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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에 내리는 눈 Dec 23. 2020

[오스틴] 고양이 손님

2010년 12월의 기록

 결혼하고 한동안 남편과 떨어져 살았다. 남들은 주말 부부, 월말 부부라도 하지 우리는 겨울 방학과 여름 방학에만 한 달씩 만나는 방학 부부였다. 꽤 오래 연애를 했지만 그래도 결혼 후 처음 같이 맞는 겨울이니만큼 방학을 오매불망 기다렸다. 운 없으면 9월 말, 보통은 10월부터 눈이 오기 시작해서 4월에야 눈이 그치는 시카고를 탈출해서 따뜻한 텍사스로 빨리 도망가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시카고에서 하루는 각종 방한 용품으로 전신을 완벽히 가리고 앞은 봐야겠기에 눈만 내놓았는데 앞이 흐릿하니 안 보여서 눈곱이 낀 줄 알고 장갑을 벗고 눈을 비벼도 또 금방 흐릿해져서 손거울을 꺼내 보니 영하 20도 추위에 속눈썹이 얼어서 거기에 아주 작은 결정이 달린 거였다. 와, 속눈썹에 고드름이 맺히다니! 닿는 것마다 황금으로 변해 버리는 마이더스의 손, 거짓말을 하면 길어지는 피노키오의 코, 힘의 원천인 삼손의 머리카락, 사람을 홀리는 세이렌의 목소리처럼 나도 고드름이 맺히는 속눈썹을 가져서 동화나 신화 속 인물로 승격된 것 같아 신기하기는 개뿔, 독수공방 추위가 지긋지긋했던 신혼 시절이었다.


 2010년 12월 13일, 내가 살던 곳에는 시속 47km의 강풍이 불었나 보다. 시베리아 벌판처럼 눈보라가 몰아 쳐 작은 스튜디오의 홑겹 창문이 떨어져 나갈 듯 우는데 나의 세계, 나의 우주, 나의 모든 것 전기장판까지 사망했단다 (당시 정말로 전기장판 밖으로 나가지 않고 그 안에서 공부하고 밥 먹고 자고 모든 일을 다 했었다). 그때의 좌절감은 내 트위터에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어 다시 읽어 보니 12월에도 영상 20도까지 올라가는 홍콩의 아파트에 앉아 이 글을 쓰면서도 갑자기 으슬으슬해진다. 어쨌든 그런 시카고를 벗어나 드디어 남편이 있는 오스틴에 가서 멕시코 음식과 마가리타를 실컷 먹으며 더운 겨울을 보내던 중이었다. 


겨울 동네 사람인 나에게 오스틴은 이런 천국

 집 밖에서 야옹야옹거리는 소리가 나서 눈을 들어 창문 밖을 내다보다가 회색 고양이와 눈이 딱 마주쳤다. 애견인인지라 고양이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부드러운 회색 털의 이 고양이가 러시안 블루 종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 너 거기 있구나, 하고 스윽 고개를 돌려 다시 하던 일을 하려는데 고양이가 눈까지 마주쳤으면서 왜 안 나오냐는 듯 자꾸 야옹야옹 불러냈다. 할 수 없이 물과 집에 있던 간식거리를 들고나가 줘 봤는데 잘 먹지도 않고 나만 졸졸 따라다닌다. 누가 잃어버린 건지, 그냥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마실묘인지 알 수가 없어서 이렇게 놀아 주기만 할 게 아니라 주인을 찾아 줘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 '너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하고 몇 번이나 단단히 일러 놓고 집으로 들어왔다. 아파트 사무실 전화번호를 찾는데 처음 와 보는 남편 집이니 어디에 전화번호가 있는지 모르겠고, 아파트 회사 이름도 기억이 안 나고, 물어볼 남편도 집에 없어서 그냥 한참 소득 없이 집 안에서 종종거리다가 문을 열어 보니 고양이가 가고 없다. 가 버릴까 봐 불안해서 수시로 문에 달린 작은 구멍으로 내다볼 동안 가만히 앉아서 나를 기다리는 듯했는데 그 새 사라졌다. 


 그때부터 나의 고뇌가 시작되었다. 정말 잃어버린 고양이였으면 어쩌지? 이 동네에 고양이 잃어버린 사람이 있는지 검색해 보니 여러 고양이 찾는 광고 중에 하나 딱 떨어지는 게 나온다. 사진이며 주소며 아무래도 이 고양이 같은데 광고가 게재된 시점이 4개월 전이라 설마 4개월 동안 주변을 어슬렁거렸으면 못 찾았으랴 싶어 연락하기가 망설여졌다. 


