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고기 그리고 뒷담화 #3화

돈 들어오는 날

by 호랑영

“휴—”


압력솥 같은 지하철에서 빠져나온 은유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으로 꽉 찬 지하철 안에서 고온 고압에 삶아지는 쌀알이 된 기분이었다. 벌써 4년째 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지만, 출퇴근길 지하철만큼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와 함께 ‘압력솥’에서 튀어나온 쌀알들—아니, 직장인들—이 일제히 계단을 향해 뛰기는 모습을 보고 은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여의도역 출구로 나오자 찬 기운이 얼굴을 때렸다.

겨울이라고 냉방도 틀어주지 않는 지하철 안에서 겉옷도 벗지 못하고 서 있던 탓에 등에 땀이 맺혔다. 그 땀은 차가운 공기를 만나자마자 김을 피우며 날아갔다. 은유는 몸서리를 치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고개를 숙인 채 걸었다.


이어폰에서는 버즈의 ‘가시’가 흘러나왔다.

‘그대 기억이~’를 속으로 외치며 감정 몰입하던 찰나, 누군가 그의 어깨를 ‘툭’ 잡았다.


은유는 화들짝 놀라 뒤를 홱 돌아봤다.


금강이었다.


“왜 이렇게 놀라?” 금강이 말했다.


“인기척 좀 내고 와라. 유령이야?” 은유가 이어폰을 뽑으며 말했다.


“뒤에서 네 이름을 세 번이나 불렀거든? 도대체 뭘 듣고 있는 거야.” 금강이 그의 이어폰을 빼서 자기 귀에 꽂았다.


잠시 후 금강의 얼굴에 짙은 실망이 내려앉았다.


“어휴… 누가 아저씨 아니랄까 봐. 이런 옛날 노래나 듣고 있네.”


“요즘 노래는 가사가 안 들려. 그리고 너나 나나 동갑이거든?” 은유가 투덜댔다.


“최신 곡도 좀 들어. 언제까지 15년 전 노래 들을래.” 금강이 이어폰을 건네며 말했다. “그나저나, 연봉 인상분 들어왔더라?”


그 말에 은유의 귀가 쫑긋했다.


“벌써 시기가 그렇게 됐어? 어디 보자… 얼마나 들어왔는지 한 번 보자~”


금강은 그런 은유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아저씨 맞네.”


“한 200쯤 들어오지 않았어?” 금강이 물었다.


은유는 급여명세서를 열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204만 5,980원.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이네.” 은유가 들뜬 어깨로 말했다.


“그 돈으로 뭐 할 거야?”


“설렁탕에 김치 추가.”


“그건 원래 공짜잖아.”


“공짜면 더 좋고.”


파란불이 켜진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은유는 말했다.

“담배 피우지?”


금강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팀장님 안녕하세요.”


은유가 자리로 들어서며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팀장은 힐끔 보기만 하고는 대답도 없이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저 새끼, 아침부터 왜 저래?’

은유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PC를 켜고 메신저에 로그인하자마자 대화창 하나가 튀어 올랐다.


경영지원부 경영지원팀 한태산 팀장

표대리

잠깐 자리로


“아…” 은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3미터도 안 되는 거리를 날듯이 뛰어갔다.


“어제 보낸 차년도 사업계획서 말이야.”

팀장이 모니터를 가리켰다.

“급여지원체계 시스템 개편 넣으라고 내가 얘기했지?”


은유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팀장이 지시한 내용이 머릿속 깊은 곳에서부터 전두엽까지 바로 건져 올라왔다.

업무 누락이었던 것이다.


“아… 그… 저…”


은유의 더듬거리는 소리에 팀장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서 보충해서 다시 써 와. 기한 내일까지인 거 알지?”


“넵! 알겠습니다!”


은유는 30km를 걷는 것처럼 무겁게 자리로 돌아왔다.

모니터를 켜자 또 다른 메신저 대화창이 떠 있었다.


시스템운영부 전산팀 김금강 대리

아~ 퇴근하고 싶다

오늘 점심 메뉴 뭐지?


