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충동이 찾아오면 개인의 의지는 갈 곳을 잃는다.
무사태평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려 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
◆ 나쓰메 소세키 ,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내담자와 관련된 이야기는 개인정보보호를 위해 나이, 성별, 직업 등을 각색하였습니다.
심한 자살 충동을 호소하는 내담자를 만나게 되면, 자살사고가 마치 살아서 내담자를 집어삼키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높은 사회경제적 수준의 가정이었지만 폭력적인 부모 아래에서 자아를 지우고 부모님에게 자신을 맞추며 성장한 남성, 중학교 재학 시기부터 시작된 자해는 자살사고로 이어졌고 대학교 졸업 이후 번듯한 회사에서 경제활동을 시작했으나 끊임없이 쫓아온 우울증은 그를 집어삼켰습니다. 대외적으론 소위 인싸라고 불리는 그였지만 혼자 남는 순간에는 자신을 해하고 싶은 충동과 깊이 씨름해 온 것이지요.
수차례 자해를 반복하다 위험성이 높은 자살시도로 방법이 바뀌어 갔으며, 자살시도 후 쓰러져있는 그를 지인이 발견해 응급실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부모님을 보면 무서워요. 이젠 왜 내가 죽고 싶어 하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자살 충동이 밤에 찾아오면 막연하게 창문을 보고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과 씨름해요. 친구들을 만나면 웃고 떠들지만, 그 모습을 유지하는데 온 에너지가 소모돼요. 집에 오면 다시 죽고 싶은 거죠. 살고 싶은 마음과 자살충동은 별개인 것 같아요. 한번 충동이 찾아오면 걷잡을 수가 없어요. 내가 내가 아닌 기분이에요."
가까운 친구를 병으로 갑작스럽게 떠나보내고 어린 자녀를 돌보아야 했지만, 슬픔은 걷잡을 수 커졌고 술을 의지하다 자살시도를 해 응급실로 오게 된 중년의 남성
"그냥 죽으면 편해질 수 있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 생각만 들었어요. 저도 제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조절이 되지 않았어요."
부모에게 장기간 가정폭력과 가스라이팅을 당해오다, 겨우 독립했지만 이미 무너진 자존감은 우울증을 낳았고, 수많은 자해시도와 자살시도를 반복하며 응급실에 내원한 젊은 여성
"저도 제가 너무 무서워요. 괜찮다가도, 한번 자살 생각이 들면 멈출 수가 없어요. 저도 제 자신을 컨트롤할 수가 없고, 그 순간에는 죽고 싶단 생각밖에 들지 않아요."
10분.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이 처음 자살 생각을 떠올린 뒤 시도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다...자살 생각으로 응급실을 찾은 환자들은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살고 싶어서 병원을 찾는다. 자살에 실패해서 병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살을 다시 시도하지 못하도록 막아달라는 도움을 청하러 오는 것이다.
◆ 나종호,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 中
당연히 예외적인 사례는 있겠지만, 응급실에서 만난 심한 자살 충동을 호소하는 내담자들은 '10분'에 대한 이야기에 공감을 표현했습니다. 그 순간에는 자살이라는 방법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자살 충동과 씨름해 온 내담자들이 오늘 살아서 응급실에 오기까지 얼마나 힘들게 버텨왔을까, 견디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있었을까 생각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응급실에서 만난 이들에게 안도감과 감사함, 나아가 경외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살충동과 씨름하는 지살시도자분들에게 잘 오셨다고, 지금까지 버텨주셔서 감사하다고, 다시 힘들면 꼭 응급실에 오시라고 말을 전하곤 합니다.
자살 충동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Tunnel Vision(터널 시야)에 관한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시각 장애를 설명하는 의학 용어에서 시작된 터널 시야는, 중심시야가 양호하더라도 주변시야가 손상되면 전체 시야가 점차 좁아지는 현상, 종국에는 주변시야가 좁아져 마치 좁은 빨대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느낌의 시야를 터널 시야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살 충동으로 자살시도에 이르게 되는 자살시도자도 이와 비슷합니다. 자살 외에는 다른 선택지는 보이지 않게 되며, 자신의 고통과 아픔을 멈추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죽음이라는 답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고통에 같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그 고통에 갇혔다는 느낌을 받을 때, 빠져나갈 구멍이 전혀 없다고 생각할 때 자살을 시도하 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신체적 고통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정신적 고통의 양은 정해져 있고, 그 한계에 도달하면 한계를 넘어설 무언가를 내주어야 한다. 슬프게도 너무 많은 사람이 그 대가로 목숨을 내놓는다...역설적이지만, 고통으로 정신이 소진된 사람의 생각으로는 자살은 이기적인 행위가 아닌, 정반대의 조치다.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 좋은 일을 베푸는 거라고 생각한다.
로리 오코너, 『마지막 끈을 놓기 전에 』, 66p
그래서 우리는 자살이 개인적인 '선택'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러워해야 합니다. 선택지가 하나밖에 보이지 않게 된 이들에게 자살을 선택이라고 말하는 것은, 생활비가 없어 굶주리는 사람에게 왜 밥을 사 먹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밥을 사 먹는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예전엔 미국에서 자살을 묘사하거나 설명할 때 '저지르다'라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 동사 'commit'를 사용했다. 그러다 1998년 아들을 자살로 잃은 도리스 소머-로텐버그가 처음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 commit가 주로 범죄나 살인 같은 행동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단어였기 때문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뿐만 아니라 유가족까지 부정적인 대상으로 낙인찍고 그들로 하여금 죄책감과 수치심을 유발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이제는 언론도 자살에 관한 기사를 보도할 때 채 commit 대신 '자살로 사망했다(died by suicide)'는 표현으로 대체해 사용하는 추세다.
◆ 나종호,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도서관 』 167-168p
“다시 내 가족을 못 볼 뻔했다는 게 너무 무서워요. 다행이에요, 살아 있어서.”
응급실에 온 자살시도자 대부분은 살아 있음에 안도감을 표현합니다.(물론, 자살에 실패한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들이 다시금 자살 충동과 씨름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더라도 , 작게나마 타인의 도움이 받았던 경험이 소중하다고 저는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
삶에 끝자락에서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을 압도하는 자살충동 속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자살에 대해 조금은 따뜻한 시각을 갖게 되길 바라며 글을 맺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