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안쪽
자리에 돌아온 은유는 의자에 몸을 던지듯 앉았다.
의자가 짧게 삐걱거렸다.
책상 위 문서는 이미 문서라 부르기 어려웠다.
빨간 밑줄과 까만 주석이 여기저기 얽혀 있었고, 원래 문장은 그 사이에서 겨우 형태만 유지하고 있었다.
팀장은 오전 내내 그 종이를 들고 있었다.
틀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이건 좀 다르지 않나”, “이 방향은 아닌 것 같은데” 같은 말만 반복했다.
결국 다시 쓰라는 뜻이었다.
은유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머리는 맑았다.
짧게나마 깊이 잠들었고, 휴게실에서 서대리를 마주쳤을 때의 잔열도 남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머릿속이 다시 어질러진 느낌이었다.
정리해 둔 생각 위를 누군가 신발 신고 밟고 지나간 것처럼.
은유는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때 아주 미세한 감각이 스쳤다.
‘이상하다.’
냄새였다.
은유는 숨을 한 번 더 들이마셨다.
사무실 특유의 공기, 종이 냄새, 토너 냄새 사이로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해서 바로 떠오르지 않는 냄새였다.
은유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페이지를 넘기는 척하며 종이를 코 가까이 가져갔다.
확신은 그 순간 왔다.
‘서대리.’
서대리의 향수 냄새였다.
지난밤 맡았던 바로 그 냄새임을 은유는 확신했다.
심장이 한 박자 빨라졌다.
은유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팀장은 여전히 모니터 뒤에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정수리만.
그런데 이상했다.
지난밤 복도에서 스쳐 지나갈 때.
조금 전 휴게실에서 그녀가 가까이 섰을 때.
그리고 방금, 팀장이 바로 옆에 서 있었을 때.
셋 다 같은 냄새였다.
‘말이 되나.’
은유는 펜을 내려놓았다.
보고서 위에서 손이 멈췄다.
가능성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튀어나왔다가 사라졌다.
우연. 같은 향수. 엘리베이터. 회의실. 커피.
어느 것도 깔끔하지 않았다.
은유는 메신저를 열었다.
이 생각을 혼자 붙들고 있으면, 더 깊이 들어갈 것 같았다.
⸻
경영지원부 경영지원팀 표은유 대리
미나야
미나야!
미나야!!!
전략기획부 기획조정팀 강미나 대리
왜
어휴
메신저로도 시끄럽네
경영지원부 경영지원팀 표은유 대리
하나만 물어볼게
중요한 거야
전략기획부 기획조정팀 강미나 대리
벌써 무섭다
뭔데?
경영지원부 경영지원팀 표은유 대리
서대리님
오늘 점심 약속 있었어?
전략기획부 기획조정팀 강미나 대리
응
오늘 우리 티 주니어들끼리 밥 먹는 날이었어
너 세통이네 떡볶이 가봤어?
진짜 진짜 맛있는 즉석 국물 떡볶이집인데
경영지원부 경영지원팀 표은유 대리
아 그랬구나
난 떡볶이는 좀...
근데 혹시 우리 팀장님도 같이 가셨어?
전략기획부 기획조정팀 강미나 대리
아니
왜 자꾸 그분 얘기가 나와
⸻
은유는 답장을 보자마자 메신저를 닫았다.
보고서 여백에 적어 두었던 ‘1번 가설’에 선을 그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였다.
은유는 EP에 접속해 당직 일람표를 열었다.
12월.
손가락이 멈춘 날짜.
12월 13일.
평일 당직 – 한태산.
은유는 화면을 한동안 바라봤다.
지난밤.
의문스러운 차림의 서대리.
그리고 지금, 한팀장에게서 나는 같은 향.
생각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기분이 나빴다.
서대리는 법인카드를 가지러 온 게 아니었다.
누군가를 만나러 온 거였다.
회사에서.
밤에.
은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모니터 위로 두 눈이 마주쳤다.
한태산 팀장의 눈이었다.
은유는 심장이 내려앉는 걸 느끼며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 말도 없었다.
그래서 더 불편했다.
그는 보고서를 붙잡았다.
수정하는 척. 집중하는 척.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이미 결론을 향해 미끄러지고 있었다.
잠시 뒤 은유는 탕비실로 몸을 피했다.
컵에 물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아직은 추측이다.’
스스로를 말렸다.
증거는 없었다. 냄새와 당직표. 그뿐이었다.
은유는 컵을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확증이 필요해.’
⸻
“진짜야. 걔가 나한테 관심이 있다.”
금강이 은유의 등을 툭 치며 말했다.
“밥 먹을 때 눈빛이 장난 아니었다야. 네가 봤어야 했다.”
은유는 친근함이 섞인 경멸의 눈으로 금강을 봤다.
“너 그러다 신입들한테 껄떡대는 걸로 찍힌다.”
“아니 이번엔 진짜 다르대도! 너 사람 말 진짜 안 믿는다야.”
금강은 신이 나 있었다.
오후 4시 12분.
두 사람은 사무실 앞 카페로 향하고 있었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순간,
은유의 시선이 멈췄다.
빨간 코트.
밤색 어그부츠.
서대리였다.
그녀는 카페 쪽이 아니라 건물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었다.
은유는 말없이 금강의 팔을 잡아당겼다.
금강이 그제야 시선을 옮겼다.
“서대리?”
은유는 그렇게 말없이 먼저 걸었다.
금강은 잠깐 망설이다가 따라왔다.
건물 뒤편 주차장.
흡연 금지 표지판 아래, 늘 그렇듯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가장 안쪽.
서대리가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연기가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은유는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이상하게 안도했다.
확인됐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담배를 피웠다.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지만 눈과 귀는 서대리를 향해 있었다.
잠시 후 서대리가 돌아섰다.
은유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안녕하세요.”
은유가 먼저 말했다.
한 박자 늦게 서대리가 대답했다.
“… 안녕하세요.”
서대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담배 피우는 거
아무한테도 말씀 안 해주셨으면 해요.”
부탁처럼 들렸지만, 부탁은 아니었다.
그녀는 더 말하지 않고 돌아섰다.
빨간 코트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금강이 낮게 말했다.
“와. 분위기 살벌했다야.”
은유는 서대리의 반응에 얼어버렸다. 지난밤, 그리고 아까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손을 잡고 일으켜주며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던 감각이 선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한겨울 바람보다도 차가운 반응에 그는 어쩔 줄을 몰랐다.
“야.”
금강이 얼어 있는 은유를 깨우며 말했다.
“정신 차려라, 야“
은유가 고개를 들었다.
“나... 재밌는 일을 겪었어”
은유는 잠깐 뜸을 들였다.
“…”
금강은 말을 잇지 않는 은유를 보며 화내듯 말했다.
“재밌는 일이 뭔데? 얘기를 해!”
은유는 짧게 숨을 내쉬고 다시 걸었다.
“일단 커피부터 사.”
카페 쪽으로 향하는 동안, 그의 가슴속에서는 이미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소문이 될 준비를 마친 생각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