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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에 내리는 눈 Sep 15. 2021

부고를 받고 나서

Death Communication (2)

 카페인에 찌들어서 그런지 걱정이 많아 그런지 어느 새부턴가 알람을 듣지 않고도 아침에 일어난다. 부스스 일어나자마자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보는데 오랜만에 보는 이름으로부터 이메일이 와 있다. 못난 제자라 면목 없어 몇 년째 연락을 드리지 못한 박사과정 지도교수가 보낸 메일. 학교 다닐 때는 하루에도 몇 통씩 내가 필요해서 메일 보냈었는데 이제는 그 흔한 크리스마스 안부 인사조차 건너뛰고 기어코 선생님이 먼저 연락하게 만들어 버렸다. 노교수의 건강이 좋지 않은 걸 알고 있던 터라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명종 10개가 한꺼번에 울려 대는 것처럼 마음이 시끄럽고 심장이 쿵쾅대서 잠이 확 달아나 메일을 열어 보았다.


 내 논문 심사 위원이었던 교수님 K의 부고였다. 2년 전에 생각보다 이른 은퇴를 하셔서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때 치매와 암 진단을 받으셨던 듯하다. 결국 어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하는 건조한 문장 속에 지도교수님의 깊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나는 얼마나 못났으면 연락도 생전 안 하는 제자에게 부고를 전하는 일까지 스승에게 떠 안겼을까.


 나는 K교수님의 학생은 아니었으므로 그녀와 그렇게 깊은 유대관계를 쌓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톱만 한 성공과 티끌만 한 성취에도 자기 자신의 능력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빚진 부분이 더 큰 게 세상 이치이듯, 그녀로부터 받은 것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아니, 이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솔직히 세어 보지 않았다. 그러나 세어 보니 너무나 많은 것들을 K로부터 받았으면서 그녀를 생각하지 않은 채 지난 2년을 살아온 것이다.


 처음 입학했을 때 자기 학생도 아닌데 따로 불러서 적응은 하고 있냐며 따뜻하게 물어 봐 주고 차가 없다는 내 말에 그래도 어느 정도의 기동성은 갖추는 게 좋으니 자전거를 사라고 조언해 주었던 일. 

여름 방학에 오랜만에 캠퍼스에서 마주쳐서 인사하니 얼굴을 다 가리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못 알아봤다고 깔깔 웃으며 반가워하던 개구쟁이 같은 얼굴. 한국의 프로 메이크업과 사진 촬영 기술의 결정판인 내 웨딩 사진을 보고 잡지에 나오는 모델 같다며 놀라워했던 순진함. 같이 참여했던 학회에서 거하게 저녁을 얻어먹고 숙소까지 걸어갈 때 오랜만에 신은 하이힐이 불편해서 잘 걷지 못하는 나를 걱정해서 느리게 내 곁에서 걸어주던 밤. 그녀의 헬스커뮤니케이션 세미나 수업에서 처음 접한 죽음에 대한 소통 연구 주제. 졸업논문 심사 위원으로서 물심양면 나를 도와주고 내 지도교수가 병환으로 부재했을 때 대신 그 몫을 해서 기어코 모자란 나를 졸업시켜 준 영원히 잊지 못할 은혜.


 이밖에 많은 격려와 도움 덕에 오늘의 내가 있다. 많은 선의들과 공동의 노력, 어떤 이들의 눈물과 희생의 결과가 겨우 이런 나라는 게 염치가 없어서 차일피일 연락을 미루고 서서히 은인들로부터 멀어졌던 과거에서 지금 나는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 인연에 켜켜이 먼지가 쌓일 만큼 시간이 지나 하나둘씩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될 때마다 늘 같은 후회를 반복하면서 나는 역시나 자라지 않고 맴돌고 있다.


 괴상한 '금의환향'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성공하기 전엔 연락하지 않겠다' 했더니만 성공은 언제까지고 요원해서 연락할 수 없다. 2년 전 그녀의 이른 은퇴식 때 동기가 다 같이 감사 인사라도 보내자고 했는데 학계에 남아 성과를 내면서 착실히 살아가고 있는 동기는 감사 카드를 쓸 자격이 있지만 나처럼 대륙을 떠돌며 방황하는 이단아는 한 줄 감사 인사조차 쓸 자격이 없는 것 같아 주저하다가 그만 인사를 보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내 마음은 그게 아니었는데.

 고마움에도 자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어리석음의 대가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박탈당하는 혹독한 징벌이었다.


 K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또 다른 교수가 쓰러져서 뇌 기능이 손상되고 많은 기억을 잃었는데 (이상하게 혹은 당연하게 우리 과 교수들은 정교수가 된 후에도 치열한 경쟁과 실적 압박으로 과로해서 쓰러지는 일이 꽤 있었다) 같이 논문 쓰고 학교에서 주류 세력으로서 친하게 어울렸던 교수들의 이름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고 유일하게 기억했던 두 명의 이름이 우리 과의 대모 같았던 푸근한 과사무실 비서와 K였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모두가 인정했다. "K는 정말 좋은 사람이구나!"


 모두에게 따뜻한 사람. 그래서 기억을 잃어도 마음에 남는 이름. 그게 K였다. 정작 그녀가 치매를 앓고 기억을 잃어갔을 때 그녀의 마음에는 어떤 이름들이 남았을까. 감히 나의 이름이 끝까지 남아 있었기를 바라지 않지만 그녀가 길러 낸 많은 제자들이 얼마나 그녀에게 감사하고 그니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지 잊지 않고 떠났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말: 오전에는 K교수님 때문에 눈물 쏟고 오후에는 지인의 출산 소식에 기쁜 축하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 하루 동안 생과 사, 인생의 처음과 끝을 목도했다. 처음이 있으면 끝이 있고 끝인가 하면 또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어지는 것이 인류의 운명이라고, 인생이 내 귀에 대고 고래고래 외치고 있는 것 같다. 죽음을 소통하는 것의 어려움에 관한 글들을 써 보겠노라고 다짐하고 몇 달 전에 선언까지 했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또 후회하지 말고 지금 해야 할 일을 해야겠다. K를 보내는 이 힘든 마음까지 준비되지 않았지만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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