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다에 내리는 눈 Aug 04. 2021

건강검진 결과가 섭섭한 이유

 휴가를 내서 한국에 오면 늘 다니는 코스가 있다. 어릴 때는 미장원, 피부과, 백화점같이 모양내는 곳 위주로 다니다가 조금 더 나이를 먹고는 소화가 안 되니 내과, 목디스크인 것 같으니 정형외과, 시력이 떨어진 것 같아 안과, 이렇게 병원 순례를 하다가 이제는 아픈 데를 찾는 것보다 안 아픈 데를 찾는 게 더 빠른 상태가 되어 버려서 아예 온몸을 스캔하는 건강검진을 받는다. 이렇게 하루에 전신을 다 스캔하는 종합 건강검진은 효율적이면서도 저렴한, 지극히 한국적인 것이어서 나는 민속촌에 다녀오는 것보다 종합 건강검진을 받으러 대형 병원을 다녀왔을 때 '아, 내가 한국에 왔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다. 이제껏 내가 살아 본 나라들 (미국, 프랑스, 스위스, 홍콩)에는 아예 종합 건강검진의 개념 자체가 없어서 보험회사나 남에게 설명하기도 힘들었다. 피검사, 혈압 확인, 의사 면담 정도가 고작인 기본적인 건강검진은 있어도 증상이 없는데 CT, 초음파를 찍어 보는 검진은 없어서 한국 가서 초음파 찍어 봤다고 하면 '어디가 아파?'하고 사람들이 걱정스럽게 물어 봐 주곤 했다. 무지하게 프로답고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한결같이 친절하다니!) 엄청나게 똑똑한 (대기표도 없는데 모든 사람들의 순서를 외우고 있어!) 간호사들의 안내로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아래층에서 위층으로 착착 이동하며 앉으라면 앉고 누우라면 눕고 돌라면 돌고 서라면 서면서 착실하게 순종했더니 3시간도 안 되어 모든 검사가 끝났다. 어메이징! 


 외국에서 아프면 일단 2~4주 후에나 가능한 주치의와의 만남을 예약하고 주치의를 만나서 더 자세히 검사할 필요가 있다고 소견서를 받아 전문의를 만나고, 전문의가 또 소견서를 써 주면 검사하는 센터로 가고, 그 검사 결과가 몇 주 후에 나오면 이미 몇 달이 훌쩍 지나 있어서 치료하기도 전에 자연적으로 병이 다 나아 있기가 일쑤였는데...... 머리부터 발 끝까지 3시간도 안 되어 다 검사가 끝난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마취 들어갑니다', 소리에 정신을 잃고 한 1초 후에 눈을 뜬 것 같은데 이미 위와 대장 내시경이 끝나고 회복실에서 코 골며 실컷 밀린 잠까지 달게 자고 난 것처럼 '인터스텔라'스러운 순간이었다. 


 종합 건강검진 결과도 1주일이라는 빠른 시간 안에 나왔는데 2년 전의 검사에 비해 많은 지표가 안 좋아져 있었다. 대부분의 원인은 코로나 락다운과 미식 도시 홍콩을 거쳐 오며 급격히 불어 버린 체중 때문이었는데 각오하고 있던 바라 씁쓸하기만 할 뿐, 놀랍지는 않았다. 사실 더 놀라운 결과는 따로 있었다.


 나는 이제껏 내가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고 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세 살짜리 아들한테도 '너 때문에 내가 스트레스받아!' 막말하고 저녁은 굶으면서 왜 한밤중에 야식을 먹냐고 걱정하는 남편에게 '당신이 스트레스 안 주면 내가 야식 먹겠냐?' 쏘아붙이며 폭식의 원인을 스트레스로 돌리곤 했다. 그런데 뇌파와 맥파를 잰 스트레스 검사 결과, 나는 스트레스가 없는 인간이었다.


