 나는 애가 둘이었고 둘 다 매우 어렸어. 하나는 4살이었고 다른 하나는 2살이었는데 아주 추운 겨울밤 시리아를 떠났어.
나: 셋째 딸은 아직 안 태어났을 때구나.
자하: 탈출을 돕겠다는 안내자는 3명씩 짝을 지어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어. 그날 밤은 눈이 너무 와서 우리는 애들이 걱정되어 오늘은 안 가겠다고 했지. 그러자 그는 갑자기 화를 내며 소리쳤어. "너희 오늘 무조건 가야 해. 이미 우리의 밀입국 경로를 알아 버렸으니 이제 와서 안 갈 수는 없어. 너희가 경찰에 가서 우리의 경로를 밀고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어?"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날 떠나야만 했지. 하지만 밤길은 너무 어둡고 위험했어. 특히 강을 건너야 했는데 그만 큰 딸과 남편이 강물에 빠져 버린 거야. 사람들이 딸과 남편을 건져 줬지만 완전히 젖어 버렸지. 강 건너 작은 오두막에 들어가서 불을 피우고 큰 딸의 옷을 갈아 입히고 밤을 지새웠어. 모든 게 순조로워 보였어. 안내자가 우리 모두 버스를 타고 A**** 도시로 가야 한다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우리가 버스에 탈 때 그만 경찰이 우릴 덮쳐 버린 거야.
경찰은 남편을 끌고 갔고 나와 딸들은 차가운 방에 가뒀어. 나는 경찰에게 영어로 애원했어. "우리 딸들은 너무 어려요. 제발요. 우린 터키에 머무르려는 게 아니에요, 다른 나라로 갈 거예요." 그때 딸내미가 치통이 있어서 열이 나 몸이 펄펄 끓고 있었고 이게 딱해 보였는지 한 경찰관이 약을 주더라고. "나도 자식이 있어서 알아. 부모는 자식이 아픈 걸 못 보지." 우리는 이틀 동안이나 아무것도 못 먹어서 너무 배고팠고 힘들었지. 밤까지 거기 머무르다가 또 다른 건물로 끌려갔어. 거기서 옷을 다 벗기고 검사를 하더라고. 남편과 그의 형제에겐 수갑을 채웠고. 그런데 경찰이 한다는 말이 우리를 마피아에게 넘긴다는 거야. 그들에게서 정말 최악의 경험을 했지. 마피아들은 남자와 여자를 따로 구분해서 서게 하더니 남자들을 끌고 갔고 여자들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위협했어. "우린 돈이 없어요! 돈이 없는 걸 아까 다 확인했잖아요!" 하며 난 크게 울기 시작했지.
나: 그 사람들 이태리 사람들이었어?
자하: 어, 경찰이 우리를 그 나라에 있는 이태리 마피아에게 넘겼어. 난 언젠가 그 경찰관에게 가서 물어보고 싶어. "나한테 왜 그랬어요?" 어린아이를 데리고 있는 우리가 아무 돈도 없다는 걸 알면서 왜 마피아에게 넘겼는지 오로지 이걸 물어보기 위해 그를 만나보고 싶어. 돈이 없다고 하자 마피아들은 우리를 강물 한가운데 숨어 있는 작은 섬에 내려놓고 가 버렸어. 아마 거기서 죽으라는 거였겠지. 폭설이 내리는 밤이었는데 아까 물에 빠졌던 큰 딸은 신발을 잃어버려 맨발이었어. 다행히 남편이 작은 핸드폰 하나를 숨겨 왔었던 걸 들키지 않았고 그 핸드폰으로 비상시에 연락하라고 친구가 준 번호로 전화를 걸어 살려 달라고 했지. 그 번호의 사람이 경찰에 연락해서 우리를 찾으라고 했는데 경찰은 4시간이나 지나서 도착했어. 처음에는 너무 어두워 그들이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찾지 못했지. 거의 구조를 포기할 때쯤 경찰차의 불빛이 희미하게 멀리서 보였고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지. "여기요, 여기에 사람이 있어요!" 마치 영화에서처럼 말이야.
