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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에 내리는 눈 Dec 03. 2020

[뉴욕] 그냥 헤어지는 이야기 (1)

픽션 에세이

“들어가시죠, 숙녀 분.” 


 택시에서 내려 한 손에는 랩탑 가방을 들고 한 손으로는 핸드폰으로 이메일을 확인하며 호텔의 유리문으로 돌진하는 나를 위해 누군가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핸드폰 화면에 머리를 박고 있다가 콰이어의 베이스 파트를 노래하는 듯한 두터운 저음에 놀라 쳐다보니 누구라도 압도될 수밖에 없는 거구의 덩치를 가진 흑인 시큐리티 가이였다. 그 넓은 어깨와 두꺼운 가슴팍에 유니폼을 맞추느라 힘들었겠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거대한 체격이었다. 혼자 낯선 땅에서 살다 보니 밤에 집으로 걸어가는 길이 무섭지 않게 호신술이라도 배워 놔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는데 이런 사람을 보니 나도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게 된다. 신체의 절대적인 크기와 질량 차이는 호신술 같은 것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냥 당하고 마는 것이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싱긋 웃는다. 


 “오우, 삼성. 좋은 폰이지. 나도 똑같은 모델을 갖고 있었어. 얼마 전에 동네에서 털려 버렸지만.” 


 뭐, 당신 같은 거구가 동네에서 폰을 도둑맞았다고? 이 호텔 안전한 걸까? 자기 핸드폰도 못 지키는 사람이 문을 지키고 있는데...... 그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아리송하고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눈만 동그랗게 뜬 나를 안심시키듯 그는 “삼성 좋아, 아주 좋아.” 여러 번 되풀이했다. 


 그래, 이게 바로 내가 여기 오기 싫었던 이유이다. 뉴욕에서 인생은 실전이다. 미드웨스트 (미국 중서부)는 비록 1년의 반이 추워서 혹한기 훈련이라 할지라도 연습의 시간이라는 느낌이 있는데 뉴욕에서는 매 순간이 실전 같다는 느낌이 든다. 호텔의 방탄유리문을 지키는 덩치 좋은 흑인 사내도 자기가 사는 할렘에서 덩치 작은 꼬마가 총을 들이대면 핸드폰을 뺏기고 마는 곳이 뉴욕이니 나 같은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 학회에 등록을 해 놓고도 올까 말까 꽤 망설였다. 경제가 어렵다고 학교에서 나오는 출장 예산은 점점 깎여 가는데 좀 더 큰 학회를 참석하려면 이런 작은 규모의 지역 학회는 건너뛰는 것이 현명했을 텐데 이미 논문 발표를 하겠다고 등록해 놔서 어쩔 수 없이 오고 말았다. 그나마도 학회장인 미드타운의 힐튼 호텔에 묵기엔 가격이 부담되어 뉴욕 (New York)이 아닌 뉴악 (Newark) 근처에 호텔을 잡고 기차를 타고 뉴욕 시내까지 오가는 중이었다. 사실상 나는 뉴욕 출장이 아니라 뉴악 출장을 온 셈이다. 뉴욕에 온 행세를 하지만 잠은 뉴악에서 자는 형편이 미국 박사라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지금 내 신세 같아서 쓴웃음이 나온다. 


 학계 사람들이 대부분 참가하는 큰 규모의 국제 학회라면 일을 시키는 사람들도 발표를 마치고 호텔 라운지에서 거나하게 취해 수다를 떨고 있어서 밤에 쉴 수 있을 텐데, 이 학회에 와 있는 건 우리 과에서 지금 나뿐이니 이메일함에는 계속 일을 재촉하는 이메일이 쌓여 간다. 논문 발표 세션을 마치고 나면 시내에서 유명하다는 스테이크 식당도 가 보고 컵케익도 먹어 보려 했는데 지극히 사무적이고 건조한 지도교수의 이메일에서 마치 “지금 한창 진도를 나가야 하는 학기 중에 그런 마이너 콘퍼런스에 가서 뭐 하는 거야?”라고 질책하는 음성이 들리는 듯하여 그냥 호텔로 돌아왔다. 그래, 뉴욕에 왔어도 늘 그랬듯이 또 작은 방으로 숨어 들어가야지 뭐. 그게 내 팔자인가 보다. 