경영지원부 경영지원팀 은유

하…

출근하자마자 팀장한테 깨졌다.


시스템운영부 전산팀 금강

뭐? 왜??

보나 마나 네가 잘못했겠지.


경영지원부 경영지원팀 은유

그래… 맞아.

추가하라던 내용 깜빡했어.


시스템운영부 전산팀 금강

그러게 좀 챙기지 그랬냐.

그래서 오늘 점심 뭐임?


경영지원부 경영지원팀 은유

아오 식충이 새끼야.

네가 직접 알아봐라 ㅡㅡ


시스템운영부 전산팀 금강

힝… 너무해 ㅠㅠ


은유는 ESC를 거칠게 눌러 창을 꺼버렸다.

푸른 바다와 거대한 암벽이 어우러진 배경화면 위로 그의 피곤한 얼굴이 비쳤다.


‘아… 나 진짜 왜 이러냐.’


그는 한숨을 토해내고 보고서 파일을 열었다.

출근한 지 고작 5분이 지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끄아아아아악—!”


은유가 기지개를 켜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의자 등받이가 ‘꺾’ 소리를 내며 휘청거렸다.


시계를 보니 21시 54분 46초. 47초. 48초.


“하… 씨발.”


사무실에는 은유 혼자뿐이었다.

형광등 한 줄 아래, 그의 그림자만 키보드 위를 오갔다.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심장 뛰는 소리보다 더 컸다.


어깨, 목, 허리…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이거 산재감 아니냐?’

은유는 눈을 비비며 생각했다.

그리고 뒤늦게, 자신이 몇 시간째 소변을 참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 씨… 화장실…”


그는 다급히 일어났다.


문고리를 잡으려는 순간—


문이 ‘덜컥’ 은유 쪽으로 열렸다.


“으악!”


은유는 뒤로 넘어지며 소리를 질렀다.


“어머! 괜찮으세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은유는 엉덩방아 충격과 바지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불쾌한 축축함에 정신이 없었다.


“아… 네. 괘, 괜찮아요…”


그때 손이 불쑥 들어왔다.


“정말 괜찮으세요?”


그 손을 잡고 고개를 들자—

서대리였다.


“표 대리님,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야근하신 거예요?”

서대리가 그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은유는 그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을 깨달았다.

마치 막 밖에서 들어온 사람 같았다.


“네… 오늘까지 완성해야 하는 보고서가 있어서요. 서대리님은… 이 시간에 어떻게…”


“내일 출장인데, 법인카드를 깜빡해서요.”

서대리가 미소 지었다.

“그래서 잠깐 가지러 왔어요.”


“아… 그렇구나. 출장…”


은유는 멍하니 되뇌었다.


“그나저나 나가시려던 길이었죠?” 서대리가 물었다.


“아— 네. 화장실 가던 중이었어요.”


“어머, 죄송해요.”


은유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제가 부주의했죠. 시간대가 시간대다 보니…”


서대리는 장난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친절하신 것 같아요. 대리님. 예전부터 느꼈지만.”


“…아.”


말문이 막혀버렸다.

은유는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봤다.


긴 갈색 머리.

옅은 쌍꺼풀.

세운 듯한 코와 말간 입술.

빛 아래에서 반사되는 눈동자.


‘…그냥 보고만 있어도 기분 좋아지는 얼굴이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럼, 지나갈게요.”

서대리가 미소를 남기고 걸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은유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법인카드 가지러 온 사람치고는 너무 화려했다.


붉은 코트, 금색 체인의 구찌 가방, 검은 어그 부츠.

마치 ‘집에 있다가 잠깐 회사에 들리러 나온’ 사람이 아니라

‘이제 약속 나가는’ 사람 같았다.


향수 냄새도 강했고, 화장도 막 마친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 모든 위화감이 은유의 뇌리를 스쳤다.


사무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그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바지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감각이 다시금 피부를 스쳤다.


“아…”


은유는 얼굴이 벌게져 급히 화장실로 뛰어갔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술과 고기 그리고 뒷담화 #2화