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고기 그리고 뒷담화 #4화

이독제독

by 호랑영

은유는 뜬눈으로 누워 있었다.

평소에도 간혹 잠이 안 오는 날이 있긴 했지만, 이번엔 결이 달랐다.


머릿속에선 지난밤 장면이 끊임없이 재생됐다.

문이 안쪽으로 열리던 순간의 놀람, 넘어진 나를 붙잡아주던 그 차가운 손, 바로 눈앞에서 보았던 얼굴, 그리고 자신을 지나쳐 복도로 사라지던 뒷모습과 그 뒤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향기까지.


아무리 지우려 해도 색이 빠지지 않는 장면이었다.


어떻게든 다른 생각을 해보려고 쓸데없이 유튜브도 켰다가, 뉴스도 몇 개 클릭해 보다가, 몇 년은 들춰보지도 않던 책까지 꺼내 봤다.

그러나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페이지 위로 서지안의 얼굴만 떠다녔다.


알람이 울리기까지 남은 시간은 1시간.

창밖은 아직 어둑했지만, 곧 출근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목덜미를 누르는 것 같았다.


한숨도 자지 못한 탓에 몸은 이미 퇴근한 지 오래였다.

눈꺼풀은 모래주머니를 단 듯 무거운데, 막상 눈을 감으면 머릿속 스크린에서 그녀가 재생됐다. 정지 버튼이 고장 난 느낌이었다.


결국 은유는 벌떡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독제독이라 했지…’


그는 심각하게 생각했다.

머릿속 영상을 지우려면, 더 센 걸로 덮어씌우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숙련된 동작으로 VPN을 켜고, 손가락이 기억하는 주소를 브라우저에 입력했다.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내린 뒤, 그는 놀라울 정도로 진지한 표정으로 살색의 썸네일들을 검토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오늘 하루가 이렇게 망가질 줄은 몰랐다.



“너 눈이 왜 이렇게 새빨개? 잠은 잔 거야?”


금강의 목소리가 아침 공기를 갈랐다.


“아니, 한숨도 못 잤어.”

은유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금강이 담배 연기를 길게 뿜더니 턱을 까딱였다.


“무슨 일 있었어? 어제 야근한다더니. 몇 시까지 일한 거야?”


“들어가긴 일찍 들어갔지. 10시쯤 퇴근해서, 집 도착하니까 11시더라.”


“가서 야동이라도 본 거야? 잠은 안 자고 뭐 했대?”


“…”


은유는 대답 대신, 반도 못 핀 담배를 비벼 껐다.


금강이 피식 웃었다.


“이 새끼, 진짜로 봤나 보네. 작작해라야~ 우리 이제 예전 같지 않아서 진짜로 뼈 삭는다야.”


“뭘 하면 뼈가 삭아?”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끼어들었다.

둘 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미나가 어느새 두 사람 어깨에 팔을 걸고 있었다.


“아, 아니. 은유가 잠을 못 잤다길래. 잘 자야 키가 큰다고…” 금강이 얼버무렸다.


“서른 넘어도 키가 크나?”

미나는 자신의 머리 위에 손을 대고 키를 재는 시늉을 했다.


“너는 담배도 안 피우면서 왜 흡연장에 있어?”

은유가 어깨 위에 올라탄 미나의 팔을 떼며 말했다.


“그냥, 너희가 보이길래 왔지!”


“담배 냄새 옮아, 좀 떨어져. 벌써 58분이네. 늦겠다, 이제 들어가자.”

은유가 정문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 빨리 안 가면 팀장이 또 지X하겠다야. 나 먼저 들어간다야!”


금강은 허겁지겁 담배를 비비고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저럴 거면 일찍 오던가…”

은유가 중얼거리자, 미나가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우리도 얼른 들어가자.”


“그래.”


잠깐의 정적 뒤에 미나가 슬쩍 물었다.


“근데 너 어제는 왜 못 잤어?”


은유는 대답이 목구멍에서 걸렸다.

하루 종일 서대리 생각만 하느라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는 말도,

결국 참다 참다 야동 보고 자위하고 나서야 겨우 30분 눈을 붙였다는 말도,

어느 쪽도 이 아침 공기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어… 불면증! 불면증이 요즘 좀 있어서. 가끔 그래. 맞아, 불면증.”


“흠, 그래? 나도 예전에 불면증으로 고생 좀 했는데. 그거 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그래.”


미나의 말에 은유는 속으로 뜨끔했다.


