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의 노벨 문학상은 발표한지도 몰랐을 정도로 무심코 넘어갔다. 홍콩으로 이사 온 후 새로운 곳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어서인지 다양한 분야의 뉴스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침마다 확진자의 동선까지 공개하고 있는 홍콩 코로나 관련 뉴스와 태풍이 자주 와서 학교와 관공서가 닫힐지도 모르므로 꼭 확인해야 하는 날씨 뉴스 정도나 따라가고 있는 형편이다 (오늘 태풍 3 경보가 온 것을 모르고 아이 어린이집에 갔다가 굳게 닫힌 학교의 문에 이방인 세 가정만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서양인 아빠가 데려다주는 아이, 필리핀 헬퍼가 데려다주는 아이, 그리고 나와 내 아이. 왕복 택시비는 로컬 날씨 뉴스를 보지 않은 우리의 업보겠거니).
그런데 이미 노벨 문학상 발표가 났고 그것도 꽤 화제였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동안 노벨 문학상이 여성과 시인, 미국 작가에게 야박했다는 평을 의식이나 한 것처럼 올해 노벨 문학상은 미국의 여성 시인 루이즈 글릭에게 갔다고 한다. 노벨위원회에서 전화하자 노벨 문학상이고 뭐고 지금 커피 좀 마셔야 하니 인터뷰를 2분 안에 끝내 달라고 했다는 루이즈 글릭의 태도는 그래서 더욱 이 시점에 요구되는 무심함 일지 모른다. '오스카? 그거 뭔데? 그냥 로컬 영화제잖아?'라고 했던 봉준호의 당당한 무심함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그의 손에 감독상을 쥐어 주어 가까스로 권위 있는 세계적인 영화제로 체면치레한 아카데미처럼 '노벨 문학상도 좋고 다 좋은데 나 커피부터 마시자'하는 루이즈 글릭의 일화를 굳이 노벨위원회가 공개한 것은 그들의 공정함을 홍보하고 싶은 속내가 아닐까.
그러고 보니 작년 노벨 문학상이 발표될 무렵 비엔나에 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남편이 올해 노벨 문학상은 누가 될까 어쩌고 하길래 '노관심!' 이랬다. 해마다 바람이 쌀쌀해질 때면 떡 줄 한림원은 생각도 않는데 하루키와 고은의 한일전이 벌어지곤 하다가 결국 백인 유럽 남자가 받는 게 하루 이틀 일이었던가. 비엔나에 머무는 동안 발표난 2019년의 노벨 문학상은 역시나 또 백인 유럽 남자였는데 오스트리아인이라니 궁금해져서 묵고 있던 호텔에서 제일 가까운 마리아힐퍼가 (Mariahilferstrasse)의 대형 서점 탈리아 (Thalia)에 터덜터덜 걸어가 보았다.
유모차를 끌고 2층에 올라갔다가 1층에 내려왔다가 구석구석을 다 살펴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 페터 한트케의 책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한국이라면 벌써 부지런히 밤새 작가 얼굴이 인쇄된 "한국 문학 100년의 쾌거! 노벨문학상 바로 그 작가" 식의 현수막이 제작되고 그 현수막 밑에는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야 하는데 전혀 찾을 수가 없어서 결국 점원에게 물어봤다.
"페터 한트케 책 어디 있어요?"
"여기입니다."
"네? (달랑) 이게 다인가요?"
"그는 세계적으로 그다지 유명하지 않아서 이 정도밖엔 없어요."
세계적으로... 별로... 안 유명...
이봐요, 그 사람 어제 노벨 문학상 탔다고요.
비엔나 대형 서점의 페터 한트케, 노벨 문학상 수상 다음 날
페터 한트케가 극본을 쓴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는 고등학교 때 독어 듣기 시험에 지문으로 나온 적이 있다. 너무 어려워서 반 평균이 50점대였던 시험으로 기억되는 '베를린 천사의 시'는 그 당시 특별히 와 닿지 않는 영화여서 시청각실에서 보다가 엎어져 잤던 것 같다. 영화에서 천사는 돌멩이를 만지면 인간처럼 돌멩이의 질감과 촉감, 무게를 느끼고 싶은데 그저 돌멩이의 어떤 본질, 속성, 영혼, 정수 같은 것만 느껴져서 슬퍼한다. 사실 그게 더 어려운 경지인데...... 그래서 천사는 인간이 되고 싶어 하고 인간과 사랑에 빠진다.
어떤 의미에서 그때의 나는 천사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고통의 사전적 의미는 알지만 그것을 뼛속까지 느끼지 못했다. 열등감이 있었지만 열패감의 다양한 층위까지 시리게 느끼며 깊은 밤 홀로 뒤척인 적 없었다. 사랑을 알고 싶었지만 그 마음이 간절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영화의 대사들은 나에게 남지 않고 그냥 흘러가 버렸다. 그런데 20여 년이 지나 들춰 본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나오는 사랑과 고통과 절망과 희망과 헛됨과 인생과 죽음에 대한 대사가 너무 아프고 이렇게도 절절했었나, 싶어서 깜짝 놀랐다. 다시 볼 엄두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아린 그 대사들이 어린 시절의 나에겐 전혀 아프지 않았다는 게 생경하다.
영어로 된 번역본도 없고 남아 있는 7권 중 뭘 들춰 봐도 마냥 어려운 독어여서 그냥 포장되어 있는 책 하나 집어 돌아왔다. '고요한 공간에 대한 에세이 (Versuch über den stillen Ort)'라는 책인데 언제 비닐 포장을 뜯을진 모르겠다. 페터 한트케의 밀로셰비치 (발칸 반도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소패권주의를 내세워 인종 학살을 자행한 유고슬라비아 독재자)와의 친분 때문에 전 세계의 인권단체에서 노벨위원회의 결정을 개탄하고 시끌벅적했었다는 소리를 들으니 책에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길 가다 아름답고 단단한 돌멩이를 발견해서 호주머니에 넣어 왔지만 그 돌멩이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하니 차마 보석함에 넣지 못하고 그 질감과 촉감, 무게만 느끼고 있다. 다행히 올해의 수상자는 인종 청소를 한 독재자와 친분이 전혀 없는 미국 여성 시인이니 그녀의 작품을 찾아봐야겠다. 비엔나의 느긋한 서점과는 달리 발 빠른 한국의 서점 사이트에서는 루이즈 글릭의 원서를 사면 (아직 번역본이 없다) 텀블러를 주는 행사를 하고 있다. 기가 막히게 신속한 마케팅 전략은 끼워 파는 사은품이 텀블러인 것까지 한국적인, 너무나도 한국적인 정서여서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나며 내 나라가 그립다. 그래, 이렇게 일해야지. 비엔나 서점은 호들갑스럽지 않았지만 너무 답답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