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들의 최애 장난감은 기차다. 예전 어린이집 원장한테 버스, 기차 이런 거 환장한다고 했더니 그 나이엔 바퀴 달린 거면 다 좋아해 (wheels) 이래서 아, 얘도 그냥 그 많은 어린이들 중 하나구나 싶었다. 어느 정도 좋아하냐면 갑자기 뜬금없이 '엄마?' 하고 나를 불러서 대답하면 '... 기차?' 이럴 때가 있다. 할 말이 없는데 말은 걸고 싶을 때 '그냥 불러 봤어' 대신에 한다는 소리가 '기차'다. 자기 전에 쉴 새 없이 재잘대는 아이를 다 받아주다가 더 이상은 안 되니 이제 자라고, 네가 무슨 말을 해도 엄마는 대답 안 할 테니 너도 조용히 하라고 하면 가만히 있다가 엄마가 자는가 보려고 한다는 말이 '엄마? 엄마?...... 기차?'
이러다 이 녀석, 나중에 기차 오타쿠로 성장하고 연애를 하는데 헤어지기 아쉬운 순간에 '잠, 잠깐!... 기차?' 이러며 상대방을 붙잡는 건 아닐까? 인간이 대화를 하다 보면 가장 좋아하고 아끼고 24시간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주제가 부지불식 간에 입에서 튀어나오는 걸 얘를 보며 체감한다. 만나기만 하면 집값 얘기를 하는 사람, 눈 뜨자마자 주식부터 들여다보는 사람, 입만 열면 정치인 찬양하는 사람, 무슨 고민을 털어놔도 교회 안 다녀서 그렇다고 교회 가자고 하는 사람, 내 생일이라 만났는데 축하는 안 하고 자기 자식 자랑만 하는 사람, '내가 예전에 말이야~' 하며 현재 대신 왕년만 얘기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보며 별로 이상하다고 생각도 못했다 (저 중에 나는 없다고 하기가 양심에 걸린다). 그저 어른들의 대화란 이런 거겠니 했는데 모든 대화에서 수식어를 지우고 아이처럼 한 단어로만 말하자고 했을 때 '엄마?... 부동산?' '엄마?... 주식?' 이러면 좀 서글플 것 같다. 나도 아들의 기차처럼 빈칸에 채울 아름다운 단어들을 찾고 싶다. 홍콩에 있을 동안 수묵화를 배워서 그림 얘기를 하고 싶고, 교회 건물 같은 껍질이 아니라 본질인 하나님에 대해 얘기하고 싶고, 봉사와 기부를 더 해서 내 아들 말고 다른 아이들 얘기를 하고 싶고, 어색한 순간에 어떤 정적도 따뜻하게 깰 수 있는 사랑을 얘기하고 싶다.
어쨌거나 이러니 나까지 강제로 기차 만화 '토마스와 친구들'의 팬이 됐다. 영상 하나만 보게 해 줄 테니 골라 보라고 하면 아들의 선택은 항상 토마스다. 1984년부터 영국에서 방영한 이 만화 시리즈의 원작은 기차 마니아였던 성공회 사제 윌버트 오드리가 아들 크리스토퍼에게 잠자리에서 기차 이야기를 해 주다가 만든 동화라고 한다. 원작자가 기차 마니아인 만큼 동화인데 증기 기관차 캐릭터들이 현실감 있고 철도와 열차에 대한 고증이 확실해서 교육용 콘텐츠라는 평가까지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만화의 주제가를 듣다가 각 기관차 캐릭터를 소개하는 부분에서 '아 영국인들이란!' 하고 피식 웃었다.