 오늘 발표 세션에서 얻어 온 명함들과 자료들을 호텔 방 책상에 던져 놓고 그중 하나의 명함을 응시한다. 몇 년 전에 나와 같은 학교에서 수학했던 선배의 명함이다. 그녀는 동부 명문대에 교수로 가서 벌써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이번 작은 지역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하여 실적을 쌓겠다는 욕심보다는 학계에서의 입지를 다지고 인맥을 만들기 위해 참석한 듯했다. 내가 논문 한 편을 완성시켜 이력서에 한 줄 보태는 것을 목표로 할 때 선배는 벌써 그런 단계는 지나고 학계에서 인맥을 만들어 학회 운영진이 되는 게 목표라니 그녀와 나 사이의 간극은 벌어져도 한참 벌어져 있었다. 동부 지역 학회에서 중서부에 사는 나를 만난 게 의외라는 듯 반기며 그녀가 하이톤의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와, 이게 얼마만이야? 왜 통 연락이 없었어? 남자 친구도 잘 있지?”

 “아, 잘 있겠죠.”

 “그게 무슨 소리야?”

 “뉴욕에 있는 회사에 취업했어요.” 


 군대 동기들이 그렇다던가. 2년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해서 서로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 전역하는 날 끌어안고 울며 ‘사회에 나가 우리 꼭 다시 보자, 자주 연락하고 살자’ 약속하지만 그게 끝이라고, 서로의 힘든 시절을 버팀목이 되어 주었지만 군대를 벗어나서도 보게 되지는 않는다고. 그건 유학생들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나와 전 남자 친구, 그녀는 셋이서 꽤 자주 어울렸다. 미국 학생들은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지만 우리는 한국에서부터 몸에 밴 습관으로 도서관에서 서로의 자리를 맡아 주기도 하고, 담배 피우지 않는 사람도 흡연자가 ‘담배 타임’이라고 불러 내면 그 핑계로 같이 내려 가 커피를 마시며 낄낄대고, 주말엔 동네 공원에서 바비큐 그릴을 하기도 했다. 예전엔 미국 사람들이 먹지 않는 기름기 많은 부위라 삼겹살이 거의 거저였는데 한국인들이 유학 나와서 그렇게 찾고 먹어 대서 어느새 삼겹살 가격이 한국만큼 비싸졌다는 얘기를 하며 고기를 굽고 “나중에 졸업하고 직장을 잡으면 공원의 공용 그릴이 아니라 내 그릴을 사서 내 집 테라스에서 삼겹살을 굽고 싶어.”라는 공통의 소원을 나누었다. 그렇게 어울렸던 셋 중에서 바비큐 열기가 날아갈 마당이 딸린 집의 널찍한 테라스에 홈쇼핑에서 새로 산 그릴을 놓고 사는 사람은 그녀뿐이다. 난 아직도 집에서 요리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마 그도 그럴 것이다. 작은 뉴저지 변두리 반지하 방에서 삼겹살이라니, 당치도 않지.


 우리가 혹한기 훈련을 같이 받은 병사들이라서 훈련이 끝난 후 소원해진 것은 아니다. 다만 그녀에게 연락하면 필시 남자 친구의 안부를 묻고 자연스럽게 우리의 미래를 물어볼 테니 그와 헤어진 후 내가 그녀에게 연락을 끊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언제나 사려 깊었던 그녀답게 남자 친구는 뉴욕에 취업을 했고 나는 아직 중서부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더 이상의 질문이 없다. 우리는 다른 화제들을 이야기했다. 그녀의 새 직장과, 새 집, 새 잔디 깎는 기계, 하우스 오너가 되면서 강제적으로 생긴 새로운 취미 생활인 가드닝 같은 것들에 관하여. 우리가 애써 피한 화제는 그녀가 그리워했을 학교 근처의 식당들, 공원, 도서관, 캠퍼스 안의 호수와 같은 공통의 추억이었다. 그를 불러 내지 않고 그것들을 얘기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힘겹게 모든 그리운 것들을 피하고 알맹이 없는 대화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껍데기 같은 대화를 이어가느라 신경을 너무 쓴 나머지 그녀도 나처럼 피곤함에 나가떨어져 지금쯤 집에서 멍하게 새로 산 소파에 앉아 있을까?


 지도교수가 보낸 이메일을 제대로 읽어 보니 단순 문서 작업이 아니라 통계를 다시 돌리고 꽤 큰 사이즈의 데이터를 보내야 할 작업이었다. 초고속 인터넷은 하루에 14불을 내야 이용 가능하다는 호텔의 장삿속이 괘씸해서 느린 무료 와이파이로 버텨 보려 했는데 데이터를 보내려면 어쩔 수 없이 초고속 인터넷 옵션을 사야겠네,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또 습관적인 초라함이 나를 덮쳤다. 뉴욕이 아닌 뉴악이긴 하지만 4성급 호텔에 묵으면서 비즈니스 슈트를 입고 출장을 다니고 학회에서 영어로 발표를 하고 뭔가 바쁘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현실은 아직 14불을 호기롭게 쓸 수 없는 처지일 뿐이다. 


