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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에 내리는 눈 Dec 18. 2020

싸우지 않는 커플 대화법

'그랜드 디자인'에서 배우다

 어렸을 때 한 두 살 때까지는 주택에 살았다고 하는데 전혀 기억이 없고 기억이 나는 한 나는 늘 아파트에서만 살아온 도시 사람이다. 귀촌은 먼 미래의 일인 줄 알았는데 벌써 내 친구들 중에 전원주택을 지어 사는 이들도 있다. 오히려 애들이 어린 이 시기에 자연과 가까운 전원주택에 살고 나이 들면 병원 가까운 도시에서 살아야 한다나. 그렇지만 부모님이 옥상에 꾸민 작은 정원도 관리가 힘들어 결국은 눈물을 머금고 다 파헤쳐 보내고 인조 잔디를 깔아 버린 것을 보며 나는 절대 주택을 짓거나 정원을 가꾸는 것은 꿈도 꾸지 말아야지, 다짐한 바가 있다. 돈 주고 조경한 것을 또 돈 주고 없애다니 이 무슨 낭비인가. 게다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살아 있는 것들이니 그것들과 이별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파트가 아닌 '집'에 대한 로망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인테리어 디자인과 건축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즐겨 보는데 넷플릭스에서 처음에는 곤도 마리에의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를 보았다. 파리의 작은 아파트에 살면서 어떻게든 비좁은 공간 활용하는 게 최대 고민이었던 시절에 미니멀 라이프와 정리에 꽂혀서 무수히 내다 버리고 남 주고 쓸고 닦고 했던 것 같다. 부평초 인생에도 장점이 있어서 해외 이사를 할 때마다 고민만 하고 끌어안고 있던 물건들을 과감히 버릴 수 있다. '이 예쁜 쓰레기를 과연 프랑스에서 스위스까지 갖고 갈 가치가 있는가?' '아웃렛이 아닌 백화점에서 정가를 다 주고 샀다는 이유로 잘 입지 않는 코트를 한파가 없는 홍콩까지 들고 갈 것인가?' 이런 질문들을 해 보면 대답은 대부분 '아니오'여서 쉽게 정리가 가능하다. 그렇게 집 안에서 시작된 관심이 집 밖으로 확장되어 나중에는 인테리어 디자인뿐 아니라 건축에 관한 영상들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넷플릭스의 '그랜드 디자인'은 그중에서도 제일 독특하고 재미있는 시리즈다.

 집값 비싼 영국에서 용감하게 자기 집을 짓겠다고 나선 사람들과 그들의 특이한 집들을 소개하는데 처음 땅을 산 직후의 허허벌판부터 보여 준다. 그리고 2년이 걸리든 10년이 걸리든 (단 한 집도 예외 없이 처음 계획보다 오래 걸려 완공한다) 그 과정을 따라가면서 마침내 완성된 집을 보여 주는데 나야 건축에 문외한이고 실제로 집 짓기를 실행에 옮길 만한 배짱도 없으니 집 그 자체보다는 지어 나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어려움을 건축주가 풀어 나가는 방법,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살 사람들에 주목하여 보게 된다. 여유 자금이 풍부한 사업가 가족이 시간을 들여 멋지게 지은 골프장 속의 일본식 클럽하우스 같은 집도 있고, 자급자족 라이프 스타일의 대가족이 10년 동안 지은, '반지의 제왕' 영화 속 호빗족이 살 것 같은 모양의 시골집도 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본 에피소드는 젊은 커플이 지은 협소 주택 에피소드와 어린아이 둘이 있는 가족의 집짓기 에피소드다.

 동거 중인 젊은 커플 조와 리나는 웨스트 런던의 원룸에서 비싼 월세를 살고 있는데 이러느니 차라리 집을 짓자, 하고 이스트 런던에 정말 작은 평수의 땅을 산다. 진행자가 놀랄 정도로 좁고 길기만 한 그 땅에 3층짜리 협소 주택을 짓는 게 이 커플의 목표다. '그랜드 디자인' 시리즈에서 턱없이 작은 예산에 큰 포부의 청사진을 가진 주택을 짓겠다고 하는 경우는 대부분 남자가 전문가다. 이 경우에도 조가 디자인 엔지니어라 직접 많은 부분을 담당해서 비용을 아낄 수 있다며 자신 있게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여자 친구 리나는 "우리가 같이 살 집을 만들다니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우리는 같이 가정 (home)을 만드는 거예요! 흥분돼요."라고 응원한다. 이 스웨덴 아가씨는 등장할 때마다 상대방을 긍정하는 말을 한다.


 "나는 집 짓는 재주가 없지만 다행히 조가 그런 재주가 있죠."

 "상황이 계획대로 안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이 들긴 하지만 나는 조를 믿어요. 다 잘 될 거예요."