“마그네슘 챙겨 먹고 자기 전에 따뜻한 목욕하는 게 도움 된다?”


“어, 어… 그렇게 해볼게. 우리도 얼른 들어가자.”


은유는 서둘러 미나의 팔을 잡아끌며 로비 안으로 들어갔다.

반쯤은 정말 늦을까 봐였고, 반쯤은 더 캐물으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경영지원부 경영지원팀 표은유 대리

졸려 죽겠다

점심시간 언제 오냐?


시스템운영부 전산팀 김금강 대리

앞으로 한…3분 뒤야

어제 대체 뭘 한 거야?

네가 선택한 불면이다야

버텨!


경영지원부 경영지원팀 표은유 대리

선택하지 않았습니다만…

나 오늘은 점심 안 먹고 바로 휴게실 가서 한숨 자야겠다

진짜 쓰러질 것 같아


시스템운영부 전산팀 김금강 대리

그래라

나는 오늘 귀여운 신입들하고 점심 약속 있다야

혹시 또 아냐, 신입하고 잘 될 수도 있잖냐?


경영지원부 경영지원팀 표은유 대리

하여간 부지런한 새끼

어느 정신 나간 신입이 우리 연차에 관심 있다고 어휴

우리 아저씨야, 정신 차려!

헛짓거리 하지 말고 점심 맛있게 먹어라


메신저 창을 닫으며 은유는 손목시계를 흘끗 봤다.


점심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2분 27초.

그 2분이 2시간처럼 느껴졌다.


오전 내내 그는 감겨오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다가 이마에 주름이 생길 지경이었다.

속으로 아무리 “빨리 12시 돼라…” 기도해도, 시계 초침은 교과서처럼 정직하게 움직일 뿐이었다.


마침내 12시.


은유는 총알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힐끔 보며 ‘저렇게까지 피곤한가?’ 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에게는 오직 하나 리클라이너만이 중요했다.


휴게실 문을 열자 고요한 정적이 그를 반겼다.

사람 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그는 불을 끄고 커튼을 쳐버렸다.


‘완벽하다.’


잠자기 최적의 환경을 만든 그는 휴게실 가장 구석에 있는 리클라이너로 다가갔다.

예상한 대로 자리는 비어 있었다.


출근 후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 미세한 웃음이 떠올랐다.

이 컨디션이면 눕자마자 기절이겠다 싶었다.


쿠션을 머리 밑에 놓고 누우며 에어팟을 귀에 꽂았다.

유튜브 뮤직에서 ‘빗소리 ASMR’을 검색해 한 영상을 재생하고 노이즈 캔슬링을 켰다.


‘살 것 같다…’


그는 곧장 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무슨 생각해?”


서지안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은유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그는 한강변을 걷고 있었다.

옆에는 서대리가 팔짱을 끼고 붙어 있었다.


“아… 날씨가 좋다는 생각을 했어.”

은유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치? 오늘 날씨 진짜 최고다! 오빠랑 이렇게 산책하니까 참 좋아.”


서대리가 더 바짝 붙으며 말했다.

팔 안쪽으로 느껴지는 체온과 살결의 감촉이 묘하게 현실감이 있었다.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더라?’

생각을 더듬으려는 순간—


“또, 또! 오빠 딴생각하지?!”


서대리가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입이 본드로 봉해진 사람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목 안에서 이상한 소리만 새어 나왔다.

말이 아니라 짐승의 그르릉거리는 소리 같은 것이었다.


서대리는 점점 더 세게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 움직임에 맞춰 발밑 한강물이 요동치더니,

잔잔하던 강물이 갑자기 커다란 파도처럼 변했다.


은유는 속으로 ‘그만해!’라고 외쳤다.

그러나 입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거대한 물벽이 눈앞까지 밀려와 그를 덮치려는 순간—



“…리님. 대리님. 은유 대리님!”


낯익은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걷혀 있는 커튼 때문에 맞은편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은 역광 속에 뭉개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유는 직감했다.


서대리였다.


은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까지 한강에서 파도에 휩쓸리던 장면이 한순간에 회의용 의자와 리클라이너로 바뀌었다.


“끄으으응…”


목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먼저 새어 나왔다.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짐승 같은 소리에 그는 스스로도 놀랐다.


서지안은 그 소리에 입을 가리고 웃었다.


“풋… 죄송해요, 제가 너무 심하게 흔들었나 봐요.”


그녀는 지난밤처럼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대리님, 벌써 1시 10분이에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벌써 점심시간이 지났다고?!’


