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고기 그리고 뒷담화 #1화

연봉킹 김과장

by 호랑영

#1화.

한 남자가 옥상 난간에 서 있었다.

그의 발밑으론 여전히 퇴근 중인 차들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드문드문 보였다.

아래를 내려보다 현기증을 느낀 남자는 난간에서 내려왔다.

그는 겉옷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불현듯 진동을 느낀 남자는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아무 메시지도 없었다.

그는 습관처럼 텔레그램에 들어갔다.

채팅방 목록 가장 위에 ‘김현수’라는 사용자로부터 읽지 않은 메시지가 쌓여있었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현수의 채팅방 위를 잠시 서성이다가 결심한 듯 눌렀다.


“오빠, 어디야?”

“답장 좀 해줘!”

“제발 전화라도 받아봐. 나 차단한 거야?”


현수라는 이름과 다르게 채팅방의 메시지는 남자를 ‘오빠’라고 부르며 애타게 찾고 있었다.

그가 메시지를 읽자마자 꼬리표처럼 달려있던 ‘1’이 사라졌다.

이내 현수에게서 비슷한 문자가 연이어 도착했다.

남자는 서둘러 채팅방을 나갔다.


현수, 아니 현지와 회사에서 몰래 즐겼던 그 모든 순간이 빠르게 그의 머릿속을 지나갔다.

계단에서, 옥상에서, 모두가 퇴근한 깊은 밤 사무실에서, 회의실에서.

생각만 해도 피가 끓는 순간들이었다.

죽음을 결심한 이 순간에도 그때를 생각하자 아랫도리로 피가 몰렸다.



“현지야….”남자는 한숨처럼 그녀의 이름을 가볍게 내뱉고 연신 윙윙거리는 휴대폰을 잠갔다.

까만 화면엔 거울처럼 그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며칠 동안 감지 않은 머리는 번지르르하게 기름져 멋대로 눌려있었고, 입가에는 수염이 까맣게 자라있었다.

그는 휴대폰을 코 앞까지 들어 눈에 낀 눈곱을 떼어냈다.

순간 의도치 않게 휴대폰 화면이 켜지며 그의 얼굴이 사라지고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는 여자와 양옆으로 여자아이 두 명이 여자의 손을 잡고 서 있는 사진이 나타났다.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었다.

그는 마치 못 볼걸 본 사람처럼 서둘러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어느새 필터 앞까지 바싹 타들어 간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끈 남자는 다시 난간 위로 발을 옮겼다.

다행히 인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는 힐끔 왼쪽 손목으로 시계를 확인했다.

7시 48분.

이미 퇴근할 사람들은 모두 퇴근했을 시간이었다.

야근을 하는 사람들조차 저녁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에 들어갈 시간이기도 했다.


그는 현기증을 느낄 틈조차 없이 몸을 던졌다.

약 3초간 여의도는 평소와 같았다.

특별한 소음도 유별난 비명도 없었다.

그러나 3초 후 ‘퍽!’하고 바닥에 강하게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여의도는 비명으로 뒤덮였다.



시끄러운 소리가 가게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가게는 오래된 듯 보였다.

에어컨은 최소 15년 이상은 된 모델이었고 원래는 하얬을 색깔이 고기 기름처럼 누렇게 변해있었다.

에어컨과 마찬가지로 오래된 TV에서는 저녁 뉴스가 흘러나왔다.


“지난밤, 여의도 모 증권 옥상에서 40대 남성이 추락해 숨졌습니다. 남성은 해당 증권사의 직원인 것으로 밝혀졌으며 추락 직후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미 숨진 뒤였습니다.”


여자 아나운서는 담담하게 사건을 전했다.

그 무미건조한 문장이 오히려 실내의 소음을 뚫고 은유의 귀에 도착했다.

방금 막 건배를 한 그는 술을 마시다 말고 TV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면에서는 구급차와 병원의 모습이 지나가는 중이었다.

은유의 시선에 같이 있던 금강과 미나도 TV를 쳐다봤다.


“아, 저거. 유명한 사람이잖아.” 금강이 말했다.

은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 사람이 누군데?” 은유가 말했다.

“저 남자, 더원인베스트먼트 김봉연 과장이잖아. 너 몰라?” 금강이 말했다.

“얘는 이런 거 몰라.” 미나가 말했다.

은유는 이번엔 반대쪽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얘는 진짜 그런 거 모른대도.” 미나가 금강을 타박하듯 말했다.

“답답하네.” 금강은 고기를 뒤적거리다가 말했다. “저 남자 여의도 연봉 이거잖아.” 금강은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작년 여의도 연봉 탑 3가 저 과장이었지.” 미나가 보충 설명을 하듯 말했다.

