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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에 내리는 눈 Nov 20. 2020

[바젤] 고고학자가 되고 싶었던 간호사, 영임 (1)

길 위에서 만난 여인들

“나중에 만나면 제가 꽃을 따서 전을 부쳐 먹는 법을 알려 드릴게요.”

 선생님의 이 말 한마디에 우리가 한국이란 나라를 떠나 스위스라는 타국에 살고 있는 같은 처지라고만 생각했는데 같은 나라라도 다른 시기에 살다 왔구나, 하는 생각이 확 들었다.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나에게도 늘 존댓말을 쓰고 젊은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여 주는 어른이라 평소 세대차이를 느낀 적이 없었는데 지금처럼 유럽에서 쉽게 한식 재료를 구할 수 없을 때 양배추로 담가 먹던 김치, 씨를 한국에서 들여와 마당에서 직접 기른 깻잎, 이런 먹는 얘기를 하다가 화전을 만드는 법도 가르쳐 주신다고 하니 시골길을 걷는 소담스러운 복사꽃 같은 소녀 영임이 보였다. 나는 한국에서 살 때도 동구 밖 과수원길을 걸어 본 적이 없고 꽃을 따서 전을 부쳐 먹어 본 적 없는 서울 촌놈이라 그런지 갑자기 그녀가 살아온 시절의 내 나라는 어땠을까 궁금해졌다.


나: 예전에 말씀하셨던 화전 만드는 법 알려주세요, 하면서 쓸데없는 소리로 청했는데 이렇게 흔쾌히 인터뷰 응해 주셔서 감사해요.


하: 아니에요 영광입니다. 그런데 제 얘기가 무슨 가치가 있을까 싶네요.


나: 저희끼리라도 깊게 알아 가는 기회로 삼으면 되죠. 그럼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하: 저는 이름은 하. 영. 임입니다. 근데 사투리가 섞여 나오는데 제가 좀 자연스럽게 얘기해도 되는 거지요?


나: 그럼요, 어디 출신이세요?


하: 제 고향은 경상남도 진주예요. 부산에서 두 시간 떨어져 있는 남쪽 중부 지방이죠. 아직 큰 오빠 가족과 저보다 10살 어린 막내 여동생도 진주에 살고 있어요. 거기서 태어나서 스무 살까지 살다가 진주 간호학교를 나와서 부산 대학병원으로 근무를 하러 갔어요. 한국에 방문할 땐 서울에 가기도 하지만 전 원래 시골 사람입니다.


나: 어릴 때부터 간호사를 꿈꾸셔서 간호학교를 가신 거예요?


하: 아니에요. 원래 꿈은 신문기자나 고고학자였어요, 아키올로지스트 (Archaeologist), 맞죠? 9살 많은 큰 오빠가 예전 유명한 '사상계'나 소설 등 책을 진짜 많이 갖고 있어서 오빠 없을 때 몰래 빼서 읽으면서 제가 책을 정말 좋아했어요. 부모님이 근처 친척 집에 데려가면 친척 집에는 읽을 책이 많지 않으니 ‘엄마 빨리 집에 가자’, 책 읽게 집에 가자고 할 정도로...... 책벌레라는 별명을 달고 다녔죠.


나: 책을 좋아해도 고고학자를 꿈꾸는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닌데 어떻게 고고학자가 되어 볼까 생각을 하셨어요?


하: 요즘같이 컴퓨터, IT 기술이 있는 게 아니라 그 당시엔 미디어라고 해 봤자 라디오가 전부고 할 게 없으니 우리 세대는 책을 많이 읽은 편이에요. 그러면서 서양 책을 많이 읽게 되잖아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고 그리스, 이태리 문화에 빠지게 되고 유럽에서 유물이 발굴됐다는 신문 기사를 읽으면 관심을 갖고 ‘나도 이런 직업을 갖고 싶다’, 생각을 했죠. 호기심이 많았던 거 같아요. 언젠가는 유럽을 가리라, 이런 꿈을 꿨었죠.


