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이지혜 Oct 07. 2019

모두가 똑같을 수는 없다.

나는 그냥 나일뿐

옛말에 술이 원수라는 말이 있다.

한때 나에게 술은 정말 원수 같은 존재였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 입학 후부터 직장생활을 하는 지금까지 내가 가장 많이 했던 말들 중 하나가 어느 애니메이션 장화 신은 고양이 눈망울로 "술은 냄새만 맡아도 취해요"였으니 내숭이라고 재수 없다 말해도 할 말 없는 나지만 술의 냄새만 맡아도 어지러움을 호소하고 피로를 풀어준다는 흔한 드링크제 한 병도 마시지 못하는 게 나의 팩트다.



나에게 술은 정말 피하고 싶은 원수와도 같은 존재였다. 이런 나의 파격적인 주량 또한 맥주 세 모금. 여기서 말하는 세 모금이란 작은 종이컵으로 반잔이 채 안 되는 양이다. "난 늘 술이야 맨날 술이야."를 외치던 노래의 가사는 나에게 있어 대단함 파격 그 자체였다.


내가 술을 처음 맛보게 된 건 아주 어렸을 때.

제사를 지내려 작은 주전자에 부어놓은 청주를 어른들 바쁜 틈을 타 물인 줄 알고 마셨던 그 날. 목구멍이 타들어 갈 듯한 느낌과 알 수 없이 이상하기만 했던 그 맛. 맛을 채 느끼기도 전에 어린 나는 정신을 잃었으니 조상님 기일에 하마터면 건너선 안 될 강을 내가 건널 뻔했다며 아직까지도 조상님들 기일 때마다 말씀하시곤 한다.


성인이 된 후 술과 내가 다시 마주한 것은 대학 MT 때.

그 날 나는 파도타기라는 단어가 그렇게도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다들 태어날 때부터 술병 하나쯤은 손에 들고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누구 하나 나처럼 "전 술을 못해서요." 이렇게 말했으면 거기에 묻혀 눈치껏 피해보기라도 했을 텐데 선배들 눈치를 보았던 건지 정말 나같이 말도 안 되는 주량을 가진 이가 없었던 탓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나의 물오른 발연기로 어렵게 상황을 모면하긴 했지만 바닥을 드러내며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빈 잔을 볼 때마다 나에겐 파도타기가 아닌 쓰나미 같은 공포가 밀려왔었다.


몇 해 전 12월 마지막 날.

저녁 식사 후 가족들끼리 조촐하고 오붓한 망년회를 하자며 둘러앉았다. 그리고 가족 앞에 놓인 술병은 맥주 한 병이 전부.

그날 난 취약한 나의 주량이 엄마에게로부터 내려온 유전자였음을 알게 되었다.


맥주 세 모금을 마시고 얼마 후 애국자도 그런 애국자가 없다고 밤새 애국가를 목놓아 부르다 주무신 엄마와 곁에서 노래에 맞춰 지휘를 하다 박수를 치다를 반복하며 잠들었다는 나를 보며 할 말을 잃은 나머지 가족들은 조용히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고.



다음 날 아침 그 정신에 거실에 슬리퍼도 신발이라고 신발장에 모조리 넣어 가지런히 정리해 둔 날 보며 내 인생에 술은 없다를 다시 한번 확인 다짐했었다.




어느 날 지인들끼리 모임이 있었다. 가까운 분과 처음 만난 분들이 함께 섞인 자리. 이야기가 오고 간 얼마 후 술은 못한다며 정중히 거절하는 나에게 얼큰하게 술에 취한 누군가 "분위기 흐리고 있어." "술 한잔도 못하면서 사회생활을 어떻게 하려고 그래?"라며 툭 던지듯 말을 내뱉었다.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은 그 말을 듣고 갑자기 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술을 못하는 게 분위기를 흐리는 건가? 언제부터 우리 사회가 이렇게 술을 권하는 사회가 된 건가?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술을 즐기면 되는 거고 술은 잘 못하지만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분위기를 좋아하는 난 술을 마시지 않고서도 이렇게나 잘 어울릴 수 있는데.


시간이 흐르고 아무렇지 않게 그 말을 내뱉은 이가 술에 잔뜩 취해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침을 질질 흘리며 네발과 두 발을 교차해 화장실로 향하는 모습을 보고 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난 그날 술이 과하면 인간도 동물로 변신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누군가 나에게 술을 권할 때마다 "술을 잘 못해서요"라는 말 앞뒤에 항상 "죄송해요"하는 말을 붙여 사용했었다. 술을 못하는 게 죄송할 일은 아닌데도 습관처럼 죄송해요라는 말을 하는 나를 보면서 문득 그게 왜 죄송할 일이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술을 마시려 성인이 된 것도 아니고 술 한잔 제대로 못한다고 해서 사회생활을 못하는 것도 아닌데 술이 없어도 난 누구보다 그 분위기를 즐길 줄 알며 술 없이도 내가 좋아하는 노래 열창이 가능한 흥부 자이며 술이 없어도 십 년 넘게 그런대로 원만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술을 못 마시는 건 더 이상 죄송할 일이 아니라 난 그저 술을 즐기지 않는 것뿐, 술을 즐기는 사람들과 그저 다른 나일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가벼운 술이 오고 가는 모임이나 회식 자리에 가게 되면 꼭 이렇게 말한다.


"전 술보다 분위기를 즐겨요."

매거진의 이전글 조금 더 따뜻하게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