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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에 내리는 눈 May 24. 2021

월요일의 유레카

 작가는 어떻게 쓰는가. 하루 중 어느 시간에 어떤 마음으로 얼마만큼의 주기로 어디에서 글을 쓰는가. 나는 하루키[1]나 재닛 버로웨이[2] 같은 유명한 사람이든, 브런치의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이든, '글을 쓰는 방법에 대한 글' 읽기를 좋아한다. 그런 글들 속에서 배울 만한 점을 찾아 나만의 글쓰기 루틴을 만들고 싶지만 의지와 체력이 약해서 좋아 보이는 방식도 따라 하지 못하고 그저 기웃대기만 좋아한다.


 사실 글 쓸 주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상에서 수다스러운 나답게 머릿속에는 여러 개의 소재가 쌓여서 하나의 주제를 이루는 글감이 되기를 기다리며 묵혀 두고 있는 이야기들이 줄 서 있다. 시간은 있지만 번잡스럽고 들뜬 시간이 아니라 고요하고 가라앉은 시간이 없어 첫 문단만 쓰고 다시 열지 못하고 있는 소설 파일도 있다. 벅찬 감흥이지만 지금 당장 나누기보다는 조금 더 시간이 지나 정제된 언어로 전달하고 싶은 경험들도 나날이 하고 있다. 때로는 '이 이야기는 들을 만한 이야기가 아니야, 시끄러운 세상에 내 감정 따위 배설해서 소음을 더하지 말자'라는 생각에 자기 검열하느라 내놓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오늘은 문득 떠오른 생각을 꾸미지 않고 쓰고 싶다. 아침에 눈을 떠서 부엌에 나가자마자 부엌 꼴이 초토화된 어젯밤 상태 그대로면 내가 애를 재우는 사이 설거지를 안 해 주고 잔 남편에게 부아가 치밀 때가 있다. 몇 번을 당부했더니 이제는 남편이 설거지를 잘해 주는데 문제는 당장 아침에 애 도시락을 쌀 때 필요한 프라이팬, 밥솥, 도시락 용기, 물병 이런 것들은 아파트에 붙어 있는 작은 식기세척기에 들어가지 않으니 귀찮은지 식기세척기에 들어가는 접시, 그릇만 차곡차곡 넣고 자 버릴 때가 있다. 필요한 건 결국 내가 씻어서 밥을 해야 하니 바쁜 아침 시간에 준비만 늦어지고 설거지해 준 사람은 해 준대로 고생했는데 나에겐 전혀 도움이 되질 않아 몇 번이나 좋은 말로 부탁도 해 보고, 화도 내 보고, 소리도 질러 봤는데 바뀌질 않는다. 그래서 이제는 포기했다. 그냥 '또 물병이 남아 있네, 밥솥도 그대로네', 하며 고무장갑 끼고 박박 닦는다.


 그렇게 오늘도 새벽 설교를 틀어 놓고 무념무상 설거지를 하는데 문득 '어렸을 땐 사는 게 자연스럽고 쉬웠는데 왜 지금은 부자연스럽고 어렵지?'라는 늘 하는 질문이 또 머릿속에 맴돌았다. 여기서 말하는 '사는 것'이란 주로 인간관계에 관한 것이다. 내가 성격이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고 옹졸하고 잘 삐지고 독불장군 같은 면도 있는데, 어릴 때도 이 성격 그대로였는데, 왜 그때는 친구 사귀기가 쉽고 한 번 사귀면 멀어지는 일 없이 오래도록 같이 행복했을까, 그런데 지금은 왜 다 내 맘 같진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내가 무슨 인격파탄 수준이거나 왕따는 아니지만, 겉으로는 사람을 잘 사귀고 인맥 관리를 잘하는 것 같아도 미묘하게 달라진 부분이 있다. 그 전에는 애쓰지 않아도 됐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애쓰고 있다는 걸 자각하게 된 거다. 내키는 대로 말하지 않으려 하고, 계산해서 행동하고, 사회에서 말하는 예의와 도리대로 남을 대하면서 피곤해한다. 왜 갑자기 다 힘들어졌을까.


 수도꼭지에서 쏴아 흐르는 물줄기를 보며 설거지를 하다가 깨달음으로 샤워하듯 갑자기 머리가 맑아진다. 아, 내가 사교적이고 리더십 있고 소셜 스킬 (social skill)이 좋았던 어린이에서 괴팍하고 까탈스럽고 반사회적 (anti-social)인 아줌마로 변한 게 아니라 어릴 땐 다른 친구들이 순수해서 내가 괴팍한 것조차 몰랐거나 알면서도 참아 준 거였구나! 그런데 그들도 나이 먹어 가면서 이제 안 참는 거구나!

Sleeping Sphinx, Lalan Jing-lan XIE, 1969

 이 간단한 진리를 이제야 깨닫다니...... 나는 괴팍하기만 한 게 아니라 어리석기까지 했구나.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을 깨우치니 홀가분해져서 설거지를 하고 도시락을 싸면서도 콧노래가 나온다. '맞아 맞아, 우리 남편도 연애할 땐 세상 순둥이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 안 받아 주고 소리 벅벅 지르지, 그게 다 나 때문이잖아, 남들도 마찬가지겠지' 월요일 아침 유레카의 순간을 겪고 입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다. 그래서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아이스라테 한 잔 마시며 카페에서 즐겁게 쓴다.


[1] 무라카미 하루키 저, 양윤옥 역,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현대문학 (2016)

[2] 재닛 버로웨이 저, 문지혁 역, '라이팅 픽션' 위즈덤하우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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