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정신병원 폐쇄 (탈원화) 이야기
1961년 겨울, 한 정신과 의사가 이탈리아 고리치아 정신질환자 수용소 소장으로 취임합니다.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의 국경지대에 있는 작은 마을에 아무도 관심이 없었지만, 역사적인 정신보건개혁이 그곳에서 시작됩니다.
1978년 이탈리아 의회는 모든 정신병원을 폐쇄시키고 지역사회 중심 케어를 시작하게 한 바살리아 법(Basaglia Law, Law 180)을 제정합니다.
프랑코 바살리아(Franco Basaglia, 1924-1980)는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부터 의사의 꿈을 키웠습니다. 1940년도 2차 세계 대전 중, 바살리아는 고등학교 교실에 반파시스트 전단을 붙였고 파시스트를 비난하는 글귀를 칠판에 적습니다. 이후 그는 체포되었고 반년 동안 열악한 구금생활을 경험합니다. 당시를 바살리아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처음 감옥에 갔을 때 나는 의학도였다. 나는 반파시스트로 활동했고, 그 때문에 투옥됐다. 내가 들어간 감옥의 그 끔찍한 상황을 기억한다. 오물을 내다 버리는 시간이었다. 냄새가 끔찍했다. 죽음의 냄새였다. 시산을 해부하는 해부 극장에 들어간 것 같았던 느낌이 기억난다. 졸업한 지 13년 뒤 나는 정신 한 정신질환자 보호소의 소장이 됐는데, 그 건물에 처음 들어갈 때 나는 전쟁과 감옥으로 곧장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똥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똥의 상징적인 냄새가 있었다. 나는 그 공공시설이 완전히 불합리하며, 그곳에서 일하는 정신과 의사들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기능이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 존 풋, 정신병원을 폐쇄한 사람(문학동네, 2020), 26p
당시 이탈리아의 정신질환자 수용소는 1904년에 제정된 법률 36호에 의해 자•타해 위험이 있다고 여겨지는 정신질환자들을 강제로 수용하는 곳이었습니다. 바살리아는 과거 경험을 통해 수용소 시스템의 참상을 알았고, 수용소 소장으로 취임 후 개혁적인 변화를 시도합니다.
바살리아는 수용소의 결박과 격리를 금지하고, 근무인력을 재훈련했습니다. 근무자와 환자 간의 의견 차이를 공유했고 환자 자치회를 구성했으며, 집단회의를 자주 열었습니다. 그리고 무분별한 전기충격 등 폭력적인 진료를 멈췄습니다. 1964년 바살리아는 정신병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픈 환자가 수용소 시설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는 감정적 공백이라는 새로운 채원으로 진입하는 것이다...나는 이를 ‘시설화’라고 부른다. 환자가 수용된 공간에서는 치료를 제공하지만 역설적으로 환자의 개성은 완전히 사라지고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수용소에서 오히려 환자들은 자아를 상실하고 질병과 반복 입원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다른 사람에게 항상 의존하게 되며 시설에 통제에 따라 일상생활이 조작된다. 사람을 만나거나 개인적 욕구를 추구하는 것도 어려워지게 된다. 이것이 수용소 생활이 기초하고 있는 시설화 체계이다.”
- 백재중, 자유가 치료다 (건강미디어협동조합, 2018), 32p
그는 환자가 ‘시설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바살리아가 소장으로 오기 전, 고리치아의 수용되었던 환자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합니다.
‘누가 죽었을 경우, 내가 저 사람이었으면 생각합니다. 이렇게 사는 데는 지쳤고, 얼마나 사람들이 죽어갔을지 모릅니다. 빠져나갈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무것도 먹지 않기도 했지만 콧구멍을 통해 강제로 음식물을 먹였습니다.’
- 존 풋, 정신병원을 폐쇄한 사람(문학동네, 2020), 46p
이후 바살리아는 자신과 생각이 맞는 정신의학자들로 팀을 구성하였고 1968년 『시설의 부정』을 출판합니다. 이 책은 이탈리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바살리아는 정신병원을 개혁한다는 것을 불가능하며 폐쇄해야 한다는 주장을 시작합니다.