 지하 토대 공사가 제대로 안 풀려 공사가 늦어지고 돈도 많이 까먹으니 리나는 자기도 무력감을 느끼고 힘들 때가 있다고 하지만 한 번도 남자 친구를 비난하지 않았다. 나 같으면 벌써 '어이구 이 화상아, 네가 다 알아서 한다며? 전문가라며?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애초에 왜 그런 지반도 약하고 이상한 땅을 샀어!' 하며 조의 재능을 의심하고 이제 와 어쩔 수 없는 초기의 선택까지 거슬러 올라가 비난하는 발언을 했을지도 모르는데 리나는 자신의 감정은 솔직하게 털어놓지만 상황이 힘든 것이지 상대방이 그 상황을 초래한 게 아닌 이상 책임을 상대방한테까지 전가시키지 않았다. 이 얼마나 현명한 사람인가. 그렇게 리나의 대화법에 감탄하고 있는데 그다음 장면 진행자의 말에 나는 악, 소리를 지를 뻔했다.


 "조, 당신은 이 프로젝트에 전념하기 위해 직장도 그만두고 완전 여기에 올인했으니 이제는 당신이 이 현장의 보스네요? 리나가 혼자 벌어서 당신을 지금 서포트하고 있는데 기분이 어때요? 아니, 리나가 보스라 해야 하나?"


 그래도 직장은 그만 두면 안 되지, 절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아직 결혼도 안 한 사이니 혹시 이러다 헤어지는 거 아닌가.


'몇 달 후'


 자막과 함께 공사 중인 집에서 초췌한 몰골의 조가 쓸쓸히 나오며 '이젠 저 혼자네요. 그녀는 떠났어요.' 이런 장면으로 전환될까 봐 걱정했는데...... 웬걸, 리나는 "저는 그냥 조가 꿈을 좇기를 격려할 뿐이에요. 조가 직장을 그만두자마자 더 행복해졌거든요, 왜냐하면 이 집을 짓는 게 그가 꿈꾸는 일이니까."라고 말한다. 심지어 조의 부모님이 살고 있는 집을 담보 잡혀 빌린 돈으로도 예산이 모자라 리나가 자신의 저축액을 집 짓기에 털어 넣는다. 사실 조가 좀 더 튼튼한 창문, 좀 더 에너지 효율성이 좋은 난방 설비 같은 것에 욕심을 내지 않았으면 리나의 돈까지는 넣지 않아도 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차 살 때 프라이드 사려다가 '프라이드가 생각보다 비싸네? 이 돈이면 이왕에 조금 더 보태서 아반떼로' 하다가 아반떼가 그랜저 되고, 그랜저가 외제차 된다는 '이왕에 병'에 걸린 조는 처음 계획에 없던 사소한 것들에 집착하게 되고 결국 예산 초과로 리나의 저축까지 집 짓기에 쏟아붓게 된 것이다. 그때 리나가 하는 말이 걸작이다.


 "전 그를 사랑해요. 그래서 그가 어떤 부분들에 있어서 타협해야 해서 괴로워하는 걸 알 수가 있었죠. 저도 집에 대한 요구사항이 있지만 집이 다 완성될 때까진 기다릴 거예요."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성경 속 말은 알지만 진짜 이렇게까지 사랑의 힘이 위대한 줄 몰랐다. 진행자의 말마따나 스스로 자꾸 허들을 만들어 위기에 봉착하고 공사 기간을 늘어지게 만든 조인데 그런 면을 완벽주의자의 타협하지 않는 정신으로 해석해 주는 리나 덕에 조가 멋있어 보일 정도였으니까. 멋진 파트너는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거란 걸 결혼 전에 이미 알고 있는 리나에게서 나는 긍정의 대화법을 배웠다.


 혹자는 아직 애가 없으니  힘들어서 서로에게 너그러울 수 있는 거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음 에피소드에 나오는 커플은 남자 애들 둘을 키우는 마이카와 일레인 부부다.

 역시 이 경우도 남자가 건축가이다 보니 자신만만하게 아주 작은 예산으로 네 식구가 살 집을 짓겠다고 한다. 살던 집을 팔고 땅을 샀기 때문에 당장 살 곳이 없어 애들을 데리고 개조한 캠핑카 (Cabin Caravan 캐빈 카라반)에 살면서 말이다! (당연하게도) 공사가 예정보다 길어져 임시 거처에서 애들이랑 추운 겨울을 보내야 되게 생겼는데 일레인이 좁은 싱크대에서 설거지하고 있으면 옆에서 마이카가 '오늘도 쥐 나왔어?' 물어보는 장면이 나올 정도로, 도시인인 내가 보기엔 임시 거처가 너무 열악해 보였다. 그래도 일레인은 마이카가 소년 시절에 처음으로 지은 농장 헛간 사진을 부엌 벽에 붙여 놓고 그걸 보면서 참는다. 지금 이 현실의 고생이 무엇을 위해서 하는 건지 미래의 소망을 상기시켜 주는 장치가 필요하다며. 다소 냉소적인 유머를 구사하는 진행자가 그 헛간을 보면 오히려 이런 사람한테 집 짓기를 맡겨도 될까 의문이 들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디스 할 정도로 어설픈 구석이 많고 낡고 무너져 가는 헛간인데 일레인에겐 그 헛간이 희망이다. 아마 마이카는 아내가 붙여 놓은 사진을 보며 그녀가 자기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 느꼈으리라.


