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나는 매일 우버를 탄다 (2)
2020년 10월의 기록
by 바다에 내리는 눈 Oct 31. 2020
낯선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좌불안석이었던 경험이 있는가? 나는 말하고 싶지 않은데 상대는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일 때의 당황스러움을 느껴 본 적 있는가? 나는 이 말 저 말 걸어 보고 싶은데 상대는 묵묵부답인 적 있었는가? 하물며 그 사람과 좁은 공간에 단둘이 있어야만 할 때 어떤 생각을 하는가? 짧은 시간이지만 운명 공동체를 이루어 이 사람과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길을 선택했는데 아무리 맘에 안 들어도 중간에 내릴 방법은 없을 때 어떻게 할 셈인가?
이 모든 질문들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시공간이 우버를 탈 때다. 매일 우버를 타다 보니 정말 다양한 방식의 커뮤니케이터들을 만나고 있다. 하루는 누에라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한국 가요를 들으며 차를 모는 껄렁껄렁한 청년을 만났다. 내 성씨는 한국인의 대표 성씨 김이박 중 하나이니 우버 기사가 콜을 받을 때 뜨는 내 이름을 보고 단박에 한국인인 걸 알아본 후 반갑게 말을 건다.
"한국인이야? 나 에이핑크 팬이야!"
케이팝의 선전 덕에 한국인이라면 호감을 갖고 대하는 외국인이 간혹 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호텔에서 만난 컨시어지 직원은 "한국분이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한국어 열심히 공부하고 있지만 잘하지 못해요. 여권 주세요~. 방 여기입니다. 편안히 머물다 가세요."라며 더 비싼 방으로 업그레이드까지 해 주어 그때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케이팝 팬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오늘도 나는 케이팝에 별로 기여한 바 없이 그 수혜자가 되는가 싶어 감사한 마음으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우버 기사는 자신의 여자 친구는 씨앤블루의 팬이고 자신은 그 친구와 곧 결혼을 앞두고 있고 지금 스물여섯 살이라 한다. 소녀시대 멤버들은 이제 다 결혼을 했냐고 물어보는 그에게 아직 아무도 하지 않았다고 대답하니 놀란다. "다 서른 넘지 않았어?"하며...... 한국은 결혼을 늦게 한다고, 수도권 여성 초혼 평균 연령 만 32세, 남자는 군대 때문에 34세라고 알려 주니 한 번 더 놀란다.
"아 유 에이핑크 제너레이션? 너도 학창 시절에 에이핑크를 듣던 세대야? 요즘 노래는 들을 게 없어. 블랙핑크가 유명하다고 하지만 나는 옛날 노래가 훨씬 좋아."
무슨 제너레이션? 에이핑크라는 상큼하고 싱그러운 걸그룹 뒤에도 세대라는 말을 붙일 정도로 그들이 오래되었는가? 자기 나이랑 내 나이가 비슷해 보인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립서비스를 하는 그의 말에 '마스크로 얼굴의 반을 가려서 그런가? 허허' 이런 생각이 들며 슬그머니 마음이 열린다. 나는 에이핑크 세대가 아니라고, 훨씬 많은 나이라 하니 그가 내 나이를 무척 궁금해한다. 그렇다고 그에게 "두 유 노우 서태지?"를 할 수도 없고. 걸그룹의 조상이라는 S.E.S.도 내가 대학교 시절에 데뷔를 했다. 나는 조상이나 시조새도 아닌 케이팝 세계의 창세 전 사람인 것이다. 국민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학교에 가 보니 사춘기가 조금 빨리 온 친구들이 아침부터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몰랐는데 그 날이 소방차가 해체한 다음 날이었다.
고객 감동을 지향하는 맞춤 서비스 차원인지 그는 자신의 플레이 리스트에 있는 올드 케이팝을 틀기 시작했다. 빅뱅의 노래가 흘러나왔고 나는 주책없이 '내 친구가 빅뱅 소속사인 YG와 일한 적이 있어 나에게 빅뱅 싸인 CD를 얻어다 준 적이 있어'라고 자랑을 했다. 빅뱅의 M.A.D.E. 앨범 (2016년 발매)에 있는 노래들을 지나, 원더걸스의 노바디 (2010년 발매), 급기야 2PM의 Heartbeat (2009년 발매)까지 거슬러 올라간 그는 자신의 아이팟을 탈탈 털어도 더 이상 올드 케이팝이 나오지 않아 나에게 무척 미안한 모양이었다. 괜찮다고 웃어 주는 사이에 목적지에 도착하여 내리려는 나에게 그가 황급히 말했다.