1968년 고리치아 수용소에서 퇴임한 바살리아는 1971년 8월, 트리에스테 지역의 ‘산 지오바니’ 병원에 취임합니다. 그리고 또다른 개혁을 시작합니다. 산 지오바니에서 시작된 개혁 실험은 바살리아 법 제정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산 지오바니 병원은 바살리아법 제정 이후 최초로 폐쇄되는 정신병원이 되었습니다.
* 트리에스테 : 이탈리아 지역이름
바살리아는 정신병원을 폐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마음이 맞는 인력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의사와 심리학자 그리고 자원봉사자 등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정신병원을 폐쇄하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바살리아는 병원 내부 공간을 환자 중심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치료진과 환자 간 계급 해소, 병동 간 장벽 허물기, 병원 개방 및 병원 규모 축소 등을 진행합니다.
“큰 병동 구조를 분리하여 소규모 생활공간으로 재구성하고 그룹이 모여 생활할 수 있는 아파트 공간도 만들었다. 처음에는 병원 안에 만들다가 나중에는 도시 안 다른 공간에도 설치하였다. 성별 분리 수용도 폐지하고 원 내 바(Bar)도 만들었다...신체 구속을 없애고 전기 충격도 제한하였다. 자유로운 입출소 등도 추진해 나갔다. 환자들이 참여하는 파티도 정기적으로 개최되었고 환자들이 직접 만드는 신문도 발행되었다. 환자들의 병원 생활이 활력이 생겨났다. 환자들은 몇 명이 짝을 짓거나 혼자서 도시 나들이를 나가기도 하였다”
- 백재중, 자유가 치료다 (건강미디어협동조합, 2018), 5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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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살리아는 정신질환자들이 지역사회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도시의 보통사람들과 정신 질환자들의 접촉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트리에스테 지역모임 등에 환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독려했습니다.
또한 그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입퇴원을 반복하는 환자들을 보며 경제적인 안정이 필수적이라 판단합니다. 이에 1972년 입원 환자 60명과 함께 노동자연합협동조합(United Workers Cooperative)을 만듭니다. 조합원들은 병원을 청소 및 관리하면서 계약된 급여를 받았습니다. 이는 이탈리아의 사회적 협동조합의 효시가 되기도 합니다.
* 이탈리아는 1991년 제정된 법률 381(사회적 협동조합법)을 통해 조합 구성원의 30%를 장애인으로 구성하도록 함. 현재 한국 사회적 협동조합수 1185개 (2018년도 기준), 이탈리아 사회적 협동조합 수 13,941개 (2013년도 기준)
이들의 소식을 알게 된 세계 보건기구(WHO)는 산 지오바니 병원을 정신의학 ‘시범 지역’으로 선정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산 지오바니 병원과 트리에스테의 지역의 변화는 이탈리아 전역에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1975~1976년 사이에 지역 거주 시설이 마련되었다. 처음에는 정신병원에서 바로 퇴원한 환자들을 위한 시설이었는데, 위기 상황에 놓인 환자들이나 데이 센터로도 이용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입원 횟수, 빈도, 기간 등이 감소하게 되었다. 그리고 병원 주변에 처음으로 정신보건센터가 문을 열게 된다. 지역사회정신보건센터는 바살리아 법 시행 이후 정신병원이 폐쇄되면서 정신보건 업무를 책임지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는 정신보건 축이 정신병원에서 지역사회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다..정신병원과 정신보건센터가 동시에 존재하는 미요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으나...지역사회서비스가 강화되고 24시간 정신보건센터가 성장 발전하면서 이행 국면이 자연스럽게 마무리되어 갔다.”
- 백재중, 자유가 치료다 (건강미디어협동조합, 2018), 32p
그리고 1976년 바살리아는 산 지오바니 정신병원의 폐쇄를 공식 선언합니다.
이러한 노력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이탈리아 의회는 1978년 정신병원의 점진적 폐쇄와 지역사회 서비스로 전환을 골자로 한 ‘바살리아 법’을 제정합니다. 법의 시행 20년 후 1998년 이탈리아 전국에서 정신병원은 사라지게 됩니다. 1978년 트리에스테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강력한 탈시설 운동이 ‘바살리아 법’ 제정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후 20년 동안 이탈리아의 10만 명에 가까웠던 정신병원 수용자들이 사회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완전 폐쇄까지 걸린 세월이 말해주듯이 그 과정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 사회는 정신질환자들의 인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지역사회 중심 서비스를 철저하게 준비합니다.
