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LOVE 강민
6화
“그건 좀 억측이라고 생각한다야.”
금강이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말했다.
한참을 집중하며 들었던 탓에 어깨와 허리가 뻐근했다.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단지 같은 냄새가 났다는 ‘추측’만으로 두 사람이…”
은유가 말을 끝내기 전에 금강은 무언가 생각난 듯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듣고 보니 한 가지 기억나는 게 있다야. 서대리와 한팀장.”
은유는 귀가 쫑긋해서 몸을 테이블 위로 더욱 숙였다.
“예전에, 언제였지? 작년 이맘때쯤인가, 서대리와 한팀장이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같이 내리는 걸 본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야. 서대리가 내릴 때 한팀장이 막 부축하면서 에스코트를 해줬다던가? 물론 그 사람이 제대로 본 게 맞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네 얘기를 듣다 보니 기억났다야.”
은유는 금강의 얘기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렇다면 내가 느꼈던 그 미묘한 감정도 어쩌면 영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겠네?”
“그치만 아무런 증거가 없다야. 두 사람이 같이 있는 사진을 찍은 것도 아니고, 너도 그저 냄새만 맡았을 뿐이잖아.”
금강은 빨대를 ‘쪼옥’ 하고 빨아 남은 음료를 다 마셔버리고는 말했다.
“게다가 한팀장은 와이프랑 애도 있다야. 와이프가 갑상선암에 걸려서 아프다고 들었다야. 설마 그런 사람을 두고 바람을 피우겠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짐승새끼지.”
은유는 금강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완전히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그의 마음속에는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의심의 불꽃이 꺼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건 네 말이 맞다. 그만 일어나자. 벌써 5시네. 우리 너무 오래 나와 있었어. 이따 저녁에 애들 모이는데 너도 오지?”
“당연히 가야지! 내가 낸 회비가 얼만데. 오랜만에 양고기로 기름칠 좀 하겠다야.”
은유와 금강은 카페를 나서 사무실로 향했다.
은유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는 여전히 서대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친절했던 모습, 머리를 쓸어주던 손길, 갑자기 냉담한 반응과 한팀장.
이 모든 것이 그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떠다녔다.
•
가게 안은 회식을 온 직장인들로 가득 찼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와 고기 굽는 소리, 그리고 계속해서 술을 가져다 달라는 주문 소리로 시끄러웠다.
은유는 그런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양꼬치 하나를 30분째 먹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자, 자. 잔들 채워.”
동기 회장인 형식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우리 입사한 지 벌써 4년이 넘어가면서 참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는 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올 한 해 웃는 일도 많고 우는 일도 많았겠지만 어쨌든 기운 달이 다시 차듯 우리의 인생도 계속해서 좋고 나쁨이 반복되며 어떻게든 나아갈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각설하고 다들 고생했다는 의미로 건배합시다. 건배!”
세 테이블에 나눠 앉은 12명의 사람들이 각자의 잔을 들고 건배를 외쳤다.
은유도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소주잔을 들었다. 하지만 건배를 외칠 기분이 나지 않았다.
형식이 은유의 옆자리에 앉으며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우리 은유, 여자친구는 생겼나?”
“여자친구는요, 무슨.”
“오늘따라 말이 더 없어. 여친이랑 싸운 거 아니야?”
“형, 얘 여친 없어요.”
금강이 거들었다.
“그럼 네가 여자라도 한 명 소개해 줘. 애가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여자친구도 없어. 게이 아니야?”
“저 올해 초에 헤어진 거 아시잖아요. 지금은 그냥 혼자가 편해요.”
은유가 잔을 비우며 말했다.
“야, 그러다가 너 시기 놓치면 평생 혼자 사는 거야. 지금 네가 몇 살이지?”
“30살이에요. 이제 해 넘어가면 31살.”