나: 책 사랑이 고고학자 꿈으로 그렇게 이어지는 거군요.


하: 그래서 결국 유럽을 왔죠. 제일 처음 우리나라와 서독이 계약을 맺었을 때가 박정희 대통령과 뤼브케 대통령 때죠. 60년대 말에 우리나라가 해외 차관을 끌어 오려고 노력할 때 신문에 유럽에 대한 소식이 많이 나왔거든요. 그때 파독 간호사를 모집한 거죠. 제가 부산 대학병원에서 제일 먼저 신청해서 왔어요. 그때 가기로 결정되고 사표를 내니까 당시엔 한국에서는 장학생이나 외교관 정도 제외하고는 외국을 나가는 사람들이 극히 드물 때니까 부산대 병원에 소문이 나서 병원장께서 저를 불러 당부를 하시더라고요. 외국에 나가서 우리나라 국민으로서 처신을 잘하고 본인이 우리나라 대표라고 생각하라고. 그 정도였어요. 그만큼 외국 나가는 일이 특별한 일이었으니까...... 상상이 가실지 모르겠다.


나: 그때 지원하고 면접 보고 그런 과정을 거쳐 나오신 거예요?


하: 그럼요. 병원 기숙사에 흰 종이에 ‘파독 간호원 모집’이라고 공고가 붙어 있더라고요. 그걸 보고 신청을 했어요. 69년도부터 지원을 시작해서 모든 과정을 다 마치고 70년 1월에 나왔어요. 부산에서 일부러 나이트 듀티 (Night duty, 밤 근무)를 하고 아침에 비행기로 서울에 가서 소양 교육과 독일어 교육을 2주 동안 받았어요. 북한 사람이 접근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반공 교육도 받고.


나: 그때는 지금과 달리 한 번 외국에 나가면 한국에 잘 못 들어오고 연락도 하기 힘들 땐데 두려움은 없으셨어요?


하: 두려움은 없었어요. 20대 때니까 유럽을 간다고 생각하니 정말 신났죠. 유럽의 화가, 작가, 클래식 음악 등을 원래 좋아했고 그걸 직접 접해 볼 수 있는 기회니까 이걸 절대 놓치면 안 된다, 되도록이면 빨리 가자, 이런 마음뿐이었어요. 제가 보기엔 얌전하고 평범한 인상이지만 속은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찼었거든요. 그때 한국에서는 간호사들이 교사보다 월급이 높고 이미지도 나이팅게일, 이런 좋은 이미지라 여자로서 굉장히 좋은 직업이었어요. 그런데 한국에서의 그런 지위를 버리더라도 빨리 나가고 싶었어요.


나: 부모님께는 파독 간호사 지원할 때 말씀 안 드리고 다 결정이 난 다음에 말씀하셨나요?


하: 의논하지 않고 제가 결정을 한 거죠. 뒤에 고향에 가서 말씀을 드리니 가족회의를 하더라고요. 처음엔 다들 반대했죠. 결혼할 나이에 어딜 가냐는 입장이 대세였는데 큰 오빠가 교사였는데 마음이 열린 사람이었어요. 프랑스 여자랑 펜팔을 할 정도로 외국에 대한 관심이 많고. ‘3년 계약이니까 일단 다녀와라. 3년 후에는 꼭 들어온다.’는 조건으로 나가게 해 주라고 부모님을 설득해 주었죠. 전 일단 나가고 싶으니 3년 후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했고. 그때 어머니가 당부를 했어요. “절대 외국인하고 결혼하면 안 된다!”


나: 하하하 (*선생님은 스위스 사람과 결혼하셨다). 그럼 70년도에 출국할 때 몇 명이 나온 거죠?