스트레스가 없는 인간의 검사 결과

 

 집중도, 두뇌 스트레스, 좌우뇌 불균형 모든 지표가 '보통, 적정, 균형'이었고 유일하게 두뇌활동 정도가 부하에 걸려 있다고 나왔는데 이건 사실 부족으로 나왔으면 너무 머리를 안 쓰고 산다는 소리일 테니 차라리 부하가 나은 것 같아서 만족했다. 오히려 평소 표현을 잘하지 않고 사는 남편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고 모든 게 과부하에 걸려 있고 좌우뇌도 불균형한 것으로 나왔다. 나는 감정을 다 밖으로 쏟아내고 살아서 스트레스가 없고 남편은 안으로 삭이면서 내가 쏟아낸 것들까지 받아내서 이런 결과가 나온가 싶어 내심 미안했지만 또 마음과는 달리 말은 매정하게 나왔다.


 "거봐, 나는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명상하고 책 보고 그러니까 스트레스가 없잖아. 당신도 깨워야 일어나지 말고 아침에 좀 일찍 일어나서 명상을 해. 좌우뇌 불균형한 거 봐라. 내 그럴 줄 알았지. 공감능력 전혀 없이 맨날 이성적으로만 판단하는 게 건강검진 결과에 딱 나오네. 이렇게 좌우뇌가 불균형한 인간이랑 사니까 내가 얼마나 힘들겠냐?"


 음...... 나도 나랑 살면 싫을 것 같다. 뭐든지 나에게 유리하게 해석해서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는 이 고질병은 왜 남편에게만 발동하는 걸까. 


 맥파 검사 결과는 더 놀라웠다. 모든 게 적정하고 정상이고 건강하고 활력 있어서 좋고 감사한데 실제 나이보다 어리게 나왔는데도 자율신경 나이가 37세라는 사실에 나도 나이를 꽤 먹었다는 걸 자각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동안 부심이 있던 시절 만난 한 20대 초반 처자가 내가 절대 내 나이로 안 보인다고, 훨씬 어려 보인다고, 한 서른 살 되어 보인다고 했을 때 '립서비스로 엄청 어리게 봐준 나이가 서른이라니'하고 슬펐는데 이제는 37세도 내 나이보다 훨씬 어린 나이인 거다. 외국에서 나이를 인식하지 않고 철없이 살다가 '아, 나도 40대였지' 깨닫는 검사 결과였다. 

 

실제 나이보다 어린데 37세

 

 뭔지도 몰랐는데 친구가 꼭 추가해서 받아 보라고 한 활성산소와 항산화력 검사 결과도 정상으로 나왔다. A (매우 좋음)부터 F (높은 산화스트레스)까지 6등급으로 나눈 집단에서 나는 B(정상)군에 속하고 면역체계나 체력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이럴 수가...... 나는 늘 육아의 고단함과 일, 학업에서의 게으름을 저질 체력 탓으로 돌려 왔다. 애가 하나밖에 없어도 체력이 저질이라서 남들이 네 쌍둥이 키우는 것만큼 힘들다고 불평하고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면서, 약속에 늦으면서, 데드라인을 어기면서 죄책감이 들 때 '나는 체력이 약하잖아, 어쩔 수 없어, 이게 최선이야' 속으로 변명했다. 그런데 E나 F군에 속할 줄 알았던 내가 B라니. 


 이제껏 내 몸을 너무 지나치게 아끼면서 살아왔구나. 충분히 할 수 있는 몸뚱이를 갖고 있었지만 그저 멘탈바사삭이어서 그렇게 많은 기회를 놓치고, 도전하지 않고, 실수와 실패에는 눈 감고 지나왔구나. '할 수 있다'와 '노력'을 강조하는 새마을 정신을 비웃으며 '할 수 없거든? 노오오력으로 안 되는 게 있거든?' 반발했는데 실상은 할 수 있는 분량만큼의 시도조차 안 하고 살았구나. 


 체력은 문제없는데 정신력이 부족하다는 확인사살을 받고 나니 섭섭하다. 이제는 열심히 살지 않을 구실이 다 없어져 버린 것 같아서, 정말로 열심히 살아야 될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워진다. 나에게 주었던 근 40년의 수습기간에 종말을 고하고 이제는 진지하게 실전 인생을 살아야 하나 보다. 이제는 진짜 어른인가 보다. 

 


 


  

작가의 이전글 월요일의 유레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