“너 이제 어린 나이 아니야. 지금 만나서 연애 조금 하고 결혼하면 금방 33, 34살이다? 진짜 형이 너 걱정돼서 하는 소리야.”
형식은 30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이미 소주를 한 병이나 비워 입에서 알코올 냄새가 풍겼다.
은유는 ‘이 형 취했네’ 하며 한참 뒤적거리던 양고기 조각을 입에 넣었다.
“그럼 내가 너 여자 소개해 줄까? 야, 솔직히 네 정도면 여자가 줄을 서야 돼. 근데 너는 왜 이렇게 꾸미 지를 않냐.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말이야. 옷도 좀 사 입고 머리도 자르고 눈썹 정리도 하고 스킨케어도 받고 그래라. 내가 너처럼 생겼으면 맨날 꾸며 입고 이태원 강남 갔겠다.”
“맞아요. 은유 오빠가 안 꾸며서 그렇지 가만 보면 되게 잘생겼는데. 얼굴도 작아서 비율도 좋잖아요.”
맞은편에 앉은 나영이 거들었다.
“제가 봤을 땐, 딱 머리 자르고 옷만 바꿔 입어도 충분할 것 같아요. 다른 건 이제 그때그때 봐가면서 하면 되고. 근데 은유 오빠 로션은 바르는 거야? 얼굴이 하얗게 일어나서 꼭 때 낀 것 같아.”
은유는 손으로 턱과 뺨을 쓰다듬었다.
나영의 말마따나 피부가 거칠었다.
“아침에 바르긴 했는데… 어제 잘 못 자서 더 그런가 봐.”
“아깝다 아까워! 내 남자친구가 오빠 정도만 생겼으면 벌써 결혼했을 텐데.”
나영이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됐고, 우리 술이나 한 잔 더 하자. 은유 너는 소주? 나영이는 당연히 쏘맥이지?”
형식의 말에 나영이 ‘당연하죠! 오늘 죽을 때까지 달리는 거예요!’ 라며 신나게 잔을 채웠다.
은유는 잔이 채워지는 것을 보면서도 여전히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네 사람은 다시 건배를 하고 잔을 모두 비웠다.
형식은 옆 테이블의 미나 옆으로 가서 앉았다.
“근데 너 진짜 만나는 사람 없어?” 금강이 물었다.
은유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형식이 형 말대로 네 외모가 아깝다야. 키도 크기 않아? 네가 180이던가?”
“178.”
은유는 짧게 말했다.
“그럼 그냥 180이라고 해라야.”
“아니면 요새 관심 있는 사람은 없어요, 오빠?”
나영의 말에 은유는 괜히 뜨끔했다.
속으로 서대리를 생각했다가 이건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되지 하고 침을 삼키듯 말을 집어넣었다.
“혼자가 편해.”
“에이, 나이 서른 먹고 혼자인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니면 내 친구라도 소개해 줘?”
나영은 술이 취하는지 점점 말이 짧아졌다.
“됐다. 네 친구면 다 24살일 거 아니야. 너무 어려.”
“어리면 좋지!”
“그럼 나도 소개해 줘라야.”
금강이 끼어들었다.
“오빠는… 음… 미안해! 나는 키 큰 남자가 좋아서.”
“내가 너 소개해 달라고 했어? 네 친구 소개해 달랬지. 참 나 어이가 없다야.”
“내 친구들도 다 나랑 똑같아서 그래.”
은유는 금강과 나영이 투닥거리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 둘이 잘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둘의 모습에 자신과 서대리를 대입해 보고는 살짝 웃고 말았다.
“어? 오빠. 오늘 회식 와서 처음 웃은 듯?”
나영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은유는 몰래 웃은 게 멋쩍어 괜히 정색하고는 허겁지겁 양꼬치를 가져왔다.
오늘따라 술맛이 단 게 왠지 취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
밤 9시 여의도의 길거리는 한산했다. 하지만 가게들은 저마다 손님으로 가득했다.