경찰이 작은 보트를 타고 강을 건너 우리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즉시 데려갔어. 이번에는 참 고마운 경찰들이었지. 하지만 문제는, 남편이 담배 한 대 피우고 오겠다며 잠시 사라진 그 사이에 또 가족이 떨어지고 만 거야. 나와 딸들만 병원에 가게 됐고 거기서 의사들은 내게 물었어. "당신 남편 어디 있는 거요? 2시간 정도 기다려 보고 남편이 안 오면 남편의 동의 없이 딸의 발을 자르는 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르오. 젖은 발이 너무 장시간 추위에 노출되어 있어서 동상이 심하다고." 나는 급박한 마음으로 경찰에게 남편을 찾아 달라 부탁했고 경찰이 나와 딸들을 한 군부대에 데려다주었어. 거기서 첫 번째 건물을 뒤졌는데 거기에도 없었고,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건물...... 어디에도 남편이 없더라고. 결국 우리는 그를 마지막 건물 지하실에서 발견했어. 담배 피우고 오겠다던 사람이 왜 또 잡혀 와 지하실에 갇혀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거기서 온 가족이 3일을 함께 지냈지. 다행히 딸의 발 상태는 나아졌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거기 있었어. 3일째 되던 날 한 간부가 내려와서 우릴 보고 부하들에게 묻더군. "여기서 이 사람들 뭐 하는 거야?"
지하실에 뭐가 고장 나서 확인하러 왔는데 우리가 있었던 거지. 우릴 데려다 놓고 경찰들은 까맣게 잊었고 군인들도 남편을 왜 가두었는지 이유를 잊었어. 우리를 발견한 간부가 우리를 아다나 (Adana) 난민 캠프로 데려다주었어. 거기서의 시간은 나쁘지 않았지만 2주가 지난 후 갑자기 경찰이 그러더라고. "너희는 다시 시리아로 돌아간다."
문제는 그들이 우리와 (쿠르드족) 인종도 다르고 정치적으로도 갈등이 있는 사람들 (아랍인)이 사는 지역으로 우리를 데려다준 거야. 난민 캠프에서 만난 여자들은 흐느끼기 시작했지. "그들이 남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취할 거야." 그렇게 불안하게 버스에서 20시간 이상 머물러 있었는데 아랍인들이 의외로 돈까지 쥐어 주며 가라고 하더라고. 불안해하며 버스를 출발시켰는데 뒤에서 한 차가 쫓아오고 그 차에 탄 사람들이 소리 지르더라고. "저 쿠르드 사람들은 인간도 아니다. 죽이자!" 그래서 버스 안에 탄 모두는 겁에 질렸고 결국 받은 돈을 다시 돌려주고 겨우 도망갈 수 있었어.
거기서 버스가 쉬지 않고 달려 터키에 닿았지. 처음에 터키 경찰은 여자들만 들어올 수 있다고 하더니 나중엔 남자도 받아 주더군. 그때 우리 남편이 감기에 걸려 몸이 좋지 않아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오후쯤 국경을 넘어서 들어올 수 있었어. 거기서 터키의 M****라는 한 도시로 또 몰래 갔어. 들키지 않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밤길을 걸어 이번에는 무사히 그 도시에 도착했고 거기서 정식으로 난민 서류를 만들고 입국 절차를 밟을 수 있었어. 처음엔 터키에 계속 머무르며 일자리도 찾으려 했지만 상황이 안 좋아지고 남편의 다른 형제가 이미 5년 전에 스위스에 난민으로 가 있어서 우리를 스위스로 오라고 하더라고.
나: 이 모든 일이 2012년도 일이라고?