Thomas, he's the cheeky one James is vain but lots of fun Percy pulls the mail on time Gordon thunders down the line Emily really knows her stuff Henry toots and huffs and puffs Edward wants to help and share Toby, well, let's say, he's square
토마스 귀여운 장난꾸러기 제임스 재미있는 멋쟁이 퍼시 약속을 잘 지켜요 고든 바람처럼 빨라요 에밀리 아는 것이 많아요 헨리 언제나 씩씩해 에드워드 마음씨가 착해요 토비는 착한 네모 얼굴
둥근 얼굴을 가진 토마스와 친구들
한국어판 주제가는 어떻게든 동심을 깨트리지 않기 위한 노력의 흔적이 보인다. 토마스는 장난꾸러기는 맞는데 원래 가사에는 '귀여운'이 없고, 제임스는 좋게 봐줘서 멋쟁이지 좀 허영심이 강하고 자만심이 많은 (vain) 기차고, 결정적으로 토비는 Toby, well, let's say, he's square (토비? 글쎄, 걔 얼굴이 네모나)를 '착한 네모 얼굴'이라고 번역했다. 원래 가사에서 다른 기차들은 장난꾸러기든 아는 것이 많든 약속을 잘 지키든 허영심이 많든 어쨌든 고유한 성격을 성실하게 소개해 준다는 느낌이라면 토비는 너무 묻혀 있는 캐릭터라서 성격은 잘 모르겠고 그냥 생긴 게 다르다는 걸로 대충 소개를 뭉개고 넘어간 느낌이다. 가사의 'well, let's say'는 할 말 없을 때 하는 전형적인 필러 (filler)니까. 주변인도 좀 챙겨 주지, 주제가에서조차 소외되는 것 같아 토비에게 감정이입이 되면서 섭섭했다. 영국인들의 유머 감각은 현실적이고 잔인할 때가 많아서 (사실 그래서 영국 유머를 좋아한다) 어디서 저런 걸 배우나 싶었는데 만화 주제가를 보니 조기교육의 결과인가 보다. 혹시 웃자고 하는 소리에 나만 죽자고 달려 드나 싶어 검색을 해 봤는데 미국 최대 온라인 커뮤니티 중 하나인 레딧닷컴에서 이런 밈 (Meme)을 찾았다.
출처 레딧닷컴 reddit.com
"작가가 당신에게 개성을 주지 않아 사람들이 너를 그냥 네모라고 부를 때"라는 문장과 섭섭한 토비의 표정을 보니 내가 생각한 그대로가 이 밈 하나에 담겨 있다. 나처럼 토비를 측은하게 여기는 사람이 또 있었구나 싶어 반가웠다. 거기다가 여기 달린 댓글들을 보니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을 짚어 준다.
'오 토비, 너는 그것보다 훨씬 많은 걸 가지고 있어.'라고 위로하고 '뭐 어떤 거... 네모난 거?'라는 시니컬한 댓글이 달리자 '걔 지붕이 살짝 둥글어.'라고 변호해 주는 사람.
'제임스는 거만해도 재미있다니. 그럼 재미있으면 자기중심적이어도 된다는 거야?'라는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
'그래도 토비가 헨리보다는 낫지. 헨리는 빵빵대고 씩씩대요, 라니? 다들 그러잖아!' 토비는 네모라는 특징이라도 있지, 헨리는 칙칙폭폭 대는 다른 기관차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이 너무 평범하게 소개된다고 분통 터뜨리는 사람.
출처 레딧닷컴 reddit.com
곰곰이 생각해 보면 토비는 착한 네모 얼굴이라는 번역은 토비가 진짜 착해서 착하다고 한 게 아니라 한국에서 어떤 사람에 대해 서술할 때 할 말이 없으면 '사람은 착해'라고 하는 현실의 반영일지도 모르겠다. 직장에서 착한 사람이라고 하면 업무 능력이 떨어지거나 남에게 이용당하는 사람이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 같고, 소개팅에서 어떤 사람이 나오는지 궁금하여 주선자에게 물어봤을 때 착하다고 하면 얼굴이나 집안, 직업 같은 게 별 볼일이 없는 것 같다. 어쩌다가 착하다는 말은 이렇게 변질되었을까?
누군가 평범하고 네모난 나를 만나고 나서 '얼굴이 네모라 마음이라도 착한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더라' 하지 않고, 내 평범함을 상쇄시키거나 위로하려고 착하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착해서 착한 네모라는소리를 들었으면 좋겠다. 내가 앞으로 어떤 글을 쓰게 된다면 둥근 얼굴들만큼이나 네모 얼굴도 공들여 창작하리라. 이도 저도 안 되면 성의 없이 네모 얼굴을 소개하는 노래에 서운한 이 마음이라도 잊지 말아야지. 모든 네모들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