“과장급인데 사장, 회장 다 재치고 작년에 받은 연봉만 70억이라던가?” 금강이 연이어 말했다.


은유는 모두 처음 듣는 얘기였다.

더원인베스트먼트 건물은 그가 다니는 회사 바로 맞은편에 있기에 이름만 익숙했을 뿐이었다.

그곳에 있는 과장이 연봉 킹인지 봉연 킴인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근데 왜 자살한 거야? 그렇게 연봉도 많이 받는 사람이.” 은유가 말했다.

“고작 과장급이 어떻게 그렇게 높은 연봉을 받았는지 궁금하지 않아?” 금강이 말했다.

“...” 은유는 입을 닫았다.

“마약에 손을 댔대.” 미나가 말했다. “성과를 높이려고 마약까지 하고서 트레이딩을 했다고 하더라.”

“마약...” 은유가 작게 읊조렸다.

“내가 말하려고 했는데!” 금강이 아쉬운 듯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사내에서 엄청 문란했다더라. 회사에서 몰래 만나는 여자만 5명이 넘었대. 블라인드에는 온통 저 사람 얘기뿐이야.” 금강이 말했다.

“불륜…?” 은유가 말했다.

“남자가 유부남이었으니 불륜이 맞지. 여자들은 유부녀도 있고 싱글도 있고, 곧 결혼을 앞둔 여자도 있었다나 뭐라나.” 미나가 말했다.

“만나던 여자 중 한 명이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블라인드에다가 폭로한 거지. 본인도 욕먹을 각오를 하고서 말이야. 불륜 썰로 시끄러워지니까 회사도 체면을 차리려고 감사부에서 조사를 시작했는데, 이게 웬걸 불륜 대상이 하나가 아니었네? 심지어 캐비닛에 숨겨둔 마약까지 나왔어? 이렇게 되니 더 이상 덮을 수가 없었던 거야. 저 과장이 돈이 모자라겠어 뭐가 모자라겠어. 회사에서 명예는 바닥에 떨어졌지, 마약 한 사실도 들통나서 이제 감옥에 갈 일밖에 없었던 거야. 어렵게 일군 회사에서의 평판도, 그동안 받았던 연봉도, 행복해 보이는 가정도 모두 부서질 일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모든 걸 잃었다는 좌절감에 결국 자살한 게 아닐까?” 금강이 말했다.

“모르긴 모르지만 다들 그렇게 생각할 거야.” 미나가 말했다.


은유는 모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연봉킹, 여자, 불륜, 마약, 자살…. 모두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자신과 이렇게 가까운, 매일 출근하는 건물 맞은편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은유는 이미 다 타버린 삼겹살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그들이 대화하는 사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은 불판은 고기를 모두 까맣게 태워버렸다. 은유는 그 까만 고기 조각을 생각 없이 씹었다. 특별한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선 방금 들었던 대화가 계속해서 재생되고 있을 뿐이었다.


“야, 야. 다 탄 걸 왜 먹어.” 미나가 은유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여기 불판 갈아야겠다.”

“불판 갈고 고기도 더 시키자. 이건 못 먹겠네.” 금강이 말했다.

한참을 질겅대던 은유는 소주와 함께 고기를 삼켜버리고는 말했다.

“우리 회사에는 저런 일이 없어서 다행이야.”

그의 말에 금강과 미나는 서로를 쳐다보고는 이내 폭소했다.

갑자기 그들이 웃어대는 통에 은유는 어안이 벙벙했다. 자기가 못 할 말이라도 했는지 생각해 보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아는 한 정말로 그가 다니는 회사에선 저런 자극적이고 끔찍한 일은 없었다.


한참을 웃던 금강은 숨이 넘어갈 듯 꺽꺽대며 눈물을 훔쳤다.

“너 진짜 그렇게 생각해?” 금강이 말했다.

“둔해도 이렇게 둔할 수가 있나.” 미나가 말했다.

“아니, 왜. 정말로 우리 회사는 깨끗하잖아.” 은유가 말했다.

“너 그 얘기 몰라?”

금강이 얘기를 시작하려는데 주문한 고기가 도착했다. 그들은 종업원이 불판을 가는 동안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이윽고 불판이 새것으로 바뀌고 주문했던 생목살을 그 위에 올려놓자 ‘치이익’ 소리와 함께 고기가 빠르게 익어갔다.

“그래서 너 그 얘기 몰라?” 금강이 다시 말했다. “서대리 이야기.”

그의 말에 은유의 귀가 쫑긋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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