 한국에서 교회 다닐 때 일이다. 교회 복도에 아이들과 청년들이 모여 있는 걸 보고 웬일인가 해서 가 보니 작은 장 속에 토끼가 갇혀 있었다. 귀엽다고 이 사람 저 사람 만지고 난리였다. 평소에는 넓은 데에서 키우고 그 날만 작은 장에 갇힌 건지 몰라도 깡충깡충 뛰어다녀야 할 토끼를 손바닥 네 뼘쯤 되는 장 속에 넣어 놓은 게 너무 안 되어 보였다. 게다가 이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어 만지고 괴롭히니 얼마나 스트레스받을까 싶어서 누가 키우는 건지, 그 날만 데려 온 건지, 여기 사는 녀석인지 알아보고 싶어도 교회의 집사님, 전도사님, 목사님, 마을장님 하여간에 무슨 님 자 들어가는 사람은 아무도 모르고 그냥 조용히 교회만 오가는 처지라 물어볼 데가 없어서 용감하게 교회 홈페이지에 적힌 대표 이메일 주소로 메일을 보냈다. 그러고 나서 다음 주일에 가 보니 토끼장은 사라지고 없었다. 어떻게 된 사정으로 교회에 있던 토끼인지, 후속 조치는 어떻게 하겠다든지 하는 답장도 받은 것이 없는데 말이다. 토끼가 이제 스트레스받지 않고 넓고 안전하고 쾌적한 곳에서 잘 있으려니 생각하고 싶어도 마음 한 구석이 개운하지 않고 찝찝했다. 사라진 토끼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괜히 교회에서 잘 키워 보려던 토끼가 나 때문에 더 안 좋은 곳으로 가게 된 건 아닐까? 동물은 사랑하지만 절제를 모르는 20대의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마치 기업에 항의 메일 보내듯 따져 묻는 투로 쓰인 내 메일을 읽고 상처 받은 토끼 주인이 그냥 집으로 데려간 걸까? 주일 학교 아이들에게 동심을 가르쳐 주려고 전도사님이 토끼를 데려 왔다가 괜히 신도에게 항의나 받게 했다고 목사님에게 혼난 걸까? 


 토끼 사건은 좋은 일 하겠다고 오지랖 넓게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다가 가만히 있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여건이 안 되는 상황에서 키우는 토끼라면 내가 데려다 키우겠단 각오도 서지 않았고 하다못해 토끼 사료 값이라도 보탤 생각도 없던 나는 좋은 일을 할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 주제에 준엄하게 남을 꾸짖었으니 내 메일의 수신인은 얼마나 내가 가소로웠을까. 


 그래서 잃어버린 고양이가 아닐 수도 있는데 괜히 다른 사람을 한 번 더 실망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광고에 나온 번호로 연락하기가 주저되었다. 무엇보다도 고양이를 데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놓쳐 놓고 연락해 봤자 무엇하랴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못하면서 고양이가 왔다 간 날 이후로 밤마다 남편에게 러시안 블루 이야기를 하자 남편은 내 말이 지겨워서 그런 건지 진짜 그렇게 믿어서 그런 건지 몰라도 '주인 있는 고양이일 거야. 안전한 동네라서 주인이 풀어놓고 키우는 거겠지. 주인이 없다 해도 오스틴은 따뜻해서 얼어 죽을 일도 없어. 게다가 우리 집 바로 뒤 수풀은 산림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개발도 못하고 사람도 못 들어가는 곳이라 거기 가면 먹을 것도 많을 걸.'이라고 위로했다. 이성적인 사람답게 주인이 있는 경우와 잃어버린 경우를 나눠서 어떤 경우에도 내가 반박하지 못하게 낙담으로 떨어지는 통로를 원천 봉쇄하고 위로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낙관주의에 전염되는 수밖에. 아니, 사실은 남편에겐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것 같아 트위터에 사연을 도배하고 애묘인들과 함께 걱정했다.


 2010년 12월 25일 아침. 야옹 소리에 깼다. 서둘러 문을 열어 보니 며칠 전 러시안 블루가 산타 옷까지 입고 찾아왔다. 야, 너...... 이제껏 그렇게 반가운 손님은 없었다. 연락이 끊겨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믿으며 흘려보낸 모든 인연들을 통틀어 이렇게까지 완벽한 순간에 완벽한 복장으로 나를 다시 찾아온 손님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내 인생에 없다. 


 문을 열어 주자 집 안으로 들어온 녀석은 제 집처럼 여기저기 휘젓고 다니고 나에게 계속 놀아 달라고 엉겨 붙는 개냥이였다. 가만히 안아 주니 그릉그릉 소리를 낸다. 기분이 좋아서 그런 건지 혹시 기관지가 안 좋은 건지 몰라 인터넷 검색을 한다. 고양이 무식자인 주제에 벌써 얘를 걱정하기 시작하는 친밀감과 관계성이 형성된 모양이다. 자칫하다가는 주인이 산타 옷을 입혀 동네 주민들에게 크리스마스 인사를 하라고 내 보낸 것 같은데 그 옷 벗기고 내 고양이 하자고, 내가 키운다 할 판이다. 여기 사는 것도 아닌 주제에, 12월이 끝나고 내년이 되면 추운 동네로 떠날 거면서 이 귀여운 생명체에 집착하기 시작하는 나를 퍼뜩 깨닫고 그만 붙잡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다른 집도 한 바퀴씩 쭉 돌면서 산타 옷 뽐내고 예쁨 받아야 할 텐데 내가 너무 오래 시간 뺏었다. 문을 열어 주고 나가라고 해도 녀석은 나가기 싫어하고 억지로 내보내면 한참이나 문을 두드리고 긁으며 다시 열어 달라고, 같이 놀자고 애원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떠났다. 


 9월부터 내리는 눈은 너무 빨리 와서 눈치 없는 손님. 

 1월에 도착한 크리스마스 카드는 조금 늦게 와서 김 빠진 손님. 

 12월 25일에 산타 옷을 입고 찾아온 고양이는 반갑지만 돌아갈 곳이 정해져 있어 보내 줘야 하는 선물 같은 손님. 10년 전 내 인생 최고의 동화 같은 순간을 선물해 준 고양이 손님을 떠올리며 쓴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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