자하: 응, 그렇지만 결국 스위스에 온 건 2013년 11월이야. 모든 과정을 독일어로 설명하긴 힘들지만 어쨌든 정말 어려운 시간이었지. 지금까지도 큰 딸은 그때의 트라우마로 물을 무서워하거든.
나: 우리도 북한과 남한 간에 전쟁을 했고 비슷한 상황이 있었지. 우리 아빠도 아주 어렸을 때지만 전쟁을 겪었고 아직까지도 많은 한국인들이 전쟁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어. 어두운 밤길에 몰래 도피하는 것이나 군인들한테 발각되어 어디론가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려 나고, 가족은 서로 다시 보지 못하고.... 이런 슬픈 기억들이.
자하: 시리아에서 탈출하는 사람들 중 반은 물에 빠져 죽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당해서 죽거나 해. 탈출하기 전에 막연히 상상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경험을 하게 되지. 내 말 알아듣겠어? 아니면 일단 가족 중 한 명을 보내 놓고 그 사람이 자기들을 데리러 와 주길 바라는데...... 글쎄, 성공한다 해도 몇 년씩 걸린다고.
나: 아직 시리아에 가족이 있지?
자하: 어. 모든 가족이 있어. 내 가족이 매일 위험한 상황을 겪고 있는데 나는 여기서 아무것도 그들을 위해 해 줄 수 없다는 게 슬퍼. 그래서 매일 울지.
나: 시리아를 떠난 후 다시 가족을 본 적 있어?
자하: 작년 여름에 이라크에서 해후했어. 6년 만에!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야.
나: 나는 네가 수업 시간에 향수병 (Heimweh)에 대해 말할 때 너를 인터뷰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이야기는 향수병 그 이상의 이야기이네.
자하: 수업 시간에 향수병이 있냐고 질문받았을 때 속으로 생각했지. "하임붸? 나는 향수병뿐만이 아니라 다른 상처 (붸 Weh)도 가지고 있다고."
나: 네 고국 시리아는 위험하고 너는 그곳에서 매우 안 좋은 일을 겪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수병을 갖고 있다는 게 매우 흥미로워.
자하: 나는 향수병에 시달리고 있어. 나의 어머니에게 하루는 말했어. "시리아의 모든 것이 그리워요, 특히 그 공기가." 그러자 어머니가 말씀하셨어. "딸아, 공기는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아. 지금은 전쟁터에서 터진 화염으로 다 오염되어 버렸다고." 그래도 난 향수병이 있어. 항상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고 내 기억 속으로 돌아가. 내 고향이 더 이상 9년 전과 같지 않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 - 내 가족, 친구들, 유년 시절-이 그리워.
나: 네가 이 곳의 자연, 식물, 꽃, 모든 게 시리아와 다르다고 했잖아.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예를 들어 (*인터뷰 당시 따라 나온 자하의 막내딸 이름이 로즈 Rose여서 갑자기 이렇게 물어보았다) 장미는 어때? 장미는 시리아나 스위스나 마찬가지로 아름답지 않아? 장미꽃과 같은 사소한 모든 게 그렇게 시리아와 달라?
자하: 있잖아, 우리의 감정이란 개인적인 경험이자 우리가 사물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의 반영이야. 우리는 단순히 꽃 한 송이를 보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지. 스위스는 물론 매우 푸르고 아름답지만 내가 볼 때엔 아무것도 고향의 느낌을 주지 않아. 시리아의 장미는 아름답지만 스위스의 장미는 향기 없는 플라스틱 꽃 같아. 이해할 수 있어?
나: 하지만 스위스는 위험하진 않잖아.
자하: 그래, 스위스는 안전하지. 그렇지만 오직 안전 그뿐이야. 내가 만약 여행으로 스위스에 왔다면 참 아름다운 곳이야! 하고 감탄했겠지. 그렇지만 난 여행을 온 게 아니라 살러 온 거잖아.
나: 너에게 이 곳은 오직 안전일 뿐이네 (직혀하이트 Sicherheit), 아름다움 (쇤하이트 Schönheit)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