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에 있는 파울 클레 (Paul Klee) 미술관에 간 건 처음엔 '스위스에 왔으면 대표적 화가 한 명은 알아야지' 하는 마음이었지만 알면 알 수록 이 사람,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
초현실주의나 큐비즘 혹은 다른 그 무슨 사조로 분류하기 힘든, 독고다이 기질.
음악에도 재능을 지녀 젊은 시절 미술로 유명해지기 전엔 베른 시립교향악단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할 정도로 복수의 분야에서 나타난 천재성.
건축과 인테리어 디자인에 대하여 쥐뿔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바우하우스 디자인을 좋아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심지어 이 분 바우하우스 교수 역임.
봉준호가 깐느에서 황금종려상을 받기 전에 박근혜 정부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역경이 있었기에 더욱 거장의 길로 나아간 것처럼, 나치에게 퇴폐 미술로 핍박받은 고난의 시절.
거기에 화룡점정으로 지병이 너무 심해져 도저히 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을 정도였는데 가장 아팠던 죽기 전 해에 생애 가장 생산성 높은 (무려 1,253점 그림) 성과를 보인 불굴의 의지.
만화 속 영웅의 현신인가, 싶을 정도로 내 기준에선 완벽한 인간이었다.
그런데 그저 좋아하는 걸 넘어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을 가지게 된 건 그가 고흐의 작품을 보고 남긴 감상 때문이다. 파울 클레가 남긴 서신에 따르면 그는 고흐의 작품들에서 강렬한 표현 이면에 있는 '별의 연소 때문에 괴로워하는 영혼을 느꼈다'라고 한다. 영어로는 Here a brain is consumed by the fire of a star.라고 번역되어 감흥이 덜하지만 이 말을 보는 순간 '뭐..... 뭐지? 이 사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17년도에 초신성 폭발에 대한 신문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폭발한 지 불과 3시간밖에 안 된 1억 6천만 광년 떨어진 초신성에 대한 기사를. 3시간 전이건, 1억 6천만 광년 더하기 3시간이건 별의 폭발에 대한 글을 읽으니 문득 슬프고 아득해졌다. 소멸에 대한 생각을 하면 옆에 누운 사람이 측은해진다. 야멸차게 거절했다가도 등을 긁어 주고 싶어 진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소-산소, 탄소, 수소, 질소, 칼륨, 인, 황, 염소, 마그네슘 -중 수소를 제외하면 모두 별에서 만들어진 것이란다. 별이 늙어가면서 최후에 초신성으로 폭발하면서 추가로 만든 원소들이란 점에서 우리는 초신성의 분신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때론 무슨 속인지 알 수 없어 야속한 너도, 더 자주 너에게 모진 나도, 이제는 사라진 태양계 형성 이전의 초신성에서 온 것이라니...... 결국은 모두가 연소하는 별의 운명인 것을. 연소하지 않으면 괴로움이 없지만 연소해야 존재의 의미를 다하고 사라지는 것을. 그리고 너는 나이고 나는 너인 것을.
곱씹으면 아득하고 측은하고 먹먹한 이 진실을 그 기사를 읽은 이후로 2년 동안 때때로 떠올리곤 했는데 나는 무엇 때문에 아득하고 측은하고 먹먹한 것인지 막연했다. 그런데 이 감정을 별의 연소 때문에 괴롭다는 한 마디로 표현한 파울 클레에게 나는 광속으로 매료되고 말았다.
파울 클레 <달콤 쌉쌀한 섬 Insula Dulcamara>
얼마 전 갔던 로잔 공대 롤렉스 러닝센터의 사진전에서 로봇물고기 사진을 보고 인상 깊어서 찍었는데 그것 또한 파울 클레의 그림 '황금물고기'를 닮았다. 같이 간 사람이 '이거 4대 강에 띄운 거잖아, 로봇 물고기' 이래서 찍은 사진인데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복잡한 회로들을 그대로 노출하는 기계의 투명한 속내에 연약함마저 느껴진다. 그러나 정작 연약한 것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아니겠는가.
파울 클레 <황금물고기 The Goldfish>
로잔 공대 롤렉스 러닝센터의 로봇 물고기 사진
파울 클레는 '지저귀는 기계'에서 로봇 새의 절규를 표현했다. 마치 인간을 대신해서 울어주기라도 하듯 입을 뻐끔거리는 기계 새. 곧 도래할 AI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벼랑 끝까지 내몰리다가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추락하는 인간성에 대한 현 인류의 염려를, 반세기 전 이 사람이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는 게 그림에 보인다.
파울 클레 <지저귀는 기계 Twittering Machine>
살면서 파울 클레를 만나고 황금 물고기를 만나고 너를 만난다. 우연히 조우하게 되는 이런 순간들 덕에 오늘도 사그라드는 불씨를 다시 키우고 조금 더 힘내어 타오른다. 별의 연소 때문에 괴로운 나의 영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