하: 그때 서독이 전쟁을 치른 지 20년도 안 됐는데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경제가 엄청 부흥해서 잘 살 때니까 전세기로 우리를 데리러 왔어요. 100여 명을 싣고 전세기가 출발했는데 그중 88명 정도가 마인츠 대학 병원으로 갔어요. 프랑크푸르트로 간 사람들도 있었고. 저는 마인츠 대학병원에 7년을 있었어요. 저의 목적은 여행과 견문 넓히기에 있었으니 월급 탄 걸 전부 다 길에 뿌렸어요. 여행 다니고, 클래식 판 사 모으고, 오케스트라 공연 보러 가고, 오페라 보고, 이렇게 스물아홉 살까지 신나게 다녔어요.


나: 마인츠에서 근무할 땐 힘들지 않으셨어요? 파독 간호사 다큐멘터리 보면 처음에 와서 많이 울었다, 힘들었다, 하던데 선생님은 여행 다니고 콘서트 다니시고 행복하셨던 거 같아요.


하: 저는 뭐 엄청 신났었죠. 전 원래 잘 울지 않는 사람이에요.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 극복할까 그 생각부터 하지. 한 번 화장실에 들어가서 울컥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근무 중에 울면 표가 나니까 많이 울진 않았죠. 사실 처음 6개월은 고생을 좀 했어요. 한국에서부터 의료계니까 독어도 쓰고 독어 수업도 들어서 언어 문제로 힘들었던 것은 아니고 한국 대학 병원과 독일 병원이 근무 시스템이 많이 다르더라고요. 독일에서는 환자를 돌보는 돌보미, 요즘 식으로 말하면 간호조무사 역할을 해야 했어요. 물론 차팅 (Charting), 오더 받으면 시술하고 약 주고 그런 것도 하긴 했지만 일체 손에 주사를 못 쥐게 하는 거예요. 근육주사만 허락되고 인투라베너스 (Intravenous), 정맥주사 피 뽑고 이런 건 의사만 할 수 있는 거예요. 그게 저희로선 처음에 뜬금없고 뭔가 직업적으로 수준이 하락된 느낌이 들어서 충격을 많이 받았죠.


그 대신 좋은 점은 한국에 있을 때 미국식으로 수준 높게 배우고 일한 덕에 한국 간호사들이 실력이 좋으니 독일 병원에서 저희를 좋아했어요. 예를 들어 의사들이 스파이럴 펑션 (Spiral funciton 척수액 추출)이라고 적어 놓기만 하면 저희가 그걸 읽고 환자를 침대에 앉혀 놓고 소독된 기구 진열해 놓고 의사가 와서 딱 하기만 하면 되게 준비를 시켜 주니까 의사들이 좋아하죠. 새로 인턴이 오면 의국장이 한국 간호사들 뒤만 따라다니면 된다고 할 정도로 우리를 인정해 줬죠. 환자들도 우리를 좋아하고. 저를 보고 한국 사람이냐고 물어보면서 자기 어머니가 병원에서 한국 간호사에게 돌봄을 받고 한국 간호사들 칭찬을 많이 했다고 말하는 독일인도 있었고. 그래서 한국 간호사들은 책임 있는 자리에 빨리 승진을 하는 편이었어요.

마인쯔 대학병원 같은 병동에 근무하던 동료들과의 성탄 파티에서 영임 (가운데)

나: 다큐멘터리를 보면 슬픈 이야기가 많이 나오잖아요. 한국에서 20대 야리야리한 간호사들 가서 덩치 큰 독일 환자 돌보다 너무 힘들어서 울고,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에선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대우받다가 독일에서는 허드렛일만 시켜서 너무 힘들었다고 그런 부분만 강조되는 것들을 봤었어요.