정신병원 폐쇄 자체보다 그 이후의 삶이 중요합니다. 병원의 역할이 지역사회 중심의 시스템으로 전환되어야 했습니다. 이에 트리에스테 정부는 바살리아법이 통과된 다음 해 '정신보건국(DMH)'을 설치합니다. 그리고 바살리아 다음으로 산 지오바니 병원장으로 취임했던, 프랑코 로텔리는 정신병원 폐쇄 직후 트리에스테 지역 정신보건국장을 맡아 개혁운동을 이어갑니다.
당시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서비스는, 365일 24시간 문을 여는 정신보건 센터의 설치였습니다. 트리에스테 지역에는 5곳의 정신보건 센터가 설립됩니다. 센터는 지역사회의 불안감 감소와 응급상황 대처를 위해서는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리고 퇴원한 정신질환자의 재활과 사회복귀를 위해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각 센터는 환자가 지낼 수 있는 6~12개의 병상이 있었고 24시간 운영되었습니다. 그리고 응급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정신과 의사 2명 이상, 30명 정도의 간호사가 근무하게 됩니다. 센터의 의사와 간호사는 담당 구역의 환자 가정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정신병원의 폐쇄 이후에 만들어진 공백들을 정신보건 센터가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모델은 이탈리아를 넘어 우리나라까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모델은 탈원화를 꿈꾸는 나라들의 강력한 대안으로 나타납니다.
현재 이탈리아의 지역사회정신건강센터(CMHC)는 정신질환자를 환자(patient)가 아니라 손님(guests)이라고 부르며 응급병상(hospital)이 아니라 환대(hospitality)라 지칭합니다. 또한 정신과 의사(평균 4명), 임상심리사(평균 2명), 사회복지사(평균 2명), 간호사(평균 7.7명)로 구성돼 있어 지역사회에서 적절한 케어를 제공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1995년 제정된 정신보건법에 따라 전국에 정신보건 센터를 설립합니다. 하지만 이탈리의 모델의 겉모습만 가져온 형태에 그쳤습니다. 24시간 열려있지도 않으며, 지역사회 소규모 병원처럼 작동했던 이탈리아의 정신보건 센터(의사 및 간호사 상시 근무)처럼 진료 기능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한국의 정신건강복지센터의 상시 근로자는 사회복지사와 간호사만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정신장애인 인권보고서(2021)에 따르면, 2019년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중증 정신질환자와, 등록된 정신장애인의 수는 악 43만명입니다. 정신건강복지센터를 이용하는 환자는 약 8만명 정도로, 35만명은 어떤 이유에서건 정신건강복지센터의 케어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도 한 직원당 최소 20명에서 최다 57명의 정신장애인을 담당했습니다. 이는 정신건강복지센터의 서비스의 질이 낮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정신건강관련 기관 만족도 조사에서 정신건강복지센터는 15위로 전체 최하위를 기록합니다.
그렇기에 정신보건 센터는 정신병원의 대안이 될 수 없었습니다. 정신보건법 제정 이후 대한민국의 정신병원의 수는 더 증가하게 됩니다. 트레이스테 지역주민이(일반인포함) 2000년대 초반 정신보건 센터를 직간접으로 이용한 비율이 70%에 이르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가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탈리아는 90% 이상의 정신병원이 국공립이었기에 급진적인 개혁이 가능했습니다. 우리나라는 90% 이상의 정신병원이 민간병원입니다. 이처럼 다른 사회적 토양으로 이탈리아의 모델을 그대로 가져올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탈원화 이야기는, 지금도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우리나라의 정신질환자들에게 희망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치료가 아닌 격리를 위한 입원이 만연한 현실 속에서 우리나라가 나가야 할 방향을 보여줍니다.
"인권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공동체의 수준은 한 사회에서 모든 혜택의 사각지대에 놓인 취약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요. 조심스럽지만,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김승섭, <아픔이 길이 되려면>
우리 사회가 정신질환자를 조금 더 배려하는 곳이길 바라며 글을 맺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