목이 잠긴 목소리로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 감사합니다. 덕분에…”


서대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얼마나 주무신 거예요? 커피 뽑으러 왔다가 코 고는 소리에 들여다봤더니 대리님이시더라고요. 제가 방해한 건 아니죠?”


은유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는 정신없이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허리 굽혀 인사를 한 뒤 서둘러 휴게실 문 쪽으로 걸어갔다.


“대리님!”


서지안이 그를 불렀다.

놀라서 돌아보는 순간, 그녀의 손이 불쑥 그의 뒤통수로 다가왔다.


부드러운 손바닥이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순간, 은유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시뮬레이션이 재생됐다.

‘이거… 설마… 스킨십…? 호감? 장난? 나한테 먼지라도 묻었나?’

100가지 가설이 동시에 떠올랐지만, 정답은 어느 쪽에도 없었다.


미스터리는 곧 풀렸다.


“머리가 까치집이에요.”

서지안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뒤통수 정리는 하고 나가셔야 할 것 같아서요. 혹시... 기분 나쁜 건 아니죠?”


“아, 아니에요! 오히려 감사하죠.”

은유는 얼굴이 토마토처럼 빨개진 채 대답했다.


“오른쪽 눈에 눈곱도 떼고 가세요.”


마지막 한마디에, 그는 서둘러 휴게실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터덜터덜 걸어가며 그는 오른쪽 눈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왠지 심장이, 쿵쾅쿵쾅 대는데, 발 끝부터 눈곱을 떼는 손끝까지 피를 끌어 모이는 느낌이었다.


숫총각도 아니었건만,

기분은 마치 고등학생 시절, 처음으로 여자 손을 잡던 순간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자리에 돌아와 앉으니 그의 머릿속 구석에서 아까부터 맴돌던 위화감이 다시 떠올랐다.


‘아, 그거다.’


그는 메신저를 열어 미나에게 말을 걸었다.


경영지원부 경영지원팀 표은유 대리

미나야

서지안 대리님 오늘 출장 아니야?


전략기획부 기획조정팀 강미나 대리

지안 대리님?

흠… 출장이라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잠깐 기다려봐 확인해 볼게


전날 밤, 서대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일 출장인데, 법인카드를 깜빡해서요. 잠깐 가지러 왔어요.”


틀림없이 ‘다음 날 출장’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간에 사무실에 있을 리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전략기획부 기획조정팀 강미나 대리

아니야, 오늘 출장 보고 올라온 건 없어

지안 대리님뿐만 아니라 오늘은 아무도 출장 가는 사람 없어

그런데 그건 왜?


경영지원부 경영지원팀 표은유 대리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확인해 줘서 고맙다


잠시 멈춤 표시가 뜨더니, 다시 미나의 말풍선이 이어졌다.


전략기획부 기획조정팀 강미나 대리

냄새가 난다

수상한 냄새가 나!

네가 지안 대리님한테 갑자기 왜 관심을 가질까?

둘이 원래 알고 지내는 사이야??


경영지원부 경영지원팀 표은유 대리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아까 휴게실에서 서지안 대리님을 마주쳐서

어디선가 대리님이 오늘 출장이란 얘기를 들었어 가지고

내가 잘못 들었나 보다


메신저 창을 닫고 나서야, 의문은 오히려 더 짙어졌다.


서대리는 어젯밤, 법인카드를 가지러 회사에 온 게 아니었구나.


‘출장’은 그저 설명하기 편한 이유,

혹은 굳이 말하고 싶지 않은 사정 대신 꺼낸 말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그가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서지안의 진짜 목적도, 그날 밤 어디에 다녀오는 길이었는지도.


그는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봤다.

화면 속 자신의 얼굴 위로 삐져나온 머리카락 몇 가닥이 어색하게 떠 있었다.


뒤통수에 남아 있는 따뜻한 감촉이, 마치 실제 손처럼 느껴졌다.


은유는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쓸어내리다가, 또 하나의 단서를 떠올렸다.


‘옷이다.’


서대리가 입고 있던 옷이, 전날 밤과 똑같았다.

코트는 벗고 있었지만,

검은색 목티, 몸에 붙는 청바지, 어그부츠까지—


그가 문 앞에서 마주쳤을 때 보았던 차림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순간, 은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변 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꽂혔다.

그는 머쓱해져서 다시 앉으려는 참이었다.


“표 대리.”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유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깐 좀 보자.”


그는 잽싸게 일어나 팀장 자리로 향했다.

뒤통수에는 여전히, 누군가의 손길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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