하: 돌아가는 시스템이 다른 걸 어쩌겠어요. 처음엔 내가 간호사인데 돌아다니면서 밥 나눠 주고 이런 거에 거부감이 있을 수 있죠. 왜냐하면 그 당시에 한국은 보호자들이 와서 환자를 돌보고 밥을 해 주고 씻기고 그랬거든요. 한국에서는 흰 유니폼에 캡 쓰고 하이힐 신고 그렇게 근무했었는데...... 독일에 가니 보호자가 병원에 같이 못 있는 시스템이고 저희가 밥차에서 밥 빼서 나눠 주고 침대 만들어 주고 다 해야 하는 거예요. 한국에선 전혀 하지 않던 일들을요. 처음엔 그래서 거부감이 들었지만 그 현실을 어떻게 소화시키느냐, 그게 중요하잖아요.  


그게 환자들에겐 좋은 일이란 이해했어요. 제가 덩치 큰 환자를 돌보고 침대를 만들 때 힘들어하면 의사들이 진료하다가 멀리서 보고 달려와서 내가 도와줄게, 하면서 같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너무 감동 먹었어요. 역시 환자를 돌보는 일은 귀천이 없구나. 의사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고 간호사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고 보호자가 할 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는 환자의 전체를 돌봐 주어야 하는 거구나. 우리 엄마들이 아이를 돌볼 때 예뻐하기만 하고 냄새난다고 기저귀 안 갈아 주면 큰일 날 거 아니에요? 전 그래서 독일 사회가 뭔가 다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나중에 하나님을 믿고 보니 꼭 그 의사가 기독교인은 아닐지라도 사회 전체에 스며든 기독교 정신이 이런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나: 병원이란 환경에서 내가 주인공이 아니니까 내가 힘들어도 환자에게 좋은 방식이면 좋은 거다, 이렇게 관점을 바꾸니까 그 일이 덜 힘들고 괜찮아졌다는 거군요.


하:  제가 겪은 독일 사람들의 관점은 그랬어요. 관공서에 가도 말단 직원이 자리에 없어서 제가 멀뚱멀뚱 서 있으면 멀리서 팀 라이터 (Team Leiter, 팀장)가 보고 뛰어 와서 뭘 도와줄까, 물어보고. 대학병원 회진할 때도 치프 (Chief) 교수가 창문 밖 공사장에서 시멘트 나르는 아이가 자기 아들이라고 자기가 돈 벌어 나에게 손 벌리지 않고 산다고 아주 자랑스럽게 얘기해서 저는 깜짝 놀랐죠. 그 당시 한국이랑은 사고방식이 많이 달랐어요.

"그 시절 독일 사람들은 우리에게 정말 좋게 대접해 주었어요." 친한 독일 가정의 초대를 받고 함께 찍다.

나: 그러면 마인츠에 7년 있다가 한국에 들어갔다가 다시 유럽으로 나오신 건가요?


하: 네. 한국에 돌아와서 1년은 푹 쉬었어요. 어릴 때 경주 수학여행 정도 제외하고는 한국을 여행한 적이 없어서 1년은 취직하지 않고 산악회에 등록해서 배낭 메고 지리산도 다니면서 신나게 놀았어요.


나: 마인드가 유럽 식이시네요. 갭이어 (Gap year), 사바티칼 (Sabbatical)이라는 개념이 아직도 한국에는 흔하지 않은데 그 당시에 용기가 있으셨네요.


하: 저는 결정은 늦지만 한 번 결정하면 용기 있게 밀고 나가는 타입이에요. 그리고 우리 직업이 예나 지금이나 취직이 잘 되는 직업이니까 그렇게 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연속성이 없어도 전문직이니까 디플롬 (Diplom)만 있으면 언제든 다시 일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제가 출세를 하고 싶다는 야심이 있었으면 계속 경력을 쌓았겠죠. 그게 아니고 그냥 직업으로 맡은 환자들 열심히 돌보고 월급 받는 것에 만족하며 살기로 한다면 1, 2년 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나: 독일에서 한국으로 다시 갈 때는 그럼 '독일 생활 너무 지긋지긋해, 싫어' 이런 마음으로 가신 건 아니고 그냥 좀 쉬고 싶어서?