 어째서 너와 나의 신세란 이런 것일까. 그도 누구나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회사에 취직했지만 뉴욕의 살인적인 물가에 돈을 번다고 해서 신세가 학생 때와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심지어 나의 지인은 하버드 로스쿨을 나온 변호사인데도 회사에 걸어서 출근하기 위해 맨해튼의 비싼 아파트에 사느라 다른 변호사 3명과 함께 넷이서 룸 쉐어링으로 산다는 말을 들었다. 어릴 때에도 기숙사에서 룸메이트와 함께 살면서 부딪히는 게 싫어서 혼자 사는 걸 선호했던 나는 그 얘기를 듣고 ‘학위가 있어도, 돈을 벌어도 오히려 삶의 질이 다운그레이드 되는데 뉴욕에서 성공하는 게 다 무슨 의미가 있냐’고 그에게 물었고 그는 내 말을 듣고 내가 뉴욕에 놀러 와 묵을 때를 생각했는지 룸메이트 없이 혼자 사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자니 신입 사원 월급으로는 뉴저지 변두리의 반지하 방이 최선이었다. 그가 이사 간 후 처음으로 자기가 어떻게 사는지 보러 오라고 해서 놀러 갔을 때가 떠오른다. 반지하 방바닥에 프레임도 없이 놓인 이케아 더블 사이즈 매트리스는 우리 둘이 눕기에 비좁고 눅눅했다. 고장난지 오래되어 보이는 벽걸이 에어컨을 고쳐 달라고 연락하니 뉴욕에 산지 30년째인 교포라는 집주인은 에어컨 얘기는 하지 않고 여자 친구가 와서 오래 묵는다면 혼자가 아니라 2인이 사는 걸로 간주해서 집세를 더 올려 받아야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뿐이었다. 제법 똑똑하고 당차다고 생각되던 그도 뉴욕의 회사에서 하루 종일 치열하게 싸우느라 모든 전투력을 다 써 버렸는지 집주인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에어컨 하나 못 고쳐 내는 그에게 실망했는지, 볕이 잘 들어오는 1층 방에 퀸 사이즈 매트리스 정도도 장만해 놓지 않고 나를 부른 그에게 실망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점점 말을 잃었다. 그 짧은 주말 내내 반지하 방의 습기가 모여 강물이 되어 우리 사이에 흘렀다.


 뉴욕에서 돌아와 변함없이 하던 일을 하고 일상을 사느라 그에게 살갑지 못했던 것뿐인데 그는 내게 무슨 변화를 느꼈나 보다. 자신도 하루를 끝내고 집에 오면 지쳐 나에게 잘 자라고 문자 한 번 보낼 수 없었으면서 그는 왜 나만 변했다고 생각한 것일까? 


 뉴욕 사람들은 내가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걷는다. 오늘 낮에 학회에서 만난 선배 역시 임신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나보다 더 빠르게 가벼운 참새처럼 종종걸음으로 이동하면서 수다를 떨었다. 한 손에는 커피잔을, 한 손에는 학회 일정을 담은 책자와 무거운 랩탑 가방을 들고 그녀를 따라잡느라 헐떡이는 내게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미안, 내가 너무 빨리 걸었지? 참, 나도 모르게 이렇게 되었다니까. 처음 이사 와서 지금 사는 집을 사기 위해 돌아다닐 때 부동산 아주머니가 너무 빨리 걸어서 나는 집을 다 보지도 않았는데 ‘자, 다음 집으로 가시죠.’라고 해서 힘들었는데. 어느새 나도 동부에  오래 있다 보니 걷지 않고 항상 뛰어서 이동하고 있더라고.” 


 비는 시간 전혀 없이, 허투루 낭비되는 동선 없이 살아가느라 바쁜 실전 속에 있는 그에게 나는 차마 전화 좀 자주 하라고 칭얼댈 수 없었다. 반지하 방에서 내가 오길 기다리는 그에게 날 보러 비행기를 타고 주말마다 중서부로 올 수 없겠냐고 물을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뉴욕의 속도로 뛰어가고 나는 미드웨스트의 속도로 머물러 있는 가운데 우리는 알고 있었다. 이 사랑이 어떤 형태인지 모르지만 다음 단계의 모양으로 넘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뉴욕, 밤, 불빛.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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