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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에 내리는 눈 Nov 20. 2020

[바젤] 고고학자가 되고 싶었던 간호사, 영임 (2)

길 위에서 만난 여인들

“나중에 만나면 제가 꽃을 따서 전을 부쳐 먹는 걸 알려 드릴게요.”

 선생님의 이 말 한마디에 우리가 한국이란 나라를 떠나 스위스라는 타국에 살고 있는 같은 처지라고만 생각했는데 같은 나라라도 다른 시기에 살다 왔구나, 하는 생각이 확 들었다.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나에게도 늘 존댓말을 쓰고 젊은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여 주는 어른이라 평소 세대차이를 느낀 적이 없었는데 지금처럼 유럽에서 쉽게 한식 재료를 구할 수 없을 때 양배추로 담가 먹던 김치, 씨를 한국에서 들여와 마당에서 직접 기른 깻잎, 이런 먹는 얘기를 하다가 화전을 만드는 법도 가르쳐 주신다고 하니 시골길을 걷는 소담스러운 복사꽃 같은 소녀 영임이 보였다. 나는 한국에서 살 때도 동구 밖 과수원길을 걸어 본 적이 없고 꽃을 따서 전을 부쳐 먹어 본 적 없는 서울 촌놈이라 그런지 갑자기 그녀가 살아온 시절의 내 나라는 어땠을까 궁금해졌다.


-1편에서 이어짐


나: 그 이후 바젤에서 몇 년 동안 살고 계신 거죠?


하: 38년 됐어요. 하지만 어디에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서든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가 중요한 거 같아요. 전 이 곳 사람들에게 당연히 나는 한국인이라고 말을 하고 그들에게 유럽의 단점도 말하지만 또 한국에 안 좋은 부분이 있으면 그런 부분도 비판을 해요.


나: 요즘 유럽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난리잖아요.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생각했던 나라들은 코로나에 대처를 잘 못하고 한국은 지금 방역 선진국이라 평가받고 있는데 한 때 간호사로 근무하셨었고 따님도 현재 병원에 근무하니 감회가 남다르실 거 같아요.


하: 여기 사람들 마스크 잘 안 하는 것도 여전하고 코로나가 심하게 돌지만 전 직업의식 때문인지, 한국 뉴스를 보고 한국에서 어떻게 대처를 하는지 봐서 그런지 저희 가족들에게 위생과 마스크 착용을 엄청 강조하고 있어요. 여기 사람들이 보면 유난스럽다 할 정도로 엄격하게 대처하고 있죠. 그런데 전 지금 유럽의 상황이 역사적으로 이유가 있지 않나 생각해 봤어요. 유럽은 위생이란 개념이 생겨난 지가 100년이 넘었잖아요. 한국보다 훨씬 먼저 공중위생에 대한 개념이 생겨났고 일반적으로 훨씬 더 깨끗했어요. 그래서 너무 일찍 위생 관념이 발달했다 보니 그동안에 전염병도 없었고 훈련이 안 된 거 같아요. 스페인 독감도 옛날 일이잖아요. 메르스나 사스 같은 것도 겪어 본 적 없고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도 금방 잡힐 거라고 생각하고 안일하게 대처한 것 같아요. 스위스는 걸핏하면 무슨 일이든 국민투표를 할 정도로 모든 사안을 민주적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하니 결정이 느릴 수밖에 없기도 하고요. 빨리 실천이 안 돼요.


나: 요즘 코로나 때문에 밖에 잘 못 나가시고 사람들도 못 만나는데 좀 답답하고 힘든 부분은 없으신가요?