하: 7년 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이태리, 그리스, 영국, 북유럽 등등 다니다 보니까 약간 현실 인식이 달라지더라고요. 열심히 독일 신문도 읽고 TV도 보고 하면서 그 나라 유머 코드도 이해하고 농담을 던질 정도로 외국인 치고 독일어를 상당히 잘한다고 동료들이 그랬거든요. 독일 문화를 많이 경험하고 적응하고 나니 유럽 문화에 대한 실망이라기보다는...... 뭐랄까 처음의 호기심, 그 문화를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품은 동경이 사라지는 걸 느꼈어요. 그리스 로마 문화에 대한 동경이 커서 그리스어까지 배웠을 정도였는데 말이죠. 결국은 이들의 문화도 그냥 다양한 문화 중 하나일 뿐이고 동양이 뒤처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눈에 보이는 화려함에 압도될 수 있겠지만 그게 다가 아니고 눈에 보지지 않는 동양의 사상과 문화도 내가 동양인으로서 무시 못하고 비중 있게 공부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스 로마 문화 좋아하듯 고대 중국 문화를 좋아하기도 했었고요. 그래서 ‘아, 유럽을 떠날 때가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게다가 어머니도 전화할 때마다 결혼은 언제 할 거냐고 독촉하시고요. 주위 친구들 보기 부끄럽다고, 딸이 무슨 하자가 있는 것 아니냐고 한다고.


그래서 한국으로 들어갔는데 어머니의 독촉이 계속되고 지긋지긋하더라고요. 제가 부산이나 서울에서 혼자 살았으면 어땠을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80년도만 해도 결혼도 안 했는데 여자가 따로 사는 것은 안 된다고 해서 진주 부모님 댁에 있었더니 결혼 안 한 노처녀에 대한 핍박이 너무 심한 거예요. 게다가 근무할 때 가만히 있어도 주변에서 소개해 준다는 사람도 너무 많고 유혹도 많고 스트레스가 심했어요. 그래서 아예 떠나자, 결심한 거죠. 모범생의 삶을 벗어 버리고 유럽 나가서 ‘내 인생을 즐기자,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면서 야하게 개방적으로 살자!’ (웃음) 이렇게 결심하고 스위스로 떠난 거예요.


그때 결혼도 안 하고 그러고 있느니 차라리 다시 유럽으로 나오라고 바젤에 있는 후배가 연락을 했어요. 후배한테 가겠다고 해 놓고도 반년을 넘게 못 나갔어요. 다른 직장 같으면 안 오는 걸로 여기겠다 했을 텐데 반년 동안 바젤 대학병원에서 저에게 편지를 세 번이나 보내면서 빨리 오라고 해서 결국 스위스로 나오게 되었어요.  


나: 그것도 참 운명이네요.


하: 그 당시 한국에서 여자가 서른네 살이 되도록 미혼으로 남아 있는다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었어요. 주변에선 다들 깜짝 놀랐어요. 서른다섯이 다 되어 가는데 또 외국으로 나갈 생각을 하냐고 용기가 대단하다며 환송 파티를 해 주더라고요. 뼈는 어디에 묻을 거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고요. 그때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 말아야지, 스위스에 뼈를 묻어야지 그런 결심도 없었어요. 뒤에 생각하면 좋은 사람을 놓쳤다 싶은 일이 있었어요. 한 남자 때문에 문제가 좀 있어서 괴로운 마음에 ‘일단 한국을 탈출하자!’ 그 생각이었죠.


나: 연애 문제가 있으셨던 거예요?


하: 네. 그 방법으로 하나님이 저를 재촉하셨던 거 같아요.


나: 그럼 한국에서는 교회를 나가지 않고 바젤에 와서 교회를 나가시게 된 건가요?