‘연말은 연말이네.’
은유는 거리에 가득한 한기와 문 닫힌 실내에서 은근히 뿜어 나오는 소란을 눈을 감고 느꼈다. 그의 코에 영하 4도의 공기가 들어왔다 나가며 하얀 증기가 되었다.
“여기서 뭐 해?”
금강이 은유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잠깐 바람 쐬러 나왔어.”
“많이 마셨다야. 너도 꽤 마셨지?”
“어… 좀 취하네.”
금강은 은유에게 담배를 건넸다.
은유는 사양했다.
“별일이 다 있다야.”
금강은 혼자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은유는 그의 옆에 서서 멀뚱히 도로를 바라봤다.
신호를 기다리는 차 몇 대가 서 있을 뿐이었다.
은유는 갑자기 생각난 듯 금강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 화장실 좀…”
금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유는 빠르게 걸어 이내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화장실이 저쪽인가?’
금강은 속으로 생각했다.
은유는 괜히 발걸음을 서둘렀다. 쫓기는 사람처럼.
•
회사에 도착한 은유는 불 꺼진 사무실을 두리번거렸다.
비상등 조명과 창밖에서 흘러드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으로 겨우 의자와 책상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은유는 먼저 자신의 자리로 갔다.
사무실엔 아무도 없었지만 혹여나 누구를 마주친다면 자신의 책상에 볼일이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의자를 집어넣은 책상 뒤에 서서 빼꼼히 둘러보니 역시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은유는 살금살금 한팀장의 책상으로 향했다.
그의 자리에는 어지럽게 포스트잇과 문서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오늘 그가 컨펌을 받은 차년도 사업계획서 또한 책상 위에 있었다.
다 마시고 치우지 않은 테이크아웃 커피와 필통에 꽂혀 있는 모가 닳아버린 칫솔도 보였다.
‘지저분한 사람이네.’
은유는 책꽂이 옆에 놓인 액자를 들어 쳐다봤다.
한팀장의 아내와 아이로 보였다.
아이는 아직 2살이나 됐을까 싶은 모습이었다.
그의 와이프로 추정되는 여자가 아기띠에 아기를 앞으로 메고 한 손에 커피잔을 든 채 웃고 있었다.
‘이 여자가 암에 걸렸다고?’
그 생각을 하고 보니 어쩐지 여자가 아파 보이는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은유는 액자를 제자리에 두고 다시 발소리가 나지 않게 옆 부서로 향했다.
문을 열고 밝히 환한 복도를 지나쳐 다시 옆 부서의 문을 여는 동안 심장이 벌렁거렸다.
꼭 마침 어제 이곳에서 서대리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없었으면 좋겠지만 괜히 서대리를 한 번 더 마주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은유는 낯선 부서에서 서대리의 명패를 찾아 그녀의 자리로 찾아갔다.
서대리의 자리는 깨끗했다.
물건은 모두 제자리에 놓여 있었고 책상 위에 불필요한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키보드에는 덮개를 씌워 놓아 먼지가 쌓이는 것을 방지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가지런히 정리된 그녀의 자리에 유독 눈에 띄는 것은 벽면에 붙여 놓은 사진이었다.
스티커 사진인가 싶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WE LOVE 강민]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은유의 기억으로는 ‘WE LOVE’라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 중 하나였다.
‘서대리는 이런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은유는 사진을 들고 한참 바라보다가 수납장 쪽으로 손을 옮겼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그는 다시 원래 자리에 돌려놓은 뒤 사무실을 나섰다.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던 그는 서대리의 자리로 뛰어들어왔다.
은유는 사진 속 예쁘장한 남자 연예인을 한참 노려보았다.
질투인지 동경인지 모를 묘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은유는 홀린 듯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찰칵. 정적을 깨는 셔터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은유는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의 핸드폰 안에는 서대리의 사적인 취향이 담긴 작은 사진 한 장이 박제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