하: 스위스가 인구 대비 확진자가 너무 많이 나오고 제 주변에도 환자들이 나오고 있어서 코로나 사태를 실감해요. 간호사를 그만두고 식당 경영할 때 데리고 있던 요리사의 부모님도 다 돌아가시고, 막내딸 직장 동료도 감염되고, 제가 출석하는 스위스 교회도 신도들 중 6명이나 양성이 나와서 닫았고요. 저희 집에서 50미터 떨어진 집의 이웃도 양성이에요. 코로나가 아주 제 곁에 가까이 왔어요. 그래도 전보다 기도를 더 열심히 길게 하는 것 말고는 전 외롭지도 않고 크게 낙담하지 않아요. 뭔가를 찾아서 하다 보면 시간이 너무 빨리 가서요.


나: 다행이네요. 젊은 사람들도 제 주변은 우울하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하: 갑갑할 때는 있지만 정원에 나가서 낙엽 쓸고 햇빛 쪼이고 일 찾아서 하다 보면 우울할 틈이 없어요.

영임이 가꾸는 정원에서 며칠 전 딸이 찍어 주다.

제가 우울하다고 느꼈던 건 인생에서 아마 스위스 처음 왔을 때 그 3개월뿐이었던 것 같아요. 길거리의 노인들이 허리가 구부정해서 혼자 걸어가는 걸 보면 내가 여기서 혼자 살다 보면 저렇게 늙어가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에 우울했었지만 그때 말고는 제 인생에서 우울에 빠져 있을 틈이 없었어요. 결혼 후에도 남편이 계속 사업한다고 해서 이런저런 일이 너무 많고 식당 경영을 거의 10년 하면서 다사다난했죠.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다 견뎌 내냐고 걱정할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하나님 말씀 읽고 기도하고 찬양하면서 하루를 보냅니다. 날마다 새 힘을 얻어요.


나: 저에게 도전이 되는 말이네요. 전 걸핏하면 우울하거든요.


하: 제가 딸에게 하는 말이 있어요. “이 세상에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다. 다른 사람에게 상담을 해도 결국은 결정을 하고 헤쳐 나가야 하는 건 너 자신인데 방황하는 시간을 짧게 줄이려면 직업 훈련하듯 우울한 시기를 짧게 겪고 탈출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제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 학교를 가기 위해선 들판의 기차선로를 지나가야 했어요. 지금은 다 전자동이겠지만 그때는 역무원이 나와서 기차선로를 손으로 방향을 바꿨어요. 길 두 개가 나 있는 것의 방향을 바꿔 주면 사람이 건너고 다시 방향을 바꾸면 기차가 건너는 거죠. 전 이걸 제 삶에 적용했어요. 계속 이 길로 가면 난 늘 똑같은 삶을 되풀이한다, 내가 기차라고 생각하고 나를 이렇게 당겨서 다른 길로 가게 하자, 이런 훈련을 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항상 이 훈련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니 제가 믿음이 좋다고 착각하진 마시고요. 전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에요. 하나님을 미워하고 원망하기도 하지만 그 미워하고 원망하는 말도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하자, 이렇게 생각하는 것뿐이죠.


예전에 첫 딸을 낳고 너무 살기가 힘들어 아파트 3층에 살았는데 창문을 열고 여기서 내 삶을 끝내는 게 낫겠다 생각한 적이 있거든요. 그래도 자살은 할 수 없으니 ‘하나님 저를 데려 가 주세요.’ 이렇게 원망하다가 무릎을 꿇고 울면서 기도하며 ‘아니다, 살아보자.’ 결심한 그런 젊은 시절이 저에게도 있었어요. 지금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다 이해는 못하지만 하나님 뜻이 계신 줄 믿습니다, 하고 극복하는 거죠.


나: 그럼 마지막으로 선생님 요즘 꿈은 뭐예요? 제가 보기에 어린 시절의 꿈은 이루셨어요. 유럽 문화를 동경해서 가서 살아 봤으면 했는데 그 시절엔 불가능에 가까운 꿈이었는데 이루어졌잖아요.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룬 사람이 많지 않으니 복을 많이 받으셨네요. 요즘은 어떤 꿈이나 소망을 갖고 계신지 궁금해요.


