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는 아픔을 낳고
2017년 7월 4일 화요일
날씨 습하고 엄청 더움
여느 게스트하우스와 달리 돌돌게스트하우스의 조식은 무려 한식이다. 심지어 맛도 일품.
가볍지만 든든하게 아침을 먹는다.
태풍이 온다고 밤새 호들갑을 떨었는데, 놀랍도록 날씨가 좋다.
우리나라 기상청은 당췌 믿을 수 없다고 하지만 막상 당하니 허무하고 당황스럽다.
출발 시간도 애매하고 4코스가 올레길중에 가장 길다는말에 사장님의 추천 '올레함께걷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홀로 길을 나선다. (결과적으로 오늘 4코스보다 더 걸었다..)
어제 못걸은 17코스를 마저 걷고, 16코스를 걸어야 하는데 거리가 만만치 않다. 순간적으로 17코스 시작점까지 차를 타고 갈까 고민했지만, 당치 않은 생각. 나는 묵묵히 걸을 것이다. (차를 탔어야 했다.)
남은 17코스 6km를 가는 동안 체력의 50%를 소진하였다. 뜨거운 햇살에 날씨도 덥고, 습하고, 태풍은 뭐하는지... 17코스 시작지점에 도착하면 휴게소나 리프레쉬를 할 공간이 있을 줄 알았는데, 절대 없다. 무언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지만, 방법이 없다. 더워서 뇌가 멈춰버렸다. 기계처럼 그저 걷기만 한다. (그만 걸었어야 했다.)
본래 오늘의 목적지는 16코스 내 구엄포구 어디쯤으로 계획했는데, 숙소가 마땅치 않다. 그럼 16코스 시작점인 구내포구까지 가야만한다. 올레길이 아닌 해안길을 따라걸으면 거리를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올레길을 따라 걷는다. (해안길을 따라 걸어야만 했다.)
17코스 시작점에 도착하여 스템프를 찍고 근처 편의점에 들려 밀키스를 한 잔 한다. 17코스 시작점과 16코스 종점인 광령리는 참 친숙하고 정감가는 마을이다. 하지만 감상에 젖기에는 몸 상태가 영 안좋다. 고질적인 왼쪽 무릎 통증이 몰려온다. 어깨는 끊어질 것 같고, 발목도 아파오기 시작한다. 아직 절반인 10km도 걷지 못했다.
올레16코스는 숲길과 산길이 많다. 숲길과 산길이 많다는 건 중간 중간 가게나 식당이 없다는 뜻. 게스트하우스에서 아침을 챙겨먹고 나와 배가 심하게 고프진 않지만,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작은 마을, 숲길, 산길, 예쁜 마을, 저수지, 새로운 풍경에 눈은 호강하지만, 몸이 고생중이다.
그렇게 삶의 끈을 놓아버릴까 고민하던 찰나, 휴게소를 발견하였다. 16코스는 정말이지 이 휴게소에 고마워해야한다. 고맙게도 정수기도 있고 아이스크림도 판다. 쭈쭈바 하나에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다. 오늘 무사히 살아서 이렇게 브런치를 쓸 수 있는 것도 다 그 휴게소 때문이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곧 온수가 될 냉수를 물통에 가득 채워 길을 나선다.
걷다보니 어떤 작은 마을에 미국에서 보았던 '베벌리힐즈'가 있다. 무언가 고급스럽게 전원주택단지를 조성해 놓았는데, 1도 살고 싶지 않다. 굳이 이 작고 조용한 마을에 자본주의의 끝판왕이자 부의 상징을 이렇게나 저질러 놓은것이 당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제주살기 붐이 불면서, 곳곳에 이러한 호화 저택들이 생기고 있다. 부러워서가 아니고 무언가 지나친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쓸데없는 오지랖이겠지. 그래도 '베벌리힐즈'는 네이밍부터가 정말 별로이다.
16코스의 하이라이트 '수산봉'이 눈앞에 있다. 적당한 높이의 오름을 지나야 하는데 무려 1시간짜리 코스이다. 저기 올라갔다가는 진짜로 119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아서 과감하게 우회한다. 우회하니 10분도 안 걸린다. 오늘의 가장 현명했던 순간이 아닐까 싶다.
1차로 목표했던 구엄포구가 멀지 않았다. 몇 키로를 남기고 우동을 파는 트럭이 있어 기웃거렸지만, 오늘은 쉬는날이라고 밝은 사장님이 미안해하신다. 냉수라도 한 잔 얻어먹을까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아 발걸음을 제촉한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지만 왠지 구엄포구에는 편의점과 온갖 식당이 가득할 것 같았다. 역시나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고, 그 중 '해물라면'을 선택한다. 걷기 시작한지 5시간만의 식사이다.
밥을 먹으며 오늘의 숙소를 예약한다. 16코스의 시작점까지는 약 5키로 남짓. 한 시간정도만 부지런히 걸으면 도착할 수 있다. 특별히 코스를 완주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내일 또 개고생할기 싫어서 무리해서 목적지까지 걷는다. (17코스 ㅂㄷㅂㄷ)
기대 없이 도착한 숙소는 꽤나 좋다. 유명 쉐프를 영입하셨다는 사장님의 꼬심에 속는셈치고 먹은 석식도 훌륭했다. 이렇게 오늘의 하루를 끄적이기 완벽한 공간에 맥주맛도 기막히다.
내일은 조금은 여유를 가져야겠다. 이러다가 3일도 못 채우고 서울로 이송될지도 모르겠다.
+
이렇게 끝났으면 그래도 괜찮은 마무리가 될 수 있었는데, 밤늦게 들어온 세 명의 대학생 친구 일행이 심상치 않다. 역시나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 법. 게스트하우스가 처음인지 원래 인성이 글러 먹었는지 도미토리를 무슨 동아리방 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쉴새 없이 떠드는것 까지야 참았다만, 11시가 넘고 12시가 넘어가는데 계속 방을 들락날락 거리며 광란의 파티를 한다. 참다참다 한 마디 하니 조용해지긴 했다만, 서로 어색하게 참 좋지 않다. 아무리 친구끼리 여행이고 게스트하우스가 처음이라도 그렇지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