하: 아니에요. 처음엔 아니었어요. 바젤 대학병원에 남편이 목사인 사람이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저를 계속 교회로 초대를 하고, 다른 친구도 집에 초대해서 가 보면 구역예배예요. 그러면 저는 믿지 않는 사람이니까 싫어서 예배 안 보고 '옆 방에서 애들이랑 놀아 줄게', 하고 도망을 쳤어요. 그런데 이렇게 하도 반항을 하니까 아마 하나님이 극적인 방법을 쓰신 것 같아요.


처음 바젤에 와서 매일 악몽을 꾸고 아주 힘들더라고요. 제가 멘털이 강하다고 생각했는데도 첫 3, 4개월 동안은 정말 힘들었어요. 아마 지금 돌이켜 보면 그게 우울증 상태였던 거 같아요. 진주 공군 병원에서 근무했을 때엔 월급도 많고 사람들도 외국에서 온 여자니까 신기해서 대우를 잘해 주니 신이 났었죠. 그런데 바젤에서는 처음에 일도 하기가 싫고 힘들었어요. 일 자체가 힘든 게 아니라 ‘내가 왜 또다시 여기 왔지? 한국까지 갔다가 왜 또 왔지?’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자꾸 비행기 놓치는 꿈을 꾸는 거예요. 아마 한국을 떠난 걸 후회한 거겠죠. 그래서 이민가방 25kg짜리를 밤에 싸 놓고 그다음 날 아침에 출근하곤 했어요. 오늘 버티면 집에 와서 보따리 들고 한국으로 간다, 생각하면서. 왜냐하면 처음 2개월은 수습 기간이라 그냥 계약 해지를 할 수 있거든요. 그렇게 출근해서 일하고 집에 돌아오면 ‘또 그럭저럭 하루 버텼구나, 한국에서 잘 가라고 환송파티까지 열어 줬는데 창피해서 어떻게 2개월 만에 가, 그래 하루만 더 버텨 보자’ 하면서 또 그다음 날 출근을 하고......


4월에 한국을 떠났는데 3개월쯤 지나 7월 말에 마음이 참 괴롭더라고요. 전에 사귀었던 사람 생각도 나고 여러 가지로 심경이 복잡한 날이었어요. 낮 근무를 하고 저녁 8시쯤 기숙사로 돌아오는데 방문을 열기 전에 갑자기 누가 내 머리를 확 누르는 느낌이 들어서 무릎을 꿇어 버렸어요. 아마 그때 성령이 역사하신 거 같아요. 주님은 생명으로 통하는 향기가 있다고 고린도 후서 2장에 나오잖아요? [1]


누가 향수를 어디에 뿌렸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온통 향기가 진동하고 그 후로 그 향기가 저를 계속 따라다니고 예수님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잘 모르지만 기도도 하게 되고요. 마인츠에서 옆집에 목사님 부부가 살아서 몇 번 체면 상 교회에 따라나가 본 적은 있었지만 전도되지 않았고 공군 병원에 근무할 때는 장교로 와 있는 군목이 저를 전도하려고 했지만 제가 거부했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제가 먼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이번 주 일요일부터 교회에 나갈게’라고 한 거예요. 그 주일에 스위스 교회에 들어서자마자 눈물이 쏟아지더니 끝날 때까지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울기만 했어요. 교회에서 나오니까 세상이 달라 보이고 제 마음에 있던 한국에서부터 따라온 부담들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어요. 그렇게 저는 믿게 된 거예요.


나: 인생에서 전기를 맞이한 사건이 있었나 여쭤 보려고 했는데 아마 이게 그 사건이 될 수 있겠네요?


하: 예. 이렇게 극적으로는 변하지 않더라도 모태신앙이나 온순한 성격으로 평탄한 삶을 살아 가시는 분들도 누구나 예수를 믿으면 어떤 식으로든 삶이 뒤집어집니다.  


2편에서 계속.


[1] 고린도후서 2장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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