하: 이제는 꿈이라고 해도 뭐 소박한 거죠. (큰 꿈을 이루는) 뛰어난 사람은 세상에 드물다는 변명을 하면서 이제는 제 가정과 자식들을 위한 소박한 소망만 갖고 있어요. 먼저 제 딸들의 믿음이 계속 지켜지길 바라고...... 제 개인으로 말하면 서양 문화에 대한 첫사랑이 깨지고 동양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갖고 연구해 보고 싶었지만 꾸준하게 못했어요. 동양화를 배우려고 시도도 하고 준비도 다 했었는데 연습을 잘 못 했죠. 동양화를 다시 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제일 큰 꿈은 코로나에서 벗어나서 다시 자유롭게 예전처럼 다 함께 모여 신나게 교제하고 교회 가서 예배 볼 수 있기를 바라요. 허락하시는 데까지 살고...... 재미나잖아요, 사는 거? 그리고 갈 때는 더 큰 좋은 데로 간다, 하면서 갈 수 있기를. 아이고, 참 별 거 아닌 이야기를 길게 들어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나: 아니에요. 기차선로를 수동으로 바꾼다는 얘기가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사람이 선로를 손으로 바꾸면 위험하지 않아요?


하: 먼저 연락이 오면 나가서 바꿨겠지만 사고도 많이 났었어요. 그래도 바꿔야 하는 건 바꿔야죠! 슬럼프에 오래 빠져 있고 남이 밉고 싫을 때 그걸 선로 절단하듯이 절단하거나 과감하게 다른 길로 방향을 바꾸는 게 저한테는 도움이 많이 됐어요. 감사하게도.


나: 오늘 인터뷰 감사합니다. 나중에 받아 적으면서 제가 힘을 많이 얻을 것 같아요.


하: 아니에요 제가 감사하죠. 그렇게 살지도 못하면서...... 그게 제 소망인 거 같아요.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 그대로 살게 해 주시라고. 이거 실천 못하죠. 진짜 힘든 거죠.      


<인터뷰 후기>

 화전 부치는 법을 가르쳐 주겠노라는 그녀의 말에 시작한 인터뷰였지만 정작 그 이야기는 나올 틈이 없을 정도로 영임은 숨 가쁘게 바쁜 도시의 커리어 우먼이자 워킹맘으로 살아왔다. 최근 끝난 MBC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 환불 원정대> 편에서 20대의 화사, 30대의 제시와 함께 팀을 이룬 40대 가수 이효리는 작곡가 정재형의 노래에 이런 가사를 적었다.  


너의 길을 미리 걸었던 나

너의 맘을 잘 알고 있어

네 표정에서 나를 봤어

그저 너무 힘들지 않기를

눈물은 너무 많이 흘리지 않기를


 그 가사를 들은 50대에 막 진입한 엄정화도 갱년기라 이러는 거라며 농담인 척했지만 사실은 진심인 눈물을 흘렸다. 한 때의 화려한 톱스타 효리와 정화는 인생의 전성기에 있지만 그걸 알지 못한 채 젊은 날을 그저 바쁘게만 보내는 화사와 제시의 얼굴에서 자신들의 지난날을 보는 듯했다. 반대로 나는 영임의 이야기에서 고고학자가 되고 싶었던 소녀,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 소녀, 자존심 높고 새침한 커리어 우먼, 사랑의 아픔에 고통스러웠던 청춘을 보았다. 그 소녀가 첫아기를 낳고 힘든 초보 엄마, 하얀 유니폼과 하이힐을 버리고 물 묻은 손발로 식당에서 뛰어다니는 사장님, 낯선 땅의 들꽃이든 이름 모를 풀이든 고향의 맛과 비슷하다면 뜯어서 화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치는 억척스러운 이민자가 되기까지 스위스에서 38년의 시간이 흘렀다. 아직 그녀의 길을 다 걷지는 않았지만 나도 그녀의 맘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녀의 음성에서 내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직 현재 진행 중인 영임의 이야기를 여기까지 적을 수 있어 행운이었고 앞으로 남은 그녀의 이야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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