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 에세이
호텔방 창문에 달린 두꺼운 암막 커튼을 걷어 내고 창가에 서 보니 멀리 뉴욕 시내가 보인다. 뉴악에서 뉴욕이 그렇게 먼 것은 아니구나. 호텔 웹사이트의 설명이 거짓은 아니었어. 분명히 거기 쓰인 대로 나는 뉴욕 시내가 보이는 시티뷰의 좋은 방을 받았네. 저 도시의 어느 작은 오피스 흔들리는 불빛 속에 그가 있겠지.
“결혼하자. 뉴욕에 오면 너도 쉽게 일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여기 학교는 많잖아.”
변해 가는 우리의 관계에 지쳐서 헤어지는 대신 그가 제시한 해결책은 결혼이었다. 지금 떨어져 지내서 그런 거라고, 자기가 너무 바빠서, 내가 너무 추운 데에 있어서 그런 거라고 믿고 싶은 모양이었다. ‘프러포즈의 이유가 나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뉴욕에 오면 나도 쉽게 일을 찾을 수 있을 거 같아서라니, 그게 말이 돼?’ 나는 전화기에 대고 화를 버럭 냈다. 나도 적법한 비자를 갖고 나름대로 내가 속한 곳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영주권을 받기 위해 위장 결혼을 하는 불법 이민자처럼 단지 뉴욕에 가서 살기 위해 너와 결혼을 하란 소리로 들린다고 억지를 썼다. ‘그런 뜻이 아닌 걸 알잖아’라고 그는 나를 달랬지만 절대로 ‘사랑해’라고 하지는 않았다. 괜히 결혼 얘기를 꺼내서 아무 일 없이 잘 굴러가고 있던 우리의 장거리 연애를 삐걱거리게 만든 그가 원망스러웠다. 그 전에는 전화도 자주 하지 않아 싸울 일이 없었는데 결혼 말이 나온 이후로 우리는 계속 부딪혔다. 아직 반지하 방에 사는데 어떻게 결혼을 하냐는 말로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고, 이제껏 모은 돈과 부모님의 도움으로 조금 더 나은 환경의 월세 방으로 옮길 수 있다는 그의 말에 그렇게까지 너에게 부담을 주면서 지금 우리가 합치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단 말로 내 자존심을 세웠다. 오래된 영화 ‘그린카드 (1990)’ 속의 두 남녀는 서로 티격 대다가 위장 결혼을 하면서 오히려 사랑에 빠졌는데 우리는 진짜 결혼을 하려다가 싸우고 헤어졌다.
그래, 사실은 이게 내가 여기 오기 싫었던 이유이다. 남자 친구를 보러 오고 싶어서 뉴욕에서 열리는 학회에 등록을 해 놓고 헤어져 버리는 바람에 이제는 굳이 머무는 비용이 비싸기만 하고 별로 유명하지 않아 이력서에 써 봤자 도움 안 되는 학회에 오고 싶지 않았던 거다. 뉴욕에 오면 삶이 실전 같아서, 계속 연습게임 같은 삶을 살고 싶어서 오기 싫었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가 있는 뉴욕 땅에 혼자 선 나 자신을 보는 게 무서웠다.
사람은 하루에 몇 번 거짓말을 하는지 관찰해 보면 연구에 따라 다르지만 하루 세 번부터 많게는 200번까지 거짓말을 한다고 한다. 아까 학회장에서 마주친 선배와의 공허한 대화에서 짐짓 괜찮은 척, 그의 존재를 입에 올리지 않기 위해 애쓴 시간 동안 내뱉은 말들도 사실은 다 거짓말이다. 새 직장, 새 집, 새 잔디 깎는 기계, 새 바비큐 그릴, 곧 태어날 새로운 생명까지 나는 그녀의 모든 성취에 아낌없이 축하의 말을 보냈다. 하지만 열등감과 시기심을 억누르고 힘겹게 축하한단 거짓말을 한 죄, 오랜 인연과 추억을 없던 것 취급하며 말하지 않은 죄, 한 번 새 집에 꼭 놀러 오라고 사회적 지능 (Social Intelligence) 높은 그녀가 던진 빈 말에 아기 옷을 사서 꼭 놀러 가겠노라고 빈 말로 화답한 죄...... 이렇게 지독한 말잔치를 벌인 죄를 어떻게 사함 받을 수 있을까.
그와 나의 관계가 꼭 이렇게 작은 뉴악의 호텔 방, 뉴저지의 반지하 셋방, 맨해튼 도심 속 사무실처럼 비좁고 답답하지만은 않았다. 그의 반지하 방을 탈출해서 우리는 넓디넓은 센트럴 파크에서 배를 탔었다. 물이 있는 곳에서 배가 보이기만 하면 그는 꼭 타고 싶어 했다. 작은 보트에 나를 태우고 본인이 노를 저을 때 제일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힘들 테니 같이 노를 젓자고 해도 내가 귀부인이라도 되는 양 노에 손도 못 대게 해서 ‘너 사실은 이 물살을 가로질러 네 맘대로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 신나는 거지?’라고 일부러 내가 변죽을 울리면 사람 마음도 몰라 준다고, 자기가 봉사할 수 있는 기회라 신나는 거라고 농담도 할 줄 모르면서 웃기는 소리를 했다. 한낮의 땡볕 아래서 혼자 노를 젓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 그의 옆으로 돈을 몇 불 더 지불하면 사공이 노를 저어 주고 관광객은 앉아서 구경만 하면 되는 곤돌라가 쌩하고 속도를 내어 지나가도 우리는 우리만의 속도에 만족하며 천천히 센트럴 파크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거리의 악사, 하프, 청둥오리, 비둘기, 웃는 여자들, 커피를 들고 서서 얘기하는 사람들, 아이들, 아이스크림 카트, 무릎베개를 하고 누운 사람, 프리스비 (frisbee 원반 장난감)를 날리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수면에 비친 구름과 낙엽과 그와 나. 상대방이 힘들까 봐 노를 쥐어 주지 않고 서로 자기가 젓는 방향으로 나아가자고 설득하는 어리석은 연인들의 얼굴.
나와 헤어질 수 없어 차라리 결혼하자고 했던 그가 어떻게 나 없이 하루하루 잘 살아 나가고 있을까. 그와 결혼할 수 없어 차라리 헤어지자고 했던 내가 왜 이리 하루하루 그 없이 힘들까. 저 많은 건물들 사이로 점멸하는 하나의 불빛이 그가 내게 보내는 신호도 아닌데 뚫어지게 창 밖만 바라보다가 다시 암막 커튼을 쳤다. 초고속 인터넷 요금 하루 14불도 사치, 후회도 미련도 10분이 넘어가면 사치, 지금 나에겐 돈도 시간도 부족하다. 그래서 아직 시간이 없어 차마 그를 놓지 못하고 있나 보다. 이미 실전에 들어간 그는 상실 후 고통과 맞서 싸우고 있을 텐데 나는 뉴욕 땅에 이제야 와서 혼자 뒤늦게 이별을 연습하고 있다. 이건 그냥 평범한 연인들이 헤어지는 과정이다. 나만 힘들 것도 특별할 것도 없다. 다시 통계나 돌리고 데이터를 만져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