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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에 내리는 눈 Nov 24. 2020

[파리] 통행증 사유를 제대로 적었나요?

2020년 11월의 기록, 분노에 대하여.

 프랑스 신문을 보다가 재미있는 기사를 발견했다. 프랑스는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대도시에서 야간 통행금지 명령이 내려졌고 외출을 하고 싶으면 예외 증명서 (attestation 아따스타씨옹)를 작성해서 갖고 나가 경찰을 만났을 때 보여 줘야 한다. 예외 증명서에 적을 수 있는 외출 사유는 필수적인 것들이어야 하는데 식료품 구입이라든지 본인이 의료계 종사자라서 지금 환자를 보러 병원에 가 봐야 한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최근 브리타니 지역에서 한 남자가 밤에 차 뒤에 숨어 어슬렁거리는 것을 경찰이 발견하고 증명서를 보자고 했더니 술에 취해서도 증명서를 잘 작성해서 갖고 나왔는지 보여 주더란다. 그가 내민 증명서에 쓰인 외출 사유는 '다른 사람 얼굴을 한 대 치려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잭나이프까지 갖고 있어서 바로 체포된 그는 다음 날 총 285유로의 벌금을 내고 풀려 났다. 경찰은 "우리는 그에게 증명서 양식을 제대로 작성하는 법을 가르쳐 줬고 남을 한 대 치기 위함은 적절한 외출 이유가 아니라는 것을 주지시켰다"라고 발표했다. 이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보니 술에 취해서도 증명서에 실명과 외출하고 싶었던 진짜 이유까지 적은 보기 드문 정직한 사람이었다는 호평, 만약 잭나이프가 아니라 2미터짜리 작대기를 들고 팼으면 사회적 거리두기 룰에 저촉되지 않으니 괜찮은 거 아니냐는 농담, '정직이 최선의 방책이다'라는 옛 격언이 틀렸냐는 의문, 마크롱은 이 증명서 벌금으로 도대체 얼마를 벌고 있는 거냐며 새로운 수입원을 개발했다는 비아냥까지 주옥같아서 해학과 풍자는 우리만의 정서가 아니구먼, 하는 생각을 했다.

출처 AFP, thelocal.fr

 우습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한 이 39세 먹은 남성의 이야기가 사실 남 같지 않았다. 우리가 천상병 시인의 말처럼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거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많은 외출 시간을 우리는 남을 미워하고 한 대 때려 주기 위해 허비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이 길 위에 서 있는 이유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어야 한다. 내 입으로 들어갈 식료품을 사러 나가서 나를 살리든, 내 기술과 지식을 활용하여 환자를 돌보아서 남을 살리든, 야행성으로 활동하는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러 나가야 하기 때문이든 (동물을 사랑하는 프랑스답게 이 외출 사유는 허용된다고 한다. 길고양이들에게 매일 밤 사료를 주는 내 지인이 증명함) 어쨌거나 누군가는 살리는 일로 이 길 위에 서 있으면 좋으련만...... 불행하게도 많은 시간을 사람이나 상황에 분노하며 길을 배회하다가 어느 순간 불시에 들이닥쳐 내 인생을 점검하는 사건이나 계기가 있을 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 나는 적절치 못한 사유를 적은 통행증을 들고 헤매었구나.


 혹자는 분노가 자기 인생을 달리게 하는 연료가 되었다고, 분노에도 장점이 있다고 옹호하기도 한다. 물론 분노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 불의에 대한 거룩한 분노도 있고 경쟁심에서 촉발된 분노로 더욱 열심히 훈련하고 경쟁하여 훌륭한 성과를 내는 생산적인 분노도 있다. 하지만 많은 연구에 따르면 전자는 드물고 후자와 같은 분노는 그 효과가 단기적이고 장기적으로 보면 독이 된다고 한다. 어떤 코치들은 일부러 선수들의 화를 유발하여 몸에서 아드레날린이 많이 나와 운동을 더 잘하게 하려 하는데 사실 그 방법에 익숙해지면 선수들이 경기장 밖에서도 자신의 분노를 조절하기 어려워진단다 [1]. 또한 분노에 차면 집중하기 어려워지고 갖고 있던 재능도 잘 발휘가 안 되어 최고의 선수들은 언제나 평온하고 신경이 분산되지 않으며 상대 선수에게 도전을 받아도 화를 내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2]. 밴쿠버 올림픽에서 라이벌 선수의 선전 이후 경기를 펼쳐야 하는 부담감을 갖고 있던 김연아가 아사다 마오의 코치 타라 소바가 일부러 더 환호하고 좋아하며 펄쩍펄쩍 뛰는 것을 보고 그냥 피식 웃어 버리고 평정심을 잃지 않은 채 아무렇지도 않게 완벽한 경기를 펼쳤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말이 쉽지 우리네 팍팍한 인생살이 어디 분노하지 않기가 쉬운가? 어린이집이 돈은 돈대로 다 받으면서 코로나 때문에 문을 닫아서 화가 나고, 남편은 재택근무하는데 집에서 애가 울어서 시끄러워 화상 회의를 못하겠다고 화내고, 그래 너는 중요한 일 하는구나 아주 잘나셨다 삼시세끼 밥해야 되는 나만 무수리냐 싶어 화나고,  마스크 쓰기 싫고 손 씻기 싫은데 병적으로 손 씻기는 엄마 때문에 애도 화나고, 모두가 분노하기 쉬운 요즘이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화를 적절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극복하는 방법을 잘 몰라서 어떤 양방으로도 진단이 안 되는 Hwa-byeong이란 걸 갖고 있지 않은가. 예전에 'Anger Management', 우리말로 번역하면 '분노 관리'라는 제목의 영화가 개봉했을 때 분노를 관리한다는 개념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화는 참는 것, 억누르는 것, 내면 안 되는 것으로만 알았는데 관리하는 것이라니...... 너무 참아서 화병이 나도 안 되고 그렇다고 막 분출해서 남에게 해를 입히고 내 인생을 허비해서도 안 되고 딱 그 중간 어드메에서 적절하게 관리해야 하는데 그 중용의 도를 터득할 수만 있다면!


 도달하기 어려운 그 경지를 향해 갈 때 너무 어려워 그만 화를 참는 것에 실패한 날이나 너무 버거워 그만 물러서 혼자 삭이는 날이나 잊지 않고 싶다. 미운 놈 한 대 때려주려고 밤길에 숨어 내 시간을 허비하지는 말자. 그렇게 낭비되는 통행증 한 장도 아까운 인생, 필수적인 이유로 배회하고 싶다.




[1] Heyman, S. R. "Psychological Problem Patterns Found with Athletes, " Clinical Psychologist 39 (1986): 68-71.

[2] Collins, G. R. (1988). Christian counseling: A comprehensive guide (rev. Ed.). Dallas [u.a.]: Word Pu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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