 공사 비용을 아끼기 위해 대부분의 작업을 퇴근 후에 혼자서 하고 있는 마이카를 돕기 위해 일레인도 밖에 나와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캄캄한 공사 현장에 랜턴을 비춰 준다. 그 장면에서 내 머릿속에 자동적으로 드는 생각 하나.


 '애는 누가 씻기고 재웠나?'


 내가 저녁 하면 남편이   먹이고, 남편이 애와 놀아 주는 동안 나는 설거지를 하고, 남편이 애를 씻기는 동안 나는 집을 치우고, 다 씻고 난 애 로션 바르고 잠옷 입혀 재울 동안 남편은 운동을 하거나 회사에서 갖고 온 일을 하는 게 우리 부부의 루틴인데 여기서 하나라도 내가 더하고 네가 덜하면 부아가 돋는다. 남을 더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자기 이익을 포기하는 적극적인 의미의 '사랑'을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만 애쓰는 '비이기주의'에 빠져 버린 여느 커플과 같이 우리도 같이 살면서 서로 자기가 더 희생하고 살아간다, 내가 더 아량을 베풀고 있다 생각하는 '아량 싸움 망상증'에 걸린 것 같다 [1]. 그래서 하루 종일 일하고 들어와서 고단한데 밤에 돌멩이 하나씩 일일이 벽에 붙이고 있는 마이카도 힘들겠지만 남편이 퇴근했어도 여전히 혼자 애들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것까지 다하고 추운 밤에 따라 나온 일레인이 대단해 보이는 거다. 나 혼자 이 많은 일을 했다고 생색내지 않고, 묵묵히 상대방의 캄캄한 앞길에 랜턴 하나 비춰 주며 빛으로 존재하는 배우자. 이게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었는데 한 번도 도달하지 못했고 사실은 그 정반대의 모습일 때가 많다.


 시간이 흘러 드디어 공사도 끝이 보이는 가운데 마이카와 일레인은 아직 실내가 다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일단 새 집에 입주하게 된다. 셋째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셋째 임신이라니...... 임시거처 캐빈 카라반에서 셋째를 만들다니 정말 금실이 좋은 부부다. 시부모님이 '일레인이 임신 중이라 이제 힘든 일은 못하겠네?'라고 하니 일레인은 그래서 부엌 벽에 붙일 나무 조각들을 색칠하는 전담이 되었다고 대답하고 옆에서 마이카가 '그거 칠하면서 꾸벅꾸벅 존다니까요.' 농담을 던져서 화면 속의 모두가 하하하, 웃는데 나는 그 상황이 전혀 웃기지 않았다.


 - 일단 임신 중인 며느리가 힘든 일은 못할 것이라고 시부모는 지극히 사실을 기술했을 뿐인데 그 말이 거슬리고,

 - 일레인이 부엌 타일 조각 색칠은 하고 있다고 변명하듯 말해야 하는 것도 맘에 안 들고 (페인트는 친환경이겠지? 임신 중이면 냄새에 민감한데)

- 임신 중에 얼마나 피곤하고 잠이 쏟아지는데 그걸 놀리는 마이카가 어이없어서 화가 나려고 함


 그러나 당사자도 웃는데 내가 뭐라고 화를 내겠는가. 타인의 말을 꼬아 듣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설령 무슨 숨은 의도가 있다 한들 무슨 상관이랴, 웃어 넘기기. 자칫 미묘해질 수 있는 상황이 싸움으로 발전하지 않은 것은 일레인의 대화 수용 방식이 담백하고 유머러스하기 때문이다.


 '그랜드 디자인'의 이 두 에피소드에서 커플들이 지은 것은 특이하고 아름다운 집이 아니다. 투지와 신념으로 쌓아 올리는 벽돌을 이해와 양보로 미장하여 두 사람은 하나의 가정을 건설한다. 이런 가정을 건설한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갓물주'라 불려도 손색없겠다. 어젯밤에도 티격대 놓고 할 말은 아니지만 나도 상황에 관계없이 상대방을 긍정하고 내가 한 일을 생색내지 않으며 서운한 말은 담백하게 듣고 웃어넘기는 대화를 하고 싶다.


덧붙이는 말: 내가 여자라 여자들의 화법에 주목하게 된 것이지 남자는 어떻게 말해도 여자만 참으면 안 싸운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쓴 것은 아니라는 걸 밝혀 두고 싶다. 게다가 이 남자들은 공사에 몰두하느라 에피소드 내내 별 유의미한 말을 안 한다.


[1]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C.S. 루이스 지음, 김선형 옮김, 홍성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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