"별점 5개 주는 거 잊지 마!"
친구가 얻어다 준 빅뱅 싸인 CD 또 다른 우버 기사는 처음에는 무척 과묵했다. 그런 그가 어떤 고가도로 위를 달릴 때 이 지역에 와 본 적이 있냐고 내게 물었다. 한 번도 없다고 하니 유명한 식당도 그럴싸한 쇼핑몰도 없어 여기 살지 않는 한 와 볼 일이 없는 지역이긴 하다며, 그렇지만 여기가 진짜 홍콩이라며 대화를 시작한다. 스위스에서 살다가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녀 본 데가 거의 없다고 하니 그가 자신도 스위스와 가까운 곳, 홀란드에서 살다 왔다고 한다. '아, 네덜란드? 나 암스테르담 가 본 적 있는데. 네덜란드 살 때 좋았어?'라고 물어보니 그가 대답한다.
"나 거기서 태어났어."
네덜란드를 홀란드라고 말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홍콩인의 외양을 하고 있는 그는 이민 2세대 네덜란드인인데 조부모와 친척들을 보기 위해 홍콩에 자주 오다가 3년 전부터는 눌러앉아 살고 있다고 했다. 나 역시 무심한 질문들을 받은 적이 있다. 파리에 있는 미국 교회에서 간식을 받는 줄에 서 있는데 간식을 나눠 주던 미국인 사모가 친절하고 느린 영어로 나에게 "이건 브라우니라는 거란다. 미국식 디저트야. 먹어 본 적 있니?"라고 해서 "나 시카고에서 살다 왔어."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한 적이 있었다. 아니, 시카고고 뭐고 미국 가는 비행기 한 번 타 본 적 없다 해도 요즘 같은 세상에 브라우니를 모르는 파리 사는 동양인 있겠냐고! 내가 초콜릿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덜 서운했지 브라우니 마니아였으면 어쩔 뻔했어.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난 사람한테 그 도시 좋아했냐고 물어본 내가 바보다.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나 뉴욕에도 있다가 지금은 홍콩에 살고 있는 그와 서울에서 태어나 이런저런 도시들을 지나 홍콩에 사는 나는 동시에 '중간에 낀 시기 (in-between period)'라는 단어를 내뱉게 되었고 나는 하마터면 '찌찌뽕'이라고 말할 뻔했다. 목적지에 다다를 쯤에야 낀 자들의 공통된 정서로 통하게 된 대화가 빠른 물살을 타고 재미있게 흘러가고 있었는데 내가 벌써 내리는 게 아쉬운지 마지막으로 그가 다급하게 외친다.
"웨스트 카우룽 파크 (West Kowloon Park)에 이번 주말에 꼭 가 봐! 집에만 있지 말고 홍콩을 탐험해!"
오늘은 자오 샹 하오, 헬로 말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우버 기사를 만났다. 그가 혼자 차 안에서 듣던 구성진 홍콩의 가락은 어느새 말도 없이 어디서 많이 들어 본 한국 드라마 OST로 바뀌어 있었고 그 전의 경험으로 인해 이건 한국인인 나를 위한 맞춤 서비스라는 걸 느낀다. 안타깝게도 그가 틀어 주는 노래들은 최신곡도 아닌데 '도깨비'인지 '사랑의 불시착'인지 어떤 드라마 주제곡인지 모르겠고, 에픽하이인지 다이내믹 듀오인지 가수를 모르겠다. 그래서 '아, 이거 그 드라마 노래죠?' 라거나 '아, 이거 그 래퍼 노래죠?'라고 화답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했고 이쯤이면 그에게 '네 마음 알겠다'는 표시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아 한국어로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진짜배기 케이팝 팬의 열정이든, 별점 5개를 받기 위해 계획된 친절이든 상관없이 나는 그에게 별점 5개를 남겼다. 웨스트 카우룽 파크는 이미 가 보았지만 한 홀란드인의 추천은 여전히 나에게 의미가 있다.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침묵 속에 잠겨 있는 마음 씀씀이도 충분히 알겠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에게 마지막 남긴 말이 그 전의 모든 대화를 지울 정도로 큰 잔상을 남긴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나도 누군가에게 마지막 남기는 말에는 진심을 담아 봐야겠다. 매일 우버를 타는 동안만이라도.
중추절 밤 웨